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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앨범도 섹시해야 잘 팔린다

클래식에도 본드, 플래니츠, 사라 브라이트만 등 ‘섹시스타 전성시대’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클래식 앨범도 섹시해야 잘 팔린다



클래식 앨범도 섹시해야 잘 팔린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는 ‘저주받은 선물, 나의 미모여’라는 아리아가 나온다. ‘예쁜 게 경쟁력’이라는 광고 문구까지 방송되는 마당에 미모가 저주라니, 요즘 세태의 시각으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최근까지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분명 예쁜 연주자에 대한 편견이 존재했다. 지나치게 예쁘거나 잘생긴 연주자는 ‘실력보다는 미모로 인기를 얻었을 거야’ 하는 시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것.

대표적인 연주자가 1980년대에 활동했던 첼리스트 오프라 하노이였다.

섹시 연주자 1호는 바네사 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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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출신의 이 여성 첼리스트는 촉촉하게 젖은 큰 눈에 풍만한 몸매, 그리고 영화배우 뺨치는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준급의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섹시함만 내세우는 연주자’라는 악의 어린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스듬히 누워 첼로에 손을 얹고 촬영한 앨범 재킷 사진에 대해서는 손의 포즈가 너무 노골적이다, 자세가 선정적이라는 등 엉뚱한 비난까지 나왔다.



만약 하노이가 2000년대에 데뷔했다면 미모가 장애 아닌 커다란 무기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새로운 세기의 클래식 연주자들에게는 실력 외에도 섹시함과 미모가 필수적 요소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 현악기 대신 전자악기를 사용하는 소위 ‘일렉트릭 클래식’ 연주자들은 우아한 긴 드레스와 연주회용 턱시도를 벗고 가죽 바지와 배꼽티, 미니스커트로 한껏 섹시함을 뽐낸다. 언뜻 보면 클래식 연주자가 아니라 록밴드나 팝그룹 같다.

‘섹시한 연주자’ 1호는 95년에 데뷔한 바이올리니스트 바네사 메이다. 전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메이는 젖은 티셔츠 차림으로 물 속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도발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당시 클래식 팬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고 평론가들은 한결같이 싸늘한 눈빛으로 메이를 외면했다. 그러나 바흐의 바이올린 곡을 전자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메이의 데뷔음반 ‘토카타와 푸가’는 대중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앨범은 전 세계에서 45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최근 메이는 자신이 출반한 6장의 음반에서 베스트 곡을 엄선한 ‘더 베스트 오브 바네사 메이’를 내놓으며 식지 않은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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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여성 현악 4중주단 ‘본드’는 바네사 메이의 전략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그룹이다. ‘클래식의 스파이스 걸스’라고 불리는 본드는 바네사 메이의 매니저였던 프로듀서 멜 부쉬가 철저하게 팝그룹 방식으로 기획한 그룹이다.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의 프로모터를 맡기도 했던 부쉬는 영국과 호주에서 음악을 전공한 4명의 현악 연주자를 발탁해 본드를 구성했다. 헤일리 엑커, 타니아 데이비스, 에오스, 게이-이 등 호주, 영국, 중국 출신의 이 여성 연주자들은 한결같이 빼어난 외모를 자랑한다.

비발디의 ‘사계’,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등을 연주한 본드의 데뷔앨범 ‘본’(Born)은 2000년 영국 클래식 음악 차트에서 2위에 올랐다가 클래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트에서 삭제되는 등, 갖가지 화제를 뿌리며 전세계 음반판매 200만장을 가볍게 넘어섰다. 리드미컬한 선율에 맞춰 몸을 흔들며 연주하는 본드의 모습은 클래식 음악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현악 4중주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제임스 본드’에서 그룹 이름을 따 왔다는 ‘본드’는 최근 남북한 군사분쟁을 소재로 한 20번째 007 시리즈의 음악을 맡아 진짜 ‘본드 걸’이 되었다.

200만장 판매가 무슨 대수라고? 하고 묻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클래식에서 음반판매 100만장은 결코 만만한 목표가 아니다. 더구나 가장 인기가 없는 장르인 실내악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겐 4중주단, 에머슨 4중주단 등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의 신보도 1만장을 판매하기 어렵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니버설 EMI 등의 메이저 음반사가 일렉트릭 클래식을 적극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것은 시장논리로 볼 때 자연스러운 귀결인 셈이다. 이들 일렉트릭 클래식 그룹의 제작자들은 아예 팝가수를 키우는 방식으로 젊고 재능 있는 클래식 연주자들을 발탁해 조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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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의 8인조 그룹 ‘더 플래니츠’ 역시 바네사 메이와 본드의 기획에 참여한 프로듀서 마이크 배트가 탄생시킨 그룹이다. 바이올린과 첼로, 더블 베이스, 기타, 플루트, 드럼까지 망라한 다양한 악기 구성이 더 플래니츠의 특징. 이들의 첫 음반 ‘클래시컬 그래피티’는 전자 음향과 리듬으로 꽉 차 있는 본드의 음악에 비해 보다 클래식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전자악기 외에 플루트, 오보에 같은 ‘보통’ 클래식 악기가 연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악뿐만 아니라 성악에서도 속속 섹시 스타가 등장하고 있다. 클래식을 팝 스타일로 노래하는 크로스오버 장르 ‘팝페라’ 가수들 중 많은 수가 본드나 더 플래니츠 못지않은 미모와 섹시함을 자랑한다. ‘오페라의 유령’ 초대 히로인인 사라 브라이트만이 대표적인 경우. 이지, 사피나 등 팝페라 가수들은 외모만 보아서는 매력적인 팝가수인지 클래식 성악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기존의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은 이 같은 연주자들의 등장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가장 보수적이고 시류에 초연했던 클래식 연주자들마저 상업성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또한 이들 음악이 기존 클래식 팬들을 만족시킬 만한 높은 수준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음반사 기획자들은 ‘과거의 잣대로 이들의 음악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차피 이들은 새로운 클래식 팬들을 개척하기 위해 음반사에서 내놓은 ‘전략무기’라는 것이다.

“사실 수준 높은 클래식 애호가라면 굳이 더 플래니츠의 음반을 살 필요는 없죠. 다만 새로움을 찾고 싶은 클래식 팬들, 또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지만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음반은 확실히 어필합니다. 전자악기로 긁어댄다고 해도 이들은 클래식 악보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EMI 코리아 이상민 과장의 말이다.

유니버설 뮤직의 박문선 대리 역시 “음반사의 입장에서는 잘 팔리는 음반이 있어야 새로운 투자도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음악을 ‘뉴 클래식’이라고 부릅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들의 음악을 현대음악의 한 조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자악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일렉트릭 클래식’이 현대음악의 한 부분임을 의미하지요.”



주간동아 350호 (p56~57)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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