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0

2002.11.21

“공부病 없이 무공해 農心 영글어요”

전주한농예능학교, 참일꾼 요람 ‘자리매김’ … 외국인 등 144명 학생 동고동락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2-11-13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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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病 없이 무공해 農心 영글어요”

    한농예능학교가 위치한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은 씨 없는 곶감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아이들이 감나무에 매달려 만추를 만끽하고 있다.

    11월6일 바깥세상에선 수능 한파가 오느니 마느니 피가 마르는데 전북과 충남의 경계선에 위치한 전주한농예능학교 교정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바로 전날 치러진 신축교사 준공식의 뒷정리를 하기 위해 남은 몇몇 아이들만 눈에 띄었다. 이들이 건네는 살가운 인사에 외지인의 마음의 경계도 탁 풀린다. “모두들 밭에 야콘 캐러 갔어요.”

    동상저수지를 끼고 도는 대둔산 기슭 해발 700m에는 벌써 두 차례나 눈이 왔을 만큼 겨울이 서둘러 온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푸근한 햇살에 봄날 눈 녹듯 땅이 풀려 미뤘던 야콘 캐기가 시작됐다. 차로 5분 거리쯤 떨어진 산자락에 있는 밭에서 100여명의 아이들이 무슨 놀이라도 하듯 신나게 흙을 파헤친다. 오늘 캔 야콘은 겨우내 먹을 아이들의 식량이다.

    밭에서 만난 졸업반 민희(19)는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방에서 쉬지 그랬느냐”고 묻자 “땅의 지기를 받아야 건강해지죠”라며 씩씩하게 일을 계속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평소 새벽 4시에 일어나 간단히 운동이나 명상을 하고 오전 6시 아침식사를 한 후 8시부터 국어 영어 수학 한문 컴퓨터 등 일반과목 수업을 받는다. 하지만 이날은 오전 내내 노작을 한 탓에 허기가 일찍 찾아왔다.

    정식 학교 아니지만 지원자 쇄도

    매주 수요일은 불기운이 전혀 없는 음식만 먹는 천연식의 날이다. 날고구마, 날다시마, 방울토마토, 토마토즙으로 무친 채소무침과 밥 대신 28가지 생곡식가루가 나온다. 모든 곡식은 한국농촌복구회(이하 한농)의 3무(無)농법(무농약, 무제초제, 무비료)에 따라 재배한 것이고, 다시마도 여름에 아이들이 직접 바다에서 채취해 말려두었던 것이다. 어떤 음식에도 인공조미료는 넣지 않는다. 고기맛이 나는 요리조차 콩과 밀을 원료로 한 식물성 고기다. 이 학교 설립자이며 한농을 창립한 석선 박광규 선생은 “사람의 건강은 먹는 것이 좌우하며, 그 건강이 정신을 좌우한다”며 무엇보다 건강한 먹을거리를 강조한다.



    갓 입학한 아이들이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새벽 4시 기상과 신선한 채소 위주의 식단이다. 러시아에서 온 안드레이(14)도 처음엔 밥상머리에서 울었다. 그러나 학교생활 2년째에 접어든 지금 먹는 것도 즐겁고, 풀 뽑으며 논밭 일 하는 것도 즐겁다.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타는 학교 농악팀에서 그는 형들의 어깨를 타고 올라 열두 발 상모를 돌리는 재주꾼이다. 입학 초기에는 과자 같은 군것질거리를 탐하던 아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선한 먹을거리로 입맛을 바꾼다. 허태임 부교제(일반학교의 교감)는 “야단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둬도 다 알아서 지킨다”고 했다.

    “취재 오셨어요?” 싱긋 웃으며 다가오는 게스케이(18). 옆에서 누가 귀띔하지 않으면 외국인인지 모를 정도로 한국어가 유창하다. 일본에서는 더 이상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결국 한국까지 오게 된 말썽꾼이라는 사실을 누가 믿을까. 졸업을 앞둔 게스케이는 한국에 남기를 원하지만 학교측은 일본으로 돌아가 한·일 문화교류를 위해 힘써줄 것을 권하고 있다.

    한농예능학교는 현재 중·고교 과정에 14~19세까지 144명의 학생이 재학중이다. 대부분 각 지역 한농회 소속 회원의 자녀들이지만 게스케이나 안드레이처럼 천연농법을 배우러 유학 온 외국인도 11명 있고 비회원 자녀도 20명 가량 된다.

    아무리 정식 학교가 아닌 사회교육시설로 졸업장을 받을 수 없다 해도 입학은 쉽지 않다. 학교시설이 한계에 달한 데다 도중에 포기할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뽑지 않기 때문이다. 매스컴에 알려진 후 찾아오는 이들은 많지만 학교측은 “졸업장이 없다” “대학 보내는 학교가 아니다” “교육과정이 힘들어 웬만해선 견디기 어렵다”며 돌려보내기 바쁘다. 한농회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 먼저 3개월의 수습기간을 허락하고 정식입학 절차를 밟는다. 지금은 재미교포 2세인 윤재와 지원이, 미국인 빌리가 기숙사에 머물고 있다.

    허태임 부교제의 말.

    “왕따, 흡연, 폭력 없는 3무(無)학교라고 알려지면서 호기심에 방문하는 분들도 많아요. 절반은 비 새는 허름한 교실과 기숙사를 보고는 실망해서 돌아갑니다. 그래도 끝까지 입학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수습기간을 거쳐 입학을 허락합니다. 서울의 한 사립초등학교에 다니며 2년째 입학을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에게 왜 이 학교에 오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서울처럼 공부병 걸린 애들이 없어서요’라고 하더군요. 아이들 눈에도 무언가 다르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공부病 없이 무공해 農心 영글어요”

    “야콘은 그냥 먹어야 제 맛.” 모처럼 푸근해진 날씨 덕분에 미뤘던 야콘 캐기가 시작됐다(위쪽). 대회만 나가면 상을 타오는 한농예능학교 농악팀.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가 열두 발 상모를 멋지게 돌리고 있다.

    올해는 드디어 개교 이래 꿈이던 신축교사(1층 기숙사, 2층 교실, 3층 강당)를 완공했다. 지난해 이 학교를 방문한 한완상 전 교육부총리가 “이곳이야말로 내가 늘 생각하던 교육의 모델로 참교육의 현장”이라며 지원을 약속했고, 그로부터 1년 후 비가 새지 않는 번듯한 집 한 채가 산등성이에 자리잡았다. 지난 여름 한창 건물 공사가 진행될 때 아이들은 손 놓고 기다리지 않았다. 말리는 선생님들에게 “우리가 살 집인데 어떻게 보고만 있느냐”며 팔을 걷어붙이더니 직접 등짐 지고 벽돌을 날랐다. 나중에는 콘크리트 타설작업까지 척척 하는 아이들을 보고 전문가들이 혀를 내둘렀을 정도.

    그러나 정작 선생님들은 번듯한 신축교사 앞에서 걱정이 앞선다. 너무 좋은 집에 살다 보면 한밤중 비가 새서 젖은 자리에 누워 자는 친구를 슬쩍 자신의 마른자리로 옮겨놓는 배려와, 몸이 아파 농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이가 같은 방 친구의 빨래까지 해놓고 기다리는 넉넉함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해서다. “건물이 너무 좋아 진실한 사람 뽑기가 더 어려워질 것 같다”는 선생님들의 말을 들으니 가난이 가장 큰 공부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곳의 아이들은 책상이 아닌 삶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유기농사뿐 아니라 자동차와 각종 기계들을 수리하고, 옷을 짓고, 음식을 만드는 생활기술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졸업생 80여명은 대부분 해외로 진출했다. “한국 땅은 주인이 너무 많다, 외국의 빈터를 찾아가라’는 석산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이미 한농회는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러시아, 일본, 대만 등 11개 지역에 농장을 일궈놓았다. 졸업반인 경민이도 선배들의 뒤를 이을 참이다. 선배들이 전 세계 농장에서 보내온 편지에는 “학교 다닐 때 유기농법을 제대로 배워두지 않으면 현지에 와서 고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재학생들을 긴장하게 한다. 오지마을의 일상은 오후 8시만 되면 정지한다. 바깥세상이 현란한 네온사인에 휩싸일 때 그들의 침묵은 이른 새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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