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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압구정 오렌지 10년

압구정 오렌지, 거품 이었나 전위였나

10년 전 ‘소비문화’ 프런티어들 지금 어디에… 비판론 불구 ‘대중문화의 최전선’ 뛰는 프로로 성장

  • < 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

압구정 오렌지, 거품 이었나 전위였나

압구정 오렌지, 거품 이었나 전위였나
마치 가을 날씨처럼 하늘이 청명한 5월 어느 날의 오후 4시. 영자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편집실의 문화담당 데스크 이네스 조 기자에게서 유행의 복판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뿜어 나온다.

“대단했죠, 그때 그 붐이란. 사람들이 모두 붕붕 떠다녔던 것 같아요.” 지난 94년 우리 나라 최초의 스트리트페이퍼 ‘인서울매거진’의 초대 편집장으로 일한 그녀는 서슴없이 압구정이 “당대의 아방가르드였다”고 말한다. “피어싱, 패션 문신 등 요새 화제가 되는 모든 유행 코드는 몽땅 90년대 초 압구정에서 시작했다고 보는 게 옳죠.”

물론 대단했다, 압구정동은! 90년대의 유행 코드는 압구정이었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소비문화의 지배적 사조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압구정 아니면 모든 것을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극심한 단절의 기억을 가져온 것도 압구정이다. 따라서 압구정을 ‘당대의 아방가르드’로 규정하는 것은 약간의 논란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에서의 아방가르드였는지, 바로 그 점이 문제다.

‘Fubar’. 90년대 중반 압구정에서 ‘놀았다’는 사람치고 이 술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93년 이 카페를 만들어 운영한 사람은 당시 24세의 버니 조. 사람들이 오렌지라고 부를 만한 완벽한 조건을 갖춘 교포 출신 백수였다. 그가 처음 본 압구정은 “유치함 그 자체였다.” “그때는 미국 국기가 걸려 있는 웨스턴 바가 유행이었는데, 그건 전혀 미국식이 아니었거든요. 그때나 그 전에나 미국엔 그런 술집 없었어요.” 사람들은 압구정을 유행의 첨단이나 문화의 거리라고 말했지만, 그가 보기엔 미국문화를 어설프게 베껴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직접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신선한 그래피티(grafitti)를 해놓는 등 완전히 자신이 아는 미국식 바를 만들어 놓자 ‘쿨(cool)하다는 곳’을 찾아 헤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저 저랑 제 친구들이 편하게 놀 만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성공한 셈이죠.”



압구정 오렌지, 거품 이었나 전위였나
어쩌면 압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에 익숙한 세대가 편히 놀 수 있는 자신들의 공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 압구정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문화는 ‘기성세대가 이룩한 계급문화를 (복사해서) 시각적으로 돌출시킨’(도정일· 경희대 영문학과) 것일 수 있지만, 그들의 인식에 계급문화적 시각과 논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좋으니까, 만들고 찾았을 뿐이다. 그냥 쿨(cool)하니까!

탤런트이자 가수인 이혜영(29)도 ‘다른 곳과 다른 분위기 때문에’ 압구정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강남 출신도 아닌’ 그녀에게 이 거리는 다른 삶이 열리는 꿈의 공간이 되었다. 그녀가 CF 모델로 일하기 위해 드나들던 충무로 광고 기획사들 사이에 압구정이 새로운 세상으로 변하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91년 무렵이다. “전철 표와 커피 한 잔 값만 있으면 학교가 있던 인천에서 강남까지 달려오곤 했어요.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좋았거든요.”

압구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압구정을 배경으로 촬영하며 그녀는 스타가 되었다. 그녀처럼 모여든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배우가 되기도 하고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정재, 정우성… 모두 그때 제가 드나들던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분들입니다.”

10년 전쯤 서태지가 노래했다. ‘결코 시간이 멈춰질 순 없다/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환상 속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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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갔다. 90년대 초반 압구정동의 뜨거운 붐이 이 사회에 지배적인 논란의 화두가 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10년 동안 이 거리에서는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어쩌면 압구정은 환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빛이 바랜 지금의 압구정을 보면 당시의 압구정은 가상의 거리, 상상의 도시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불만이 많아요. 많이 변했거든요. 맥도날드가 압구정을 대표하면서부터죠.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거리를 점령하였으니 압구정만의 특이한 뭔가가 남아날 수 있겠어요?”

세 살 때 벨기에로 입양되면서 한국을 떠났다가 사진작가가 되어 돌아온 빈센트 성(33)의 소감이다. 파리에서 패션잡지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그가 한국을 처음 찾은 것은 압구정 문화가 정점에 올라섰을 무렵이다. “오히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며 향수에 젖곤 하죠. 이제 이 골목을 걸으면 옛날 생각 밖에 안 나요. 그리워하는 거죠.”

IMF, 패션산업의 침체와 함께 압구정도 활기를 다했다. 모 패션기획사 최종철 실장(37)은 이렇게 말한다. “서운하냐고요? 그렇지는 않아요. 공간이란 어차피 떴다 가라앉는 거니까요. 그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닌지 하는 생각은 들지만….”

이제 압구정을 말하는 사람들은 향수(鄕愁)를 말한다. 벌써? 벌써! 속도는 패스트푸드뿐만 아니라 거리의 풍경에도 적용된다. 속도가 바꾸는 문화의 살벌함 또는 무자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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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회가 거의 처음으로 정색하고 마주친 극심한 빈부 격차, 그것의 공론화, 그 거리에 넘쳐난 무성한 소문들은 속도의 무자비함에도 여전히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소문들은 이러했다. 독점자본과 부르주아 계급의 합작에 의한 신식민지, 욕망의 질주, 소비와 배설….

압구정은 과연 이것뿐이었을까. 그곳은 정말 ‘바람 불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저 흐벅진 허벅지’와 ‘웬디스의 소녀들’에 의한 ‘쾌락의 묘지’이자 ‘체제의 꽁치통조림 공장’뿐이었을까(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에 지나지 않았을까.

최실장은 “93년까지 유행의 교과서는 일본이었죠. 유럽이나 미국 것이 일본에서 걸러져 한국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압구정에서 그게 깨졌어요” 라고 말한다.

웬만한 브랜드는 너도나도 해외에서 광고를 촬영하는 시절이었다. 그 자신뿐 아니라 세계 각국을 돌며 일하는 많은 ‘이웃’들의 높아진 안목이 “파리의 몽테뉴 거리에 비견해도 절대 밀리지 않는 동네”를 만든 힘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압구정에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는 프랑스 패션회사 사장이 압구정동을 보고 “한국이 이런 나라였느냐”고 놀라기도 했다.

10년 전의 우리 사회는 압구정을 말하면서 ‘소비문화’라는 화두를 꺼냈다. 소비에 문화라는 단어가 붙은 것도 그 무렵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소비가 문화가 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질문이 바로 압구정이었다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확실히 10년 전의 ‘압구정 담론’은 문화보다는 소비에 치우쳤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눈을 반짝거리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하기 시작한 대중적 소비문화의 코드가 아닐까. 바로 그래서 빈센트 성은 “그 작은 거리 안에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는 건 분명 매력적인 일이었어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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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은 ‘날로 쿨하게 변하는 문화의 그 무엇’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며 순기능을 행사한 것이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특히 전 세계를 지배하는 소비문화의 코드가 곧 국가경쟁력으로 인식될 만큼 급변한 지금의 시장을 보면 더욱 그렇다. ‘노랑머리’가 문화상품으로 대접받을지언정, 더 이상 ‘고얀 놈들의 몹쓸 짓’은 아닌 것처럼.

도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이네스 조의 특이한 감각도 압구정을 만나고서야 정점에 달할 수 있었다. 파티를 열고 놀면서 그와 친구들은 자신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그게 비즈니스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해서 조직한 문화그룹 ‘카멜레온즈’의 전시회는 성황을 이뤘다. “그 친구들이 결국 지금 문화의 최전선을 뛰는 프로들이 된 거예요. 음악, 패션, 스타일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요.” 외국 것을 베껴쓰기에 바쁘던 모든 크리에이티브 분야가 압구정에서 일어난 붐을 기점으로 새로운 형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그녀의 확신이다. 따라서 압구정은 그녀에게 일종의 진취성으로 통한다.

사실 압구정의 진취성은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은 것도 사실이다. 세련됨과 고급스러움은 ‘천민자본주의의 표상’이고, 상품은 ‘물신(物神)이 숭배받는 사원’으로 인식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론에도, 문화산업의 열기와 그 복제성(複製性)의 도도한 흐름은 결코 꺾일 줄 모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압구정 오렌지, 거품 이었나 전위였나
이혜영의 경우도 그러하다. ‘로드 캐스팅에 의한 스타 탄생’ 이야기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 신화가 되었지만, 이혜영은 압구정에서 ‘다른 것’을 보기 시작했다.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중요한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압구정을 ‘만들고 움직인’ 사람들, 감각 있는 기획자들과 패션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이혜영은 ‘문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의상 코디네이션이라는 새로운 꿈을 가진 건 압구정에서 만난 분들의 도움이 컸죠. 패션이 TV가 아니라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어느 날 불쑥 튀어오른 압구정의 정체성은 서울 강남을 제외한 대다수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압구정의 정체성에 대해 10년 전 도정일 교수는 ‘특이한 변별의 기호학과 게임 규칙에 의한 차별화’로 규정했다.

“제가 91학번이거든요. 강경대 학생이 거리에서 죽었죠. 친구들은 돌멩이 들고 나서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죠.” 방송인 이기상씨(31). 케이블 TV m-net의 1기 VJ 출신으로 ‘연예가 중계’를 통해 낯익은 얼굴이다. 반바지에 샌들 신고 깃발을 들면 사람들에게 ‘오렌지가 데모하네!’라는 놀림을 받았다. “하루는 낮에 실컷 시위하다 저녁 때 친구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나이트클럽에 갔어요.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최루탄 피해 다니느라 난리가 났는데, 다리 하나 건너니까 아무 일 없이 평온한 강남인 거예요. 미친 듯이 노는 친구들을 보니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그는 무엇이 압구정을 만들었다고 생각할까. “조용필에서 서태지로 옮겨가는 시점이었어요. 뭔가 변화를 바란 시대였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욕구가 압구정 붐을 만든 것 같아요. 다시 그런 때가 올 수 있을까요? 시대가 받쳐주지 않는 한 어렵다고 생각해요.”

‘압구정 문화 1세대’로 통칭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RM의 홍선표 사장(50)은 그런 변화 욕구를 ‘문화 리더’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그는 95년 10만원대 국산 청바지 ‘닉스’(NIX)를 히트시키면서 게스와 캘빈 클라인에 점령된 시장을 석권한 장본인. “80년대에 문화 리더들이 모이는 동네는 신촌이었죠. 90년 무렵에 흐름이 이쪽으로 넘어왔어요.” 그는 자신이 디자인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 소프트웨어는 앞서가는 몇몇 사람이 만든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압구정은 그 사람들이 숨쉴 수 있는 장이었다고 홍사장은 회상한다. “결국 그 안에서 놀고 즐기고 먹고 마시는 가운데 보는 눈이 높아진 겁니다. 수긍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공간은 어디서든 계속될 겁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고요.”

물론 그도 압구정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잘 알고 있다. 특히 부킹으로 대표되는 나이트클럽 문화는 자신도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들은 성적으로 억압된 당시 사회 분위기에 의한 부작용에 지나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술 취해 ‘야타!’를 외치는 것이 압구정 문화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감각적으로 앞서가는 친구들이 모이면 젊은 여성들도 따르게 마련이죠. 그중에는 정신 나간 애들도 몇몇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경기 불황에 의한 반발 심리든, 제멋대로 굴러가는 유행 심리든 10년 만에 다시 초미니스커트가 유행하는 2001년 서울의 초여름이다. 10년 전의 ‘똥꼬치마’에서 이제는 ‘울트라 미니’라는 이름으로 고상하게 탈바꿈했지만 남자들 양복 재킷의 단추 구멍이 3개에서 4개로, 다시 2개로 빙글빙글 순환하듯 압구정은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길 하나 건너 이웃인 청담동처럼 그 외연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소설가 이순원이 ‘비상구 없는 압구정동’ 속편인 ‘지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10년 만에 거의 제목도 비슷하게 낸 것처럼.

“글쎄, 그때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청담동의 한 유럽풍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만난 스타일리스트 박혜라씨(40)의 첫 말이다. 지나간 10년의 시간이 실감이 나질 않아서인 듯했다. 통칭 로데오 거리라고 불린 동네는 분명 예전보다 밝고 젊어졌지만 그만큼 거칠어졌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압구정이 신촌이나 이대 앞과 구분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어졌어요. 공개되고 열려 있는 공간 대신 좀더 비밀스럽고 특별한 장소를 사람들이 선호하게 된 거죠.” 청담동에만 120개에 달한다는 바(bar)의 유행은 그런 심리를 반영하는 것 같다고 박씨는 해석했다.

“야타 외치던 꼴불견이 압구정 본 모습 아니다”

그녀는 “결국 사람이 최고의 인테리어”라고 말한다. 결국 어떤 장소의 품격과 상업적 가치는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압구정, 그에 이은 청담동은 여전히 ‘열린 공간’이 아니다. 그 모습은 어쩌면 5 대 95로 더 급격한 분할구도를 낳는 ‘IT 자본주의’의 모순을 닮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압구정은 서울과 이 나라의 모순, 전 세계적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축소해 보여준다. 그러나 문화란 그런 부조화와 모순에서 자라나게 마련이다. 어디서든 리더들은 존재한다. 그것이 소비문화든, 문화소비든. 그렇게 해서 문화는 또 하나의 지평을 열어간다. 비록 ‘깊이의 문제’를 극복하기 힘들겠지만.

“지금 저는 ‘제2의 압구정’ 같은 물결을 기다리고 있어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폭발 말이에요. 제 느낌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아요.” 이네스 조의 말이다.



주간동아 2001.05.24 285호 (p28~31)

< 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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