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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번역작가들도 ‘억대 연봉시대’

인세 방식 도입으로 안정된 수입 확보 … 베스트셀러와 함께 지명도 쑥쑥 ‘스타 탄생’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전문 번역작가들도 ‘억대 연봉시대’

전문 번역작가들도 ‘억대 연봉시대’
폴오스터의 자전적 소설 ‘빵 굽는 타자기’(김석희 옮김·열린책들 펴냄)에는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닥치는 대로 글쓰기 중에 번역도 있다. 사실 직장을 그만둔 후 주인공 ‘나’의 주 수입원은 번역이었다.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날마다 너무나 많은 양을 번역해야 했고, 일할 마음이 내키든 말든 날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정해진 작업량을 처리했다. 차라리 프라이팬에서 햄버거를 뒤집는 편이 더 수지맞는 일이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우리(나와 아내)는 자유로웠다.”

책 기획단계부터 공동 참여

번역작업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실업자 혹은 자유직, 적은 보수, 몸으로 때우기 등의 달갑지 않은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교수들의 학술번역이나 점잖은 아르바이트로서 번역은 예외다.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빵 굽는 타자기’의 주인공처럼 ‘돈벌이를 위한 번역과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전문 번역인 시대가 열리면서 저자 못지않게 이름이 알려진 스타 번역자와 억대 연봉 번역자가 탄생하고 있다. 최근 출판계를 깜짝 놀라게 한 뉴스의 주인공은 ‘셜록 홈즈 전집’(전 9권·황금가지 펴냄)을 번역한 백영미씨(38). 지난 2월부터 국내 최초 완역이라는 설명과 함께 선보인 ‘셜록 홈즈 전집’은 지금까지 7권이 발매돼 60만부 가까이 팔렸다. 출판사도 예상치 못한 대히트에 가장 놀란 사람은 번역자 자신이었다.

그간 출판계 관행대로라면 번역가는 200자 원고지 1장당 3000~4000원의 번역고료를 받으면 그만이었다(매절 방식). 그 책이 한 권도 안 팔리든 수십만 부가 팔리든 번역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하지만 백씨는 ‘셜록 홈즈 전집’을 번역하면서 출판사측과 10%의 인세 계약을 맺었고, 이번의 대히트로 4억원이 넘는 인세를 챙겼다.



전문 번역작가들도 ‘억대 연봉시대’
번역료를 인세 방식으로 지급한다 해도 평균 3~5%인 것과 비교하면 10%는 파격적인 조건이다. 장은수 황금가지 편집장은 “회사의 번역료 지급 방침이 원고료보다 인세를 우선한다. 물론 인세 방식에서는 책이 잘 팔리지 않아 번역자가 손해를 보는 일도 생기지만, 출판사와 함께 책을 기획하고 만들고 판다는 의식이 생겨 시너지 효과가 있다. ‘셜록 홈즈’의 경우 저자 사후 50~70년까지 인정하는 저작권이 소멸된 책이어서 높은 인세 계약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홈즈 전집의 성공 뒤에는 출판사와 번역자의 오랜 신뢰관계가 있었다. 직업 번역가인 백씨는 지난 몇 년간 황금가지 일을 하면서 번번이 원고료에도 못 미치는 인세에 만족해야 했다. 출판사측도 잘 팔리지 않는 책을 인세 받고 번역해 주는 백씨가 고마웠고 일종의 부채감이 있었다. 홈즈 전집을 의뢰한 것이나 10% 인세도 그런 관계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현재 백씨는 전집 마지막권(9권) 번역을 위해 칩거중이다.

백영미씨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번역계의 신데렐라라면, 이미 10년 전 번역계에 입문하자마자 스타가 된 이도 있다. 한국에서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이세욱씨(41).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으로 학원 강사와 실용서 번역을 하다 ‘열린책들’과 만나면서 소설 번역을 시작했다. 첫 작품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번역이 깔끔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개미’에서 대박이 터졌다.

‘개미’로 당장 번역자가 큰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이 일로 이씨는 확실하게 전문 번역가로 자리잡았다. ‘개미’ 이후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타나토노트’ ‘아버지들의 아버지’ ‘천사들의 제국’ ‘뇌’(이상 열린책들 펴냄) 등 국내에 출간된 베르베르의 작품은 당연히 이씨의 몫이었다.

93년 처음 베르베르와 만난 이래 지금도 수시로 교류하고 있는 이씨는, 세 번째 책을 번역할 즈음 베르베르가 “번역자도 나를 만나서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번역해서 돈을 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번역을 하기 위해 불어도 가르치고 방송원고도 쓰는 등 부업으로 생활을 메워나갔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번역가도 인세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세욱씨는 인세 방식의 장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일단 번역자도 자신의 책이라는 책임감과 자부심이 생긴다. 번역 원고만 넘기면 그만이 아니라, 표지나 홍보 방식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저자와 작품에 대한 자료를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노력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생존작가는 본격 번역에 들어가기 전 직접 만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씨는 베르베르 신작 ‘뇌’(2권)의 판매 호조에다 그동안 인세로 계약한 책들이 꾸준히 팔리면서 억대 연봉의 번역가가 됐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번역과 돈만 좇는 번역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뇌는 처음 접하는 주제여서 책을 받고 석 달 가까이 뇌 관련 공부만 했다. 돈 때문이라면 하루라도 시간을 아껴야겠지만, 작품이 좋고 작가가 좋으면 번역 행위 자체가 주는 기쁨에 만족할 수 있다. 번역 일을 하고 싶다며 수입부터 묻는 사람들에게 다른 일을 해서 생활을 지탱하더라도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을 골라 일을 시작하라고 권한다. 그래야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1세대 전문 번역가로 꼽히는 이윤기, 안정효씨에 이어 김석희 정영목 이종인 이희재 공경희 윤희기 안인희 유혜자 이세욱 김훈 김남주 양억관 김난주 한기찬 강주헌씨 등이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무명의 번역자 시대를 마감하고 저자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스타 번역자의 길을 열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한 김석희씨는 시오노 나나미 전담 번역자로, 정영목씨는 마이클 크라이튼(쥬라기 공원)과 존 그리샴(의뢰인)의 인기와 함께 지명도가 높아졌다. 이세욱씨는 프랑스의 베르베르, 유혜자씨는 독일의 쥐스킨트, 프랑스의 상페와 이름을 나란히 했고, 양억관씨는 일본의 무라카미 류, 김난주씨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짝을 이뤘다.

번역자의 지명도가 높아짐과 동시에 최근 들어 번역료 지급에 인세 방식이 적극 도입되면서 안정된 수입을 확보하는 번역자들도 늘고 있다. 100만부 가까이 팔린 ‘반지의 제왕’(전 6권) 번역자인 한기찬씨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공경희씨 등이 인세 혜택을 톡톡히 받고 있는 경우다. 사실 15년 번역 경력의 공경희씨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외에도 시드니 셀던, 존 그리샴, 로빈 쿡 등 초대형 베스트셀러들을 주로 번역했지만 원고료 이상을 받아본 적은 없다. 그러나 뜻밖에도 인세로 계약한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다른 경쟁 번역서들을 제치고 10만부를 넘어섰고 청소년 필독도서여서 장기적인 스테디셀러가 될 전망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출판계에서 인세 방식의 번역료 지급은 시험 단계다. 출판사측은 “번역자들이 인세 방식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고 번역자들은 “인세로 줄 만한 책은 원고료로 계약하려 한다”며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한편 공경희씨는 “인세로 계약하면 책을 선택할 때부터 번역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의 효과도 있지만 거꾸로 상업성이 높은 책만 고를 우려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인세 방식이냐 원고료 방식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출판계가 새로운 번역자들을 발굴하고 재교육시키는 시스템을 먼저 갖춰야 한다”고 했다. 배우 보고 영화를 고르듯, 번역가 이름 보고 책을 고르는 시대가 열릴 것인가.





주간동아 350호 (p58~59)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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