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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정치자금 천국’

월급은 푼돈, 특별경비에서 너도나도 챙기기 … 시라크 여행경비 스캔들로 일단 제동

  • < 오정숙/ 유럽문화정보센터 전문연구원 > ojs-ys@hanmail.net

프랑스는 ‘정치자금 천국’

프랑스는 ‘정치자금 천국’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법정에 섰을 때, 프랑스인은 한결같이 코웃음을 쳤다. 전통적으로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해 온 이들에게 ‘허리 아래의 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것이 꽤나 유치한 일로 보인 것. 이미 프랑스인은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숨긴 딸이 언론에 알려졌을 때 용서하고 이해해 주는 관용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관용은 지난 6월, 대통령 자크 시라크가 사적인 여행경비로 약 4억5천만 원을 현금으로 지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문제의 초점은 이 돈의 출처다. 지난달 14일 혁명기념일 연설에서 시라크 대통령은 여행경비는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에 받은 정부 ‘특별경비’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검은돈이 아니라 ‘합법적인 돈’임을 강조해 위기를 모면해 보려는 대통령의 전략적 발언이었다. 그러자 국민의 관심은 이 특별경비, 반드시 현금으로만 오고 가는 비밀정치자금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쏠린다.

현금거래는 흔적이 남지 않고, 따라서 정치권에 유통되는 막대한 현금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프랑스 세무국의 눈에서도 자유롭다. 세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나라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정치인들의 탈세 문제는 순식간에 국민이 결코 쉽게 넘기지 않을 중대사가 되었다.

프랑스는 ‘정치자금 천국’
시라크 대통령의 여행경비 스캔들이 큰 파장을 일으키자 정치권의 반응은 놀라움 일색이다. 정치인들이 공식적인 월급 이외에 특별경비를 지급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왜 새삼 문제삼느냐는 것. 1990년대에 2년 동안 총리를 지낸 전 사회당 당수는 “장관직을 떠날 때 특별경비에서 나온 현금 100만 프랑(약 1억7500만 원)을 주머니에 챙기고 나왔다”고 고백한다. 시라크 대통령의 한 측근은 “비서진만 똑똑하다면 매달 100만 프랑의 비밀자금은 챙길 수 있으니, 2년만 마티뇽 총리공관에서 일하면 2000만 프랑은 손에 쥐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그러고는 “솔직하게 말해 프랑스가 공화국이 된 이래 늘 그렇게 굴러왔다”고 넌지시 덧붙였다.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회의원은 3만5000프랑(약 600만 원), 대통령은 4만5000프랑을 월급으로 받는다. 이 정도는 대기업 간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따라서 그들의 ‘품위유지비’는 대부분 비밀정치자금에서 나온다고 봐야 옳다. 올해 정부 예산에서 조성한 특별경비 규모는 1억5900만 프랑으로, 마티뇽 총리공관(6000만 프랑)과 엘리제궁(2400만 프랑), 정부(5400만 프랑)가 골고루 나눠 가졌다.



프랑스는 ‘정치자금 천국’
그렇다면 이렇게 형성한 정치자금은 모두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우선 전·현직 국회의원들은 이 자금의 상당부분이 소속 정당 지원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미셸 로카르 전 총리는 자신이 총리로 재직할 때 사회당 재정을 지원했다고 최근 시인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의 비밀자금을 토대로 프랑스민주연맹당이 탄생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비밀. 이러한 부작용 때문에 현재는 비밀자금으로 정당을 지원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대표는 1997년 이래로 특별경비의 단 한푼도 사회당으로 유입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한편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도 이 자금을 동원했다. 시라크 대통령이 혁명기념일 연설을 통해 2002년 대선에서 현 총리인 리오넬 조스팽이 이 자금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마지막으로 누구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자금이 정치인 재산증식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사실이다.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최근 조스팽 총리 및 쥐페와 발라뒤르가 이끄는 정부 내 우파세력에게 이 점과 관련한 설문지를 돌렸다. 이미 조스팽 총리는 대통령의 여행경비 스캔들과 관련하여 회계감사원에 올 연말까지 특별경비 사용명세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 바 있는데다, “총리공관을 떠날 때 남은 자금은 모두 놓고 나올 것이다”고 천명하면서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립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솔직한 답변을 기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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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스팽은 위 설문지에 침묵할 것을 각료들에게 요청함으로써 비밀은 비밀로 남기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냈다. 쥐페와 발라뒤르 역시 알맹이 없는 내용 몇 줄만을 적어 설문지를 돌려보냈다. 10여 명의 전직 장관들만이 익명을 요구하며 솔직한 이야기를 언론에 털어놓았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비밀자금으로부터 매달 적게는 1만 프랑에서 4만 프랑까지 각자의 주머니에 챙긴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장관들의 비공식적 월급은 공식적 월급의 두 배가 되는 것이다.

이 액수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임기중에 챙기는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파 공화국연합의 한 의원에 의하면 “남은 여생을 왕처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챙기는 게 관례다”라는 것. 청렴하기로 소문난 미셸 로카르 역시 총리 재직시절 모은 돈으로 남프랑스에 별장을 샀다고 고백한다.

사실 프랑스는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5년 전부터 기업들의 정치기부금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정당 운영자금도 그 출처를 명확히 하도록 한데다 대통령 선거 비용도 한계를 정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유독 장관과 국회의원의 수입과 관련해서는 혁신적인 제도개혁보다는 ‘은근슬쩍 넘어가기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1988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모든 국회의원들에게 공식 세금신고와는 별도로, 자신들의 재산규모를 재량껏 작성해 국회에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명목은 국회의원들이 공공정치자금을 개인 재산 불리기에 유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의원들의 자산 규모를 미리 파악한다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의원들은 가지고 있는 현금, 보석, 은행 적금의 계좌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자동차나 살고 있는 아파트 역시 누락시킨 경우가 다반사였다. 고작 유산으로 물려받은 쓸모없는 부동산 한 뙈기, 시골의 낡은 초가 한 채를 신고했을 뿐이다. 보고서만 본다면 프랑스의 국회의원들은 모두 청렴한 빈곤층 서민인 셈이다.

1991년에 당시 국회의장인 로랑 파비우스와 1993년 새 국회의장 앙리 엠마뉴엘 리가 위원들에게 새로운 자산 신고서를 요구했을 때도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형식도, 법적 제약도 없는 의례적인 보고를 위해 ‘나는 부자니 세금 많이 내겠소’라고 신고할 만한 순진한 의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프랑스 국민의 70%가 임기중에라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년 대선을 앞당기거나, 대통령을 탄핵할 수도 있다는 의견에는 73%가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파리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한 시민의 말대로, 프랑스 국민의 분노는 “세금도 제대로 안 내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국민에게 세금을 내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에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공식적인 월급을 두 배로 인상하여, 비밀자금의 조성이나 탈세의 가능성을 애초에 방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주간동아 2001.09.06 300호 (p58~59)

< 오정숙/ 유럽문화정보센터 전문연구원 > ojs-y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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