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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고난의 땅’ 아프간을 가다

神 좇다 民心 놓친 ‘탈레반’

종교적 교리에 치중, 행정체계 구축 실패 … 미국 공습 前 내부에서부터 붕괴

  •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神 좇다 民心 놓친 ‘탈레반’

神 좇다 民心 놓친 ‘탈레반’
탈레반 정권이 왜 국가 건설에 실패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국제정치학계의 관심사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10·7 공습을 시작으로 날마다 이어진 미군의 강력한 폭격과 북부동맹의 지상군 합동작전이 탈레반을 망하게 했다. 그러나 카불에서 만난 지식인들은 “미군 공습이 있기 전부터 탈레반 지배하의 아프간은 근대적 의미의 행정국가로 틀을 갖추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1994년 봄 탈레반 세력이 칸다하르에서 봉기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탈레반을 지지했다.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를 비롯한 탈레반 창립세력이 칸다하르에서 두 여성을 강간한 지역사령관을 탱크에 목매달아 죽일 때 아프간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1996년 가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고 1980년대 친소정권을 이끈 모하마드 나지볼라 전 대통령과 그의 동생 샤푸르 아흐마드잘을 죽여 대통령궁 근처 광장에 매달았을 때도 박수를 받았다.

“탈레반이 카불 시민의 환영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 평화와 안전을 주리라는 기대감에서였다”고 카불대 아지즈 아흐메드 라흐만드 교수(54·역사학)는 말한다. 적어도 탈레반은 ‘카펫 도둑’이란 별명을 지닌 군벌들과 달리 민폐를 끼치는 일을 삼갔다. 탈레반은 미소년 하나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 전쟁을 벌이던 탐욕스런 지방군벌의 군대는 아니었다. 동성애는 범죄로 낙인찍혀 동성애자는 팔다리를 잘렸다.

神 좇다 民心 놓친 ‘탈레반’
그러나 곧으면 부러진다던가.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극단적으로 적용해 아프간인의 지지를 잃어갔다. 음악을 못 듣게 하고, 남성들에게 수염을 기르도록 강요하고, 여성들은 나들이 때 반드시 부르카를 걸치도록 하고, 교육과 직업활동의 기회를 빼앗는 식이었다. 근본적으로 탈레반의 실패는 전근대적 신정(神政)정치를 21세기의 문턱에 적용하려 한 데서 비롯된다.

“탈레반의 주력은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비롯해 아프간 접경지역에 퍼져 있는 ‘마드라사’란 이름의 이슬람 교리학교 출신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아프간 내전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다. 이들의 눈엔 아프간 군벌의 부패나 세속적 생활이 역겨웠을 것이다. 그래서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그러나 이슬람 교리 말고는 체계적 교육을 받지 못한 탈레반 주도세력은 한 국가를 이끌 만한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



현재 카불대 학생감인 아크바르 아키브 교수(50ㆍ행정학)는 “탈레반 시절엔 한마디로 행정개념이 없었다”고 말한다. 근대적 정부의 행정체계란 허울뿐이고, 내용적으론 신정정치였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탈레반은 이슬람적 지식은 풍부할지 몰라도 행정 경험이 없는 전사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문가그룹에 속하는 지식인조차 믿지 않았다.” 그래서 교수들이 행정개혁 관련 보고서를 내면 먼저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했고,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몇몇 교수는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했다는 혐의로 연행되거나 투옥되기도 했다.

탈레반 정권 시절 카불대 부총장을 지낸 타지 모하메드 아크바르 교수(55ㆍ경제학)는 아프간에서 손꼽히는 금융전문가다. 그는 탈레반 정권 초기 아프간중앙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를 이끌었다. “화폐 발행규모를 어느 정도로 결정할 것인지는 참으로 어렵고도 미묘한 문제다. 아무리 내전중이지만 인플레를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재무장관인 물라 오기잔 모흐타심은 그런 걸 잘 몰랐다.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화폐를 마구 찍으려 들었다. 나는 탈레반 고위인사들을 설득하지 못해 결국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 결과는 천문학적인 인플레였다. 그래서 “탈레반 시절 돈뭉치는 개도 물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경제정책이란 게 없었다는 얘기다. 재정 파탄에 빠진 탈레반 정권을 도운 것은 파키스탄 정보부(ISI)였다. ISI는 탈레반 행정부 각료들의 월급을 매월 지급했다. 아크바르 교수에 따르면 ISI는 재정부 장관인 물라에게 매달 3억 아프가니(아프간 화폐단위)를 지원했다. 당시 아크바르 교수가 카불대에서 받은 월급은 250만 아프가니였다.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는 종교지도자로선 적합할지 몰라도 정치인은 아니었다는 게 아크바르 교수의 진단이다.

“탈레반 시절엔 인사(人事)의 기준도 없었다”고 굴람 하비브 교수(역사학)는 말한다. 탈레반이 지식인을 잘 믿으려 하지 않다 보니 탈레반 주변을 맴도는 인사들에게 자리 배분이 이뤄지곤 했다. 이른바 정실인사였다. “처음엔 아프간을 위한다는 마음에서 건의서도 내고 보고서도 작성해 보여주었지만, 탈레반 정권의 한계를 알고 나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아키브 교수).

반정부 데모는 엄격히 금지됐다. 감옥에 갈 각오 없이 탈레반을 비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다만 파키스탄 등 나라 밖으로 나간 지식인들만이 탈레반을 비판할 수 있었다. 탈레반 정권을 지지한 파키스탄 정부는 그런 아프간 지식인들의 탈레반 비판을 못 본 체 내버려두었다. “파키스탄 정부가 탈레반을 맹목적으로 지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국제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비브 교수는 분석한다. 교수, 의사 등 많은 전문 인력이 하나둘씩 아프간을 빠져나가 아프간 사회를 건강하게 떠받칠 인력은 증발해 버렸다. 1990년대 전반기 카불을 둘러싼 무자헤딘 사이의 포격전에서 부모와 형을 잃었다는 아키브 교수는 “아프간 사람들은 탈레반 신정정치의 희생양”이라 탄식했다.



주간동아 321호 (p34~35)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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