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0

2002.11.21

“내가 유리해, 당신이 관둬”

노무현 후보 “TV토론 및 여론조사로 결정” 전격 제의…정몽준 후보 “양당 대의원 여론조사” 역제의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2-11-13 12: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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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유리해,  당신이 관둬”
    ‘도박인가, 치밀한 계산인가.’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던진 깜짝 카드가 꺼져가던 후보단일화의 불씨를 되살렸다. 노후보는 11월10일 8개 권역별 TV토론 및 여론조사 방식에 의한 단일화 방법을 전격 제의했다.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는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가 주장해온 방식. 그러나 사즉생(死卽生)식 노후보의 밀어붙이기에 질린 것일까. 뒷걸음치던 정후보는 이회창 후보측의 역선택 가능성을 거론하며 대의원 경선형 여론조사를 역제안, 후보단일화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 방법은 노후보로서는 위험부담이 크다. 노후보 발언 이후 측근들은 “마지막 카드를 벌써…”라며 무모한 도박이라는 반응이 많다. 기선을 제압한다는 상징성은 있지만 이후 있을지도 모를 부메랑 효과에 대한 우려감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노후보측은 당초 “경선과 TV토론을 통한 검증이라는 최소한의 요건만 갖춰달라”는 입장이었다. 이른바 경쟁적 방식이다. 양보하는 모양새지만 노후보로서는 단일화 과정에 유리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내건 셈이다. TV토론과 국민경선은 노후보의 특기와 장점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노후보측으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노후보의 한 측근은 “화려한 대중연설을 통해 제2의 노풍을 기대할 수도 있다”며 TV토론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경선의 장이 마련된다면 이길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정후보측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정후보측이 “외부세력이 개입할 수 있는 선거인단 동원 경쟁 방식과 양측이 한 군데 경선장에서 경쟁하는 방식, 그리고 경선장에서의 연설 등은 안 된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노후보의 입과 손을 봉쇄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노후보측은 “정후보의 경선·토론 기피증 때문”이라고 밀어붙였지만 정후보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단일화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거리를 좁히지 못해 고민하던 노후보 주변에서 최근 “후보단일화의 방법보다 목표를 의식해야 한다”는 전술적 변화론이 거론됐다.

    盧 측근 “마지막 카드를 벌써… 위험부담 커”

    국민경선을 고수하다 실패할 경우 져야 할 책임, 1강2중 구도 타파를 위한 유일한 대안론 등을 들어 보다 유연한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TV토론과 국민경선이란 원칙을 던지고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방식으로 돌아선 배경에는 이 같은 전술적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노후보의 전술 변화가 즉흥적인 선택이 아님을 증명하는 흔적들은 많다. 우선 노후보측은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거론하기 전 현재 상황을 면밀히 분석했다. 핵심 측근과 당 외곽조직이 이 작업에 가동됐다. 여론조사를 분석한 결과 노후보측은 가파르지는 않지만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한 관계자는 “현재는 정체 상황이지만 탈당파동 등 당 내홍이 끝나면 지지율이 다시 반등할 것이란 믿음을 주는 근거들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특히 지지율 상승 가능성은 전략지역인 호남 및 충청, 부산 등지에서 골고루 나타났다고 이 관계자는 설명한다. 반대로 정후보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폭로 이후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점에 유의했다. 노후보측은 정후보가 지지율을 상승시킬 반전수를 찾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점을 인지했다. 노후보측은 후보단일화 협상팀이 1차협상(9일)에서 ‘TV토론 실시’에 합의한 점을 주시했다. TV토론이 이뤄질 경우 능력과 자질의 차별화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노후보는 11일 전남 순천에서 열린 종교지도자 조찬간담회에서 “한자리에 앉아 토론하면 30분이면 충분하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런 자신감은 노후보가 국민경선이란 원칙을 접더라도 다음주 또는 그 이후로 여론조사 실시 시기가 결정될 경우 정후보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계산으로 이어졌다. “성격을 못이겨 사고를 쳤다”며 폄하된 노후보의 제안은 이처럼 면밀한 분석과 검토가 뒷받침된 전술적 접근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11일 노후보측의 카드를 받아 든 정후보측은 원칙적으로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지만 한나절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대의원 경선형 여론조사였다. 노후보가 제안한 여론조사 방식은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이 보다 쉬운 상대를 고르는 역선택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해명이 뒤따랐다. 정후보 참모들은 TV토론과 여론조사만으로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는 것은 오히려 정후보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여론조사 속에 숨은 위험인자를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노후보의 제의를 수용할 경우 정후보는 단일화 이외의 진로는 모두 포기해야 한다.

    정후보측은 당초 경선방식을 도입하되 각 당이 추천하는 선거인단을 절반 이상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무작위 추출된 선거인단이나 여론조사 방식 등으로 채우는 절충식 경선 방안을 선호했다. 한 당직자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이번에 제안한 대의원 경선형 여론조사가 바로 이와 유사한 방법. 각 당이 추천하는 선거인단을 통한 단일화 방법은 정후보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국민통합21은 순수 정후보 지지자들만으로 대의원들을 구성할 수 있다. 반면 노후보는 당내 반노 성향 대의원들이 섞여 있어 피아 구분이 힘들다. 적전(敵前)분열 현상을 적절히 이용하자는 것이 정후보측의 계산이다. 여기에 후단협이 가담하고 여론조사 결과를 도입할 경우 정후보는 훨씬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은 오차 범위 안에서 정후보가 앞선다. 특히 진보적인 20, 30대층에 국한된 노후보 지지자보다 40대 및 여성 유권자 등 광범위한 지지층이 있는 정후보가 훨씬 유리하다. 지난 5일 동아일보-KRC가 실시한 단일후보 선호도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34.7%, 정몽준 37.1%로 나타났다.

    鄭 측근 “현란한 대중연설에 밀릴 가능성”

    “내가 유리해,  당신이 관둬”
    그러나 표심은 유동적이다. 여론조사 실시 시기와 정치상황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특히 두 후보가 한자리에 앉아 우열을 검증받는 TV토론은 상황을 매우 유동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정후보측은 정체 내지 하락하는 정후보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현란한 노후보의 대중연설과 공세에 밀릴 확률이 많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 측근은 “눌변인 정후보가 최근 TV 앞에서는 보다 박력있게 연설을 하라는 격려성 질책을 받았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지시형 오너로 활동해온 정후보는 토론문화에도 익숙지 않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TV토론과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라는 깜짝 카드를 받아든 정후보 진영은 다소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 의미에서 노후보의 승부수는 일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사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우선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승복과 불복의 기준이 모호하다. 이해찬 선대위 기획본부장은 “여론조사에서 최소한 5%포인트 이상 차이가 나야 유효할 것이며 3~4%포인트면 어느 쪽이든 흔쾌히 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통합21 이철 조직위원장은 “단 0.1%의 차이라도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정치적 합의”라고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여론조사 응답자에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을 방법도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여론조사가 과연 대선후보를 뽑는 유효한 수단인가라는 본질적 질문도 제기된다. 한나라당 권철현 후보비서실장은 “후보단일화보다 여론조사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게 낫다”고 비꼬기도 했다. 탈당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또 다른 변수다. 정후보가 후보단일화를 통해 시간을 끄는 것은 연쇄탈당을 유도하려는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대규모 탈당이 현실화하고 노후보가 제3후보로 전락할 경우 정후보가 지금처럼 단일화에 나설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노후보의 깜짝 카드, 그 뒤를 이은 정후보의 역제의. 그들의 손에는 절반의 기회와 절반의 위기가 함께 쥐어져 있다. 후보단일화를 향한 건곤일척의 대전은 조용히 준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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