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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감증명 대리발급 “큰 탈 났다”

도장만 있으면 제삼자가 떼도 속수무책 … 신용카드 발급·대출 보증 악용 ‘엉뚱한 피해자’ 속출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인감증명 대리발급 “큰 탈 났다”

인감증명 대리발급 “큰 탈 났다”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에 사는 김모씨(37)는 최근 자신의 인감도장을 망치로 부숴버렸다. 집안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인감도장 하나 때문에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부인과도 이혼 위기에 처했기 때문. 사건의 발단은 부인 이씨(34)가 남편 김씨의 인감도장을 다른 사람에게 잠깐 빌려주면서 시작됐다.

이씨가 남편의 인감도장을 사채업자 하모씨(37)에게 넘겨준 것은 지난 9월28일. 이씨에게 900만원을 빌려간 하씨가 남편의 인감증명서만 떼주면 빌린 돈을 즉시 갚겠다고 하자, 이씨가 별 생각 없이 남편의 인감도장을 들고 동사무소에 들러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준 것이 화근이었다. 이 과정에서 동사무소 직원은 하씨의 신분만 확인했을 뿐 김씨에게는 사후 통보도 하지 않았다.

하씨는 이렇게 발급받은 인감증명서를 자신의 신용카드 발급, 승용차 구입, 금융기관 대출 보증 등에 사용하면서 두 달 사이 김씨에게 1억6000여만원의 재산상 손실을 입혔다. 이 때문에 김씨는 금융기관과 사채업자들의 채무 상환요구와 차압 등에 시달리다 청소부를 해가며 어렵사리 마련한 23평 아파트를 날렸다. 부인 이씨는 이 모든 과정을 남편에게 알리겠다는 하씨의 협박에 못 이겨 성폭행까지 당했다.

보증, 신용카드 발급, 대출 등 개인의 주요 의사 결정에 다양하게 사용되는 인감증명서의 대리발급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 발전연구회(이하 전공연)는 전국 읍·면·동 사무소에서 하루 평균 발행되는 13만여통의 인감증명서 중 김씨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감증명서가 발급돼 재산상 손실을 입는 경우가 하루에 800여통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인감증명 대리발급 사고율이 0.45%에 이른다는 것이 전공연의 주장이다.

이처럼 인감증명서 대리발급이 가능한 것은 현행 인감증명법 시행령에 인감증명은 본인발급을 원칙으로 하되 본인 인감이 찍힌 위임장을 첨부하면 대리인도 주소지 읍·면·동 사무소에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 다만 피해 사례를 줄이기 위해 일부 공무원은 인감 소유자 본인의 위임장 직접 작성 여부를 꼼꼼하게 확인하지만, 업무가 폭주하는 데다 민원인 편의를 위해 위임장만 가져오면 대리인 신분만 확인하고 인감증명서를 발행해 주는 게 관행화되어 있다.



인감증명 대리발급 “큰 탈 났다”
인감증명 대리발급 피해 사례 중 가장 흔한 것은 가족 중 일부가 가장의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이를 부정 사용하는 경우. 지난 4월25일 경남 양산시에서는 공무원인 남편(40)의 인감증명서 72통을 발급받아 모두 23차례 걸쳐 사채업자로부터 1억300여만원을 대출받은 부인 서모씨(36)가 남편에게 사기혐의로 고소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광주시에선 아버지의 인감증명서를 몰래 발급받아 9억원을 빌려 쓴 아들(41)이 잠적하자 돈을 대출해 준 보험사가 인감증명서를 발급한 관할구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이긴 사례도 있다. 지난 7월27일 대법원은 삼성화재가 광주 동구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구청의 과실이 인정된다”며 광주 동구청에 손해액의 60%인 5억4000만원을 삼성화재에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아들에게 인감증명서를 대리발급해 줬던 동사무소 직원 이모씨(여·34)는 구청에 1억원을 변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자 광주시 공무원들이 집단 반발, 시내 모든 구청이 삼성제품 불매운동에 나서는 등 한바탕 소동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감도장을 숨기고 관리를 잘하면 이런 일을 피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제삼자 대리인 신고제’를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삼자 대리인 신고제’란 인감을 분실할 경우 가족이 본인의 위임장을 받아 동사무소에 가서 인감을 변경할 수 있는 제도다. 이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위임장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의무는 없다. 따라서 가족간에도 ‘제삼자 대리인 신고제’를 악용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10월 말 충북 충주시 양성면에 사는 가정주부 김모씨(29)가 노래방을 경영하다 빚더미에 올라앉자 ‘제삼자 대리인 신고제’를 이용해 시아버지와 남편 인감을 변경 신고한 뒤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금융기관과 사채업자에게 8000만원을 빌려 잠적한 사건이 발생했다. 김씨가 32통의 인감증명서를 떼는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들은 단 한 번도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인감증명 대리발급은 속칭 ‘떳다방’이나 노숙자를 상대로 한 사기꾼들에겐 생존의 근거를 만들어주는 ‘고마운’ 제도. ‘떳다방’들은 가족·친지는 물론, 주부나 노숙자들을 상대로 10만~20만원을 주고 위임장을 산 뒤 이를 가지고 동사무소에서 수십장의 인감증명서를 받아낸다. 이렇게 마련된 인감증명서는 분양회사에 제출되고 이는 주택 청약률을 조작하고 떳다방의 당첨률을 높이는 주범이 된다. 요즘 아파트 분양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경기도 용인시의 한 관계자는 “위임장을 들고 와 인감증명서를 떼는 비율이 70%가 넘는다”고 말한다.

일부 노숙자들의 경우 집에 돌아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것은 돈 몇 푼에 인감증명서를 팔아먹었다가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고 빚더미에 올라앉았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이 노숙자들의 인감증명서를 이용해 대출받거나 보증용으로 사용한 후 종적을 감춤으로써 노숙자가 그 돈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것.

이렇듯 인감증명 대리발급으로 인한 문제점이 불거지자 경북도를 비롯한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지난 7월1일 이후 인감증명서를 대리발급한 후 본인 위임 여부를 확인하는 우편물을 발송할 것을 명문화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타인의 인감증명서를 악용하려는 대리발급자들은 우편 발송문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잠적해 버리는 데다 인감 소유자가 발송문을 받아본다 해도 발급된 인감증명서에 대해 손쓸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선 인감증명 담당 공무원들은 이참에 인감증명제도 자체를 폐지하거나 대리발급제도만이라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8월31일 전국 인감증명 담당 공무원 60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인감증명제도 개선을 위한 대토론회’를 갖고 인감증명제도 폐지를 행정자치부에 정식 건의하기도 했다. 전공연 주최로 열린 이날 대토론회에 발제자로 나선 달구벌 정책연구소장 이대영씨(대구시 북구청 소속 6급 공무원)는 “1914년 일제가 피식민지 국민의 경제통제와 전시동원을 위해 만든 인감증명제도가 국제화시대에 외국인에게는 진입규제 장벽이 되고 선량한 국민과 공무원들에게는 재산상의 피해를 주고 있다. 연간 4800만통씩 발행되는 인감증명서로 4조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한다”며 인감증명제도 폐지를 역설한다.

공무원들의 이런 주장은 학계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개인과 개인의 거래에까지 정부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 금융기관처럼 본인의 사인 같은 것으로 증명 방식을 대체하고 대리발급을 금지해 부작용을 줄여나가야 한다. 또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감증명제는 조속히 폐지해야 한다. 홍보만 잘 된다면 폐지에 따른 불편이나 사회적 혼란은 거의 없을 것이다.”(경일대학교 행정학과 김광주 교수)

사실 인감증명제도는 지난 93년 7월 행정쇄신위원회가 각종 폐해를 없애기 위해 2000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한 제도. 그러나 행정자치부는 인감증명제도를 폐지하기는커녕 올해 초 오히려 2003년까지 인감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주소지가 아니라도 전국 읍·면·동 사무소 어디에서나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일선 공무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행자부 주민과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언젠가는 인감증명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사인간의 공증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현실에서 대안 없이 무조건 폐지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 회피라 할 수 있다. 대리발급 금지는 규제개혁 완화에 역행한다는 측면에서 어려움이 많다”고 해명했다.



주간동아 2001.12.20 314호 (p40~42)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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