주간동아 375

2003.03.13

TV 속 지하철만 봐도 가슴이 ‘덜컥’

생존자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호소 … 환청·악몽 등 정신·약물 치료 반드시 받아야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3-03-05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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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속 지하철만 봐도 가슴이 ‘덜컥’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재난은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정신적 질환을 발생시킬 위험이 크다.

    ”지하철이 불타는 꿈을 꾸고, 자다가 숨이 막혀 자꾸만 깨어납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사고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승객들 중 이런 후유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하철 참사가 있은 지 2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매일 사고 당시의 꿈을 꾸고, 라이터 불만 보아도 깜짝 놀라는 이도 있다. 심한 경우는 멀쩡한 기차를 보고도 불이 난 듯한 환각과 환청에 시달려 일에 지장을 받을 정도.

    이번 참사 당시 함께 사고 지하철 안에 있다 약혼자를 잃은 김모씨(36)는 직장에도 나가지 못한 채 술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 다른 사람이 말을 걸면 상대가 누구든 무조건 욕지거리부터 하기 일쑤다. 가족들은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며 달래보지만 그의 공격성은 좀처럼 숙지지 않는다.

    지난해 전국을 휩쓸었던 수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지하철 참사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혼란과 장애를 남겼다. 특히 이번 참사는 한정된 공간에서 워낙 많은 인명이 갑자기 희생된 사건이어서 사건현장에 있었던 승객이나 부상자는 물론 유가족들까지 일시적 정신장애를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반사회적 질환으로 발전할 수도



    TV 속 지하철만 봐도 가슴이 ‘덜컥’

    지난해 수해 피해자들도 이 같은 질환을 앓아왔다.

    막연한 초조와 불안이 가슴을 억누르고 곧 그 감정이 절망과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억울함과 애통함이 분노와 증오로 바뀌면서 무엇인가를 마구 때려부수고 싶어진다. 만사가 귀찮고 싫어지면서 말하기조차 싫다. 대인기피증마저 생겼다. TV에 지하철만 나와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사소한 일에도 속상해하거나 쉽게 짜증을 낸다. 자주 다투거나 흥분, 울음 등을 참지 못한다.

    지하철 참사를 겪은 사람 중 만약 이런 증세가 계속된다면 일단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해보는 것이 좋다. 큰 재난을 겪고 나서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이런 증세가 지속될 경우 질병이 된다. 일종의 정신장애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바로 그것.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의학적으로 일종의 불안장애로서 홍수, 태풍,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교통사고, 화재와 같은 위협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에 반복적으로 사건을 회상하거나 꿈을 꾸며 마치 그 사건이 다시 일어날 것 같은 착각, 환각 등에 시달리는 증상을 말한다. 강간과 폭행 등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여성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정신적 질환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방치했다간 인격장애와 알코올의존증 등과 같은 반사회적 질환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므로 적극적인 치료가 필수적이다.

    TV 속 지하철만 봐도 가슴이 ‘덜컥’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극복 여부는 피해자 자신과 가족 주변사람들의 치료 의지에 달려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반적 증상은 그 외에도 많다. 외부 자극에 지나치게 과민해져 사소한 자극에 쉽게 놀라거나 반대로 매사에 무관심해 일상적인 활동이나 성에 대한 욕구가 감소하기도 한다.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신체증상을 호소하는가 하면 드물게는 기억상실이나 집중력 감퇴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이 재해로 죽은 경우에는 자신만 살아남은 데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기 쉽고 재난이 피할 수 있었던 인재인 경우에는 그 억울함으로 인해 보복과 공격 충동이 폭발할 수도 있다. 분노가 지나간 다음에는 상대적 무기력감, 죄책감, 우울 등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환자 고통 공감이 최선의 방법

    성균관대 의대 강북삼성병원 신영철 교수(정신과 전문의)는 “이런 증상들은 그동안 나름대로 구축되었던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벽이 심한 충격으로 댐이 일시에 무너지듯 파괴되어 통제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학력이 낮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피해기간이 길수록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와 주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선 환자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회피하려 하거나 반대로 자신이 느끼는 정신적 충격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삭이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주변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사고 당시를 이야기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치료에 가장 큰 도움이 된다.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이해와 공감도 환자의 치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재난을 당한 환자가 나쁜 기억과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 성균관대 의대 정신과 오강섭 교수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겉치레의 위로나 형식적인 도움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며 “특히 ‘그깟 일로 왜 그러느냐’거나 ‘그냥 참고 잊어버려라’라는 식의 조언은 증세에 따라 장애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고 충고했다. 즉 인내를 강요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처한 환경과 정신적인 고통을 깊이 공감해주는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를 줄여나가는 최고의 치료법이라는 이야기다. 또 외상 후 스트레스는 충격이 큰 만큼 회복기간도 길어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의 장기간에 걸친 관심과 느긋한 마음이 필수적이라는 게 정신과 전문의들의 지적.

    물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자발적인 노력과 주변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증세가 전혀 호전되지 않을 때는 정신과를 찾아 정신치료 및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아야 한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 정신건강병원 이홍식 병원장은 “자가치료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이 나타나면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상담을 해야 한다”며 “정신과적 치료의 경우에도 조기발견과 조기치료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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