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1

2002.02.07

‘5월 광주’의 다큐멘터리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1-12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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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광주’의 다큐멘터리
    정찬씨의 장편소설 ‘광야’가 다시 우리에게 ‘5월 광주’라는 화두를 던졌다. 광야는 1980년 5월 민주화 열기로 가득했던 광주를 가리키는 공간적 의미이자, 계엄군의 유혈진압이 시작된 그해 5월18일 오후 4시부터 계엄군이 도청을 재점령한 5월27일 아침 7시 반까지 처절한 죽음의 시간을 가리킨다.

    정찬씨는 이미 ‘5월 광주’를 소재로 중·단편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슬픔의 노래’ ‘아늑한 길’ 등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장편소설 ‘광야’를 출간하고 비로소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무거운 짐이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 누구나 광주를 향해 느끼는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이다. 한편 작가의 입장에서 그해 5월 광주는 한국전쟁 이래 ‘죽음에 에워싸인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놓치기 아까운 소재이기도 했다.

    소설은 각종 광주항쟁 기록들을 토대로 철저하게 다큐멘터리적인 형식을 취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배경은 전두환, 최규하, 정승화, 김재규가 벌이는 권력다툼과 한발짝 물러서 그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 미국(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 등)이다. 이 배경 위에서 해방 광주의 전사들이 움직인다. 무장시민군을 이끈 탁월한 전사 김원갑과 박남선, 수습위원회 조직에 앞장선 송기숙 전남대 교수, 무장해제를 주장하며 학생수습위원회를 이끈 김창길 등은 모두 실존 인물이다.

    그러나 작가는 역사가 담아내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한다. 강경파 지도자 박태민과 그를 따르는 김선욱, 낙오된 병사 강선우, 희생을 막지 못한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도예섭 신부,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지켜보며 기록하는 머턴 기자.

    박태민. 그는 민청세대 활동가로 광주 운동권의 중추세력이다. 이들은 1980년 봄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5·18학살 때 최전선에서 싸웠다. 박태민은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선전과 선동은 혁명의 시작이고 끝이다’는 명제를 가슴에 안고 각종 유인물을 제작하며 민중전사들을 결집하는 데 주력한다. 김선욱. 박태민이 광천공단에 위장취업했을 때 만난 노동자다. 그는 돈 많고 권력 있는 놈들을 죽이겠다며 칼을 품고 살 만큼 분노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사상으로 정화되지 않은 김선욱의 분노는 맹목적이다. 박태민은 그를 열정적인 운동가로 변신시킨다. 강선우. 5월19일 새벽 광주역 플랫폼을 밟은 강선우 하사. 그는 ‘돌격’ 명령에 반사적으로 시위대를 향해 진압봉을 내리치고 대검을 깊숙이 꽂는다. 그러나 유근수 소령의 명령에 따라 부상당한 시민군 포로 2명을 사살한 후 그는 몸이 뻣뻣해지는 증세와 환각에 시달린다. 시민군과의 전투 도중 유소령이 쓰러지자 이번에는 강선우의 총구가 소령의 머리를 향한다. 그리고 대열을 이탈해 도청으로 들어간다.



    도예섭 신부. 눈앞에서 장애인 청년이 계엄군에게 끌려가 죽는 것을 보고 도신부는 신을 대신해 축복을 내리던 손을 거두고 평복 차림으로 도청으로 향한다. 그런 신부의 모습을 보고 머턴 기자가 깜짝 놀라자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만 갑옷을 입고 있으면 쑥스럽지 않겠느냐고. 테리 머턴 기자. 미국 ‘볼티모어 선’의 한국 특파원으로 5월 광주를 목격한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이 끝나고 먼동이 트자 그는 제일 먼저 도청으로 달려가 박태민의 시신을 확인한다. 김선욱은 가슴과 옆구리 총상으로 숨진 박태민을 끌어안고 오열하다 계엄군의 피격으로 절명했고, 강선우는 박태민의 시신을 흰 무명천으로 덮어주다 계엄군의 집중사격으로 그 자리에서 숨졌다. 도예섭 신부의 시신은 도청 본관 건물 앞마당에서 발견되었다.

    정찬씨는 지금까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음에도 늘 충분하지 못한 이유를 ‘역사의 영혼’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때 그 죽음들은 역사의 영혼이 된다고 설명했다. “5월 광주는 영혼의 전율스러운 충돌이었다. ‘광야’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그 충돌의 심연을 우리가 아직까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광야’는 22년 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도 알려고 고민조차 해본 적이 없는 세대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는 일종의 다큐멘터리 교과서다. 한편 ‘5월 광주’를 무용담처럼 떠드는 사람들에게 실제로는 항쟁의 실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사상이란 무력한 불꽃임을 깨닫고도 스스로 죽음의 불길 속으로 뛰어든 이 기이한 순례자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설 ‘광야’는 그 답을 찾고 있다.

    광야/ 정찬 지음/ 문이당 펴냄/ 335쪽/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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