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5

2001.08.02

독일 현대사 뼈아픈 체험기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5-01-13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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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현대사 뼈아픈 체험기
    요즘은 ‘노벨 문학상’ 딱지도 한국 독자들에게 먹혀 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지난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 마틴 발저의 작품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최근 종문화사에서 발저의 ‘샘솟는 분수’(노벨상 후보작)와 ‘유년시절의 정체성’ 두 작품을 나란히 번역 출판했다. 각각 508쪽, 633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소설들을 보고 있노라면 엉성한 편집으로 500쪽 분량도 되지 않는 것을 다시 두 권으로 나눠 ‘장편소설’이라고 광고하는 우리의 출판 현실이 부끄러워진다. 작품을 분량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사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최근 우리 문단 풍토에서는 이처럼 리얼리즘계열의 역작을 기대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먼저 ‘유년시절의 정체성’은 주인공 알프레드 도른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알프레드가 사법고시에 두 번이나 떨어지자 소련 점령지역을 벗어나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는 장면이다. “내 아들이 공부하는 걸 방해하지 말아요.” 이 절묘한 대사는 알프레드 어머니가 그 사람(3년 전 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려 집을 나간 뒤 어머니가 아버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을 향해 던진 것이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 그 사이에서 불편한 아들(알프레드)의 입장을 읽어낼 수 있다.

    ‘유년시절의 정체성’은 짧은 기차역 장면에서 앞으로 전개될 사건에 대해 많은 복선을 깔아놓은 점에서 탁월하다.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아들, “너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너는 계속해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는 내용이 담긴 연하장을 보낸 아버지, 다시 그 예언에 집착하는 아들. 알프레드에게는 유년시절을 지배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드레스덴에 공습이 있던 날 밤에 대한 기억은 알프레드가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그를 괴롭힌다. 공습 때 외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초등학교 입학식 때 찍은 비디오와 사진 등 그가 소중히 여긴 어린 시절의 기록들도 몽땅 불타 버렸다. 작품 전반에 걸쳐 알프레드는 이때의 ‘지옥’ 같은 밤을 반복적으로 회상하면서 그는 점점 더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수집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

    서베를린에 온 알프레드는 사교성이 부족해 친구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고 사법시험 준비에도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합격하고 나중에는 고위 관직에 오른다. 그렇다고 그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연수 도중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자 그는 어머니에게 과거를 복원시켜 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알프레드는 외톨이가 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동성애자로 오해한다. 모든 것이 소멸될까 두려워하며 매일 메모에 집착한 알프레드는 50대 후반에 약물중독으로 허무하게 생을 마친다.

    도대체 평범한 인간의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삶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프레드 도른(1927~87년)의 일생은 곧 독일의 역사다. 도른은 드레스덴에서 라이프치히를 거쳐 베를린, 비스바덴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독일 현대사의 주요 정치적 사건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1945년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 법학분야의 복습 코스, 독일민주공화국 관청의 자의적 처사, 보상문제, 전후 독일영화 또는 장벽 건설 등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삽입해 있다. 이 작품을 번역한 권선형씨는 알프레드를 ‘반주인공’이라고 설명했다. 즉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영웅상이 아니라 비활동적이고 부정적이며 수동적 인간상을 보여준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후보작인 발저의 ‘샘솟는 분수’에도 요한이라는 관찰자가 등장한다. 독일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과도한 전쟁보상금으로 파탄에 이르렀고, 독일 사람은 자연스럽게 히틀러를 추종한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돕는 소년 요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 소설은 나치 시대에 대해 어떤 참회나 합리화 없이 있는 그대로 독일의 보통 사람이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요한은 작가의 분신으로 일종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번역한 구승모씨는 발저에 대해 “일상적 삶의 체험을 예술로 수용하는 작가다”고 평했다.

    알프레드나 요한 모두 역사의 수레바퀴에 매달린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은 독일의 뼈아픈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알프레드나 요한이 아닌 어느 누구라도 그 시대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발저의 작품은 보편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ㆍ 샘솟는 분수/ 마틴 발저 지음/ 구승모 옮김/ 종문화사 펴냄/ 508쪽/ 2만 원

    ㆍ 유년시절의 정체성/ 마틴 발저 지음/ 권선형 옮김/ 종문화사 펴냄/ 633쪽/ 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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