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1

2002.02.07

‘유로’ 원조는 에스페란토

1907년부터 공동통화 제조 유통 … 회비 내고 잡지 구입 등에 사용

  • < 최대석/ 리투아니아 통신원 > chtaesok@hitel.net

    입력2004-11-11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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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로’ 원조는 에스페란토
    그동안 유럽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은 가는 나라마다 새로운 화폐로 환전해야 했다.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각국 동전이 처치 곤란한 짐이 되는가 하면, 베테랑 여행자들은 환율이 좋은 환전소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1월부터 유럽연합(EU) 12개국이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유럽 국가들은 경제공동체와 아울러 단일통화 도입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단일통화 도입이 확정됐고, 1995년에는 단일통화 이름이 ‘유로’로 결정됐다. 유로가 정식 화폐로 도입된 것은 1999년의 일이다. 마침내 2002년부터 자국화폐 대신 유로가 일상생활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유럽인들은 이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단일통화를 추구해 왔다. 바로 만국공통어 사용을 주장하는 에스페란토 지지자들이다.

    프롬유로는 단일통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촉진하기 위해 유럽투자은행과 유럽위원회 등이 1990년 설립한 비영리기구다. 이 기구가 펴낸 ‘유럽을 위한 유로’라는 책자에는 1934년 9월13일자 소인이 찍힌 우편엽서가 실려 있다. 루마니아에서 발행된 엽서의 발신지는 스페인, 수신자는 프랑스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 사용자)다. 에스페란토로 쓰인 이 엽서는 유럽인들에게 호소하는 열 가지 사항을 담고 있다. 유럽연합을 믿어라, 유럽 단일경제구역 창설을 지지하라, 유럽 의회를 대표하는 공동의회 창설을 홍보하라 등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열 가지 내용 중 네 번째 사항은 ‘공동 유럽군대 창설과 유럽 단일통화 도입을 요구하라’다.

    에스페란토는 세계평화 실현을 목표로 폴란드인인 자멘호프가 창안해 1887년 발표한 언어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초기부터 만국공통어 실현과 함께 단일통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에스페란티스토들 사이에서만 통용됐으나 이미 20세기 벽두에 유럽 공동화폐를 실현했던 것이다.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언어학자이자 에스페란티스토인 소쉬르의 제안에 따라 1907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스페스밀로’라는 공동통화를 제조해 사용했다. 독일 에스페란티스토인 차우나는 1921년부터 유럽 단일통화 연구에 몰두했다. 에스페란토 국제조직인 ‘세계연맹’은 기존 지폐에 이어 1959년부터 ‘스텔로’라는 동전을 통용시켰다. 비록 에스페란티스토 사이에서만 사용됐지만 이 화폐는 회비를 내고 잡지를 구독하거나 도서를 구입하는 등 기존 화폐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단일통화의 성공적 도입에 힘을 얻은 EU는 곧 회원국간의 언어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EU는 회원국 언어들을 최대한 존중하는 정책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EU 확대를 눈앞에 둔 요즈음 업무어수(業務語數) 축소, 또는 하나의 공용어에 대한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립적이고 배우기 쉬운 에스페란토를 제안하기도 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EU 의회 의원의 15% 정도가 EU 내의 원활한 의사소통에 에스페란토가 일정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의 화폐’를 위해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났듯, ‘하나의 언어’를 위한 이들의 노력 또한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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