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 교수(65)가 ‘창작음악 35년’ 작품발표회를 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창작활동 40주년’이다. 강사시절 빼고 1974년부터 27년간 재직한 이화여대 음대에서도 이번 봄학기로 정년퇴임한다. 올 5월은 두루두루 기념할 일이 많다. 평소 친분을 쌓아온 예술가들이 그의 음악세계에 경의를 표하며 ‘헌정공연’(5월2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준비중이고, 음대 제자들은 ‘황병기와의 대화’ 출판기념회(5월22일 세종홀)를 마련한다. 때맞춰 황병기 작품집도 발매할 예정이다. 침향무, 비단길, 미궁, 춘설 등 그의 대표작을 앞세운 4장의 음반과 국내에서 미발매한 황병기 초기연주집이 추가된다. 이만하면 잔칫집 분위기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유난히 ‘식’자 들어가는 일을 싫어한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도 안 갔고, 서울대 법대 졸업식도 안 갔고, 이화여대 재직중에도 웬만한 ‘식’은 안 갔죠. 지인들의 결혼식도 좀처럼 안 가요.” 하지만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등 떠밀려 출판기념회를 열 참이다. 이번 책은 재미음악인 나효신씨가 서른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한 후 한글-영어 두 언어로 썼다. “황교수의 음악세계를 외국에도 소개해야 한다”는 거다.
헌정공연-출판기념회 “바쁘다 바빠”
이처럼 5월중 한꺼번에 큰 행사들이 이어져 지금쯤 황교수의 아현동 자택은 시끌벅적할 만도 한데 뜻밖에도 5월10일 찾아간 하얀 양옥집은 나른한 오후에 잠겼다. 부인인 소설가 한말숙 여사는 1층을, 황교수는 2층을 차지하고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 “바쁘실 텐데”라며 인사말을 꺼냈더니 “일도 없어요. 나이 먹으니 1시간 하면 될 일을 10시간 하니까 바쁘죠”라고 웃는다.
황교수는 두 가지 면에서 국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20세기 중반까지도 기생음악으로 취급한 가야금을 군자의 예술로 끌어올렸고, 가야금을 배운 지 10년 만에 창작곡 ‘숲’을 발표해(1962년) 창작국악 시대를 열었다. 스승에서 제자에게 악보 없이 전승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전통음악 분야에 비로소 ‘작곡’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그는 체계적인 국악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학창시절에는 국악과라는 게 없어 부모님 뜻에 따라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지만 1959년 서울대 음대 최초로 국악과가 생기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해 그 제자들이 지금은 서울대, 한양대, 이화여대, 단국대 교수로 포진해 있다.
이처럼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가교역할을 해온 황교수가 처음 가야금과 만난 것은 경기중학교 2학년 부산 피난시절이었다. 우연히 김철옥이라는 노인이 타는 가야금 소리에 매혹되어 노인 밑에서 개인적으로 가야금을 배우다, 당시 용두산 꼭대기에 피난 와 있던 국립국악원을 찾아가 정식으로 수업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줄곧 ‘평범한 듯 이상한’ 사람으로 살았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던 악기를 배우는 게 얼마나 평범한 일이에요. 그런데 주위에서는 괴상하다고 보는 거죠. 그 시절에는 내가 가야금 들고 가는 모습만 봐도 사람들이 웃었으니까요.”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비춰지는 게 또 한 가지 있다. 바로 수염이다. 황교수는 언제부턴가 얼음 얼 때 수염을 기르기 시작해 꽃 피는 봄에 깎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올해만큼은 예외적으로 아직 수염이 그대로다. 큰 공연을 앞두고 사진작가가 트레이드마크를 살려달라고 특별 주문했기 때문이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악착같이 수염을 밀어대는 게 오히려 괴상한 일이죠. 추울 때는 털을 기르고 더울 때는 깎는 거지.”
황교수는 자신의 삶과 음악세계를 개방과 보수라는 이율배반적인 단어로 설명한다. 전통악기인 가야금을 배운 것은 보수적인 성격 때문이지만, ‘미궁’과 같은 초현대적 작품은 그의 개방성에서 나온다는 것. 그는 웬만한 서양음악도보다 서양음악에 조예가 깊다. 특히 현대음악을 좋아해 그가 모은 음반의 3분의 2가 현대음악일 뿐 아니라 존 케이지의 작품을 연구하고 해설을 쓰기도 했다. 재즈도 빼놓을 수 없는데 존 콜트레인은 그의 말대로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 정월 초하루 차례를 지낸 뒤 혼자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들으며 한 해를 시작한다고 하니 그의 현대음악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번 헌정공연 때 2부 첫 무대를 장식할 ‘미궁’은 1975년에 초연됐다. 신음과 웃음, 울음이 뒤섞인 이 작품은 홍신자의 목소리와 황병기 가야금으로 초연 당시 공연장을 뛰쳐나간 관객이 있을 만큼 시대의 ‘문제작’이었다. 그러나 황교수의 음악은 ‘신고전주의’로 자리매김했다.
“국악인들은 서양음악 연주가들의 음악회에는 거의 가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서양음악 연주회에 자주 가거든요. 그것도 남들은 괴상하다고 해요. 국악 하는 이들이나 서양음악 하는 이들이나 모두 그렇게 말하죠.”
황교수는 ‘괴상하다’는 표현을 즐기는 듯하다. 또 은근히 후배들 가운데 기능적 연주인이 아닌 ‘괴상한’ 음악인들이 많이 나와주기를 기대한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하버드대 철학과에 진학한다는 말을 듣고 나 혼자 무조건 반갑더라고. 무엇이든 좋아서 해야 해요. 그러면 무서운 힘이 나오거든. 요즘 학생들은 가야금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다른 목적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취직을 해야겠다, 이름이 나야겠다 그런 것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가야금할 때는 그런 게 있었나. 그냥 좋아서 했지.”
‘틀’을 싫어한 그는 젊은 시절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인생수업을 했다. 명동극장 지배인, 화학회사·다큐멘터리 영화제작사·출판사 사장 등을 하면서도 가야금 연습을 하루도 쉬지 않았다. 지난 74년 이화여대 국악과가 생기면서 전임교수 초빙을 받고 프로 음악인이 될 것인지 아마추어 음악인으로 남을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프로의 길을 택했다. 그해 작곡한 작품이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연주하는 ‘침향무’다.
오는 5월29일 황병기 창작활동 4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황병기 음악세계로의 여행’은 최초로 대중음악인들이 국악계 원로에게 헌정한 공연으로 기록될 것이다. ‘헌정공연’은 으레 제자들이 마련한 자리겠거니 하지만 이번 프로그램에는 이예찬(바이올린), 한충완(키보드), 장영규(콘트라베이스), 백현진(보이스 어어부 프로젝트 멤버) 등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물론 국악계 지인들도 참석하지만, 이 음악회는 대중음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것이다. 참으로 인덕 많은 행복한 원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인덕이 있죠. 그러나 가장 큰 인덕은 우리 민족에게 받았어요. 내가 가야금을 하도록 해줬고 그동안 내 연주를 ‘사준’ 것 아닙니까. 90년 민간인 최초로 평양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할 수 있던 것도 다 민족 덕분이죠.”
창작활동 40년에 정년퇴임이 내일 모레면 “다 이루었다”며 물러앉을 법도 하련만 황교수는 아직도 밤이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잠 못 이루는 홍안의 소년이다. 정년 퇴임 후 계획을 묻자 태연스럽게 “아무 계획이 없지”라고 한다.
“지금까지 목표 없이 살아왔어요. 목표를 세우는 것 자체가 싫어요. 학교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 작품 쓸 시간이 좀 많겠구나, 건강이 허락하면 연습을 많이 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죠.”
65세의 ‘청년’ 황병기. 그는 이번 음악회를 40년 음악인생을 정리하는 무대가 아니라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로 삼는다. 여전히 작곡과 연주 어느 한쪽도 양보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작곡은 나의 창작적 욕구의 반영이죠. 내가 원래 호기심이 많으니까. 그리고 연주는(이 대목에서 그는 3초간 뜸을 들인 뒤) 반 이상이 육체행위죠. 가야금을 1년 정도 안 했다면 다시 연주할 수 없어요. 마라톤 선수가 1년 동안 쉬다 갑자기 풀코스를 뛰는 거나 마찬가지죠. 연습은 세수하고 이 닦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연주를 그만두든지 아니면 날마다 연습하든지 둘 중 하나예요. 나쁘게 보면 연주는 구속인데 사람은 구속당하면서 살아야 해요. 구속에서 맛보는 자율…. 나는 연주연습을 통해 그것을 느껴요.”
하지만 그는 유난히 ‘식’자 들어가는 일을 싫어한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도 안 갔고, 서울대 법대 졸업식도 안 갔고, 이화여대 재직중에도 웬만한 ‘식’은 안 갔죠. 지인들의 결혼식도 좀처럼 안 가요.” 하지만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등 떠밀려 출판기념회를 열 참이다. 이번 책은 재미음악인 나효신씨가 서른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한 후 한글-영어 두 언어로 썼다. “황교수의 음악세계를 외국에도 소개해야 한다”는 거다.
헌정공연-출판기념회 “바쁘다 바빠”
이처럼 5월중 한꺼번에 큰 행사들이 이어져 지금쯤 황교수의 아현동 자택은 시끌벅적할 만도 한데 뜻밖에도 5월10일 찾아간 하얀 양옥집은 나른한 오후에 잠겼다. 부인인 소설가 한말숙 여사는 1층을, 황교수는 2층을 차지하고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 “바쁘실 텐데”라며 인사말을 꺼냈더니 “일도 없어요. 나이 먹으니 1시간 하면 될 일을 10시간 하니까 바쁘죠”라고 웃는다.
황교수는 두 가지 면에서 국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20세기 중반까지도 기생음악으로 취급한 가야금을 군자의 예술로 끌어올렸고, 가야금을 배운 지 10년 만에 창작곡 ‘숲’을 발표해(1962년) 창작국악 시대를 열었다. 스승에서 제자에게 악보 없이 전승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전통음악 분야에 비로소 ‘작곡’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그는 체계적인 국악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학창시절에는 국악과라는 게 없어 부모님 뜻에 따라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지만 1959년 서울대 음대 최초로 국악과가 생기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해 그 제자들이 지금은 서울대, 한양대, 이화여대, 단국대 교수로 포진해 있다.
이처럼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가교역할을 해온 황교수가 처음 가야금과 만난 것은 경기중학교 2학년 부산 피난시절이었다. 우연히 김철옥이라는 노인이 타는 가야금 소리에 매혹되어 노인 밑에서 개인적으로 가야금을 배우다, 당시 용두산 꼭대기에 피난 와 있던 국립국악원을 찾아가 정식으로 수업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줄곧 ‘평범한 듯 이상한’ 사람으로 살았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던 악기를 배우는 게 얼마나 평범한 일이에요. 그런데 주위에서는 괴상하다고 보는 거죠. 그 시절에는 내가 가야금 들고 가는 모습만 봐도 사람들이 웃었으니까요.”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비춰지는 게 또 한 가지 있다. 바로 수염이다. 황교수는 언제부턴가 얼음 얼 때 수염을 기르기 시작해 꽃 피는 봄에 깎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올해만큼은 예외적으로 아직 수염이 그대로다. 큰 공연을 앞두고 사진작가가 트레이드마크를 살려달라고 특별 주문했기 때문이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악착같이 수염을 밀어대는 게 오히려 괴상한 일이죠. 추울 때는 털을 기르고 더울 때는 깎는 거지.”
황교수는 자신의 삶과 음악세계를 개방과 보수라는 이율배반적인 단어로 설명한다. 전통악기인 가야금을 배운 것은 보수적인 성격 때문이지만, ‘미궁’과 같은 초현대적 작품은 그의 개방성에서 나온다는 것. 그는 웬만한 서양음악도보다 서양음악에 조예가 깊다. 특히 현대음악을 좋아해 그가 모은 음반의 3분의 2가 현대음악일 뿐 아니라 존 케이지의 작품을 연구하고 해설을 쓰기도 했다. 재즈도 빼놓을 수 없는데 존 콜트레인은 그의 말대로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 정월 초하루 차례를 지낸 뒤 혼자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들으며 한 해를 시작한다고 하니 그의 현대음악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번 헌정공연 때 2부 첫 무대를 장식할 ‘미궁’은 1975년에 초연됐다. 신음과 웃음, 울음이 뒤섞인 이 작품은 홍신자의 목소리와 황병기 가야금으로 초연 당시 공연장을 뛰쳐나간 관객이 있을 만큼 시대의 ‘문제작’이었다. 그러나 황교수의 음악은 ‘신고전주의’로 자리매김했다.
“국악인들은 서양음악 연주가들의 음악회에는 거의 가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서양음악 연주회에 자주 가거든요. 그것도 남들은 괴상하다고 해요. 국악 하는 이들이나 서양음악 하는 이들이나 모두 그렇게 말하죠.”
황교수는 ‘괴상하다’는 표현을 즐기는 듯하다. 또 은근히 후배들 가운데 기능적 연주인이 아닌 ‘괴상한’ 음악인들이 많이 나와주기를 기대한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하버드대 철학과에 진학한다는 말을 듣고 나 혼자 무조건 반갑더라고. 무엇이든 좋아서 해야 해요. 그러면 무서운 힘이 나오거든. 요즘 학생들은 가야금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다른 목적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취직을 해야겠다, 이름이 나야겠다 그런 것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가야금할 때는 그런 게 있었나. 그냥 좋아서 했지.”
‘틀’을 싫어한 그는 젊은 시절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인생수업을 했다. 명동극장 지배인, 화학회사·다큐멘터리 영화제작사·출판사 사장 등을 하면서도 가야금 연습을 하루도 쉬지 않았다. 지난 74년 이화여대 국악과가 생기면서 전임교수 초빙을 받고 프로 음악인이 될 것인지 아마추어 음악인으로 남을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프로의 길을 택했다. 그해 작곡한 작품이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연주하는 ‘침향무’다.
오는 5월29일 황병기 창작활동 4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황병기 음악세계로의 여행’은 최초로 대중음악인들이 국악계 원로에게 헌정한 공연으로 기록될 것이다. ‘헌정공연’은 으레 제자들이 마련한 자리겠거니 하지만 이번 프로그램에는 이예찬(바이올린), 한충완(키보드), 장영규(콘트라베이스), 백현진(보이스 어어부 프로젝트 멤버) 등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물론 국악계 지인들도 참석하지만, 이 음악회는 대중음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것이다. 참으로 인덕 많은 행복한 원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인덕이 있죠. 그러나 가장 큰 인덕은 우리 민족에게 받았어요. 내가 가야금을 하도록 해줬고 그동안 내 연주를 ‘사준’ 것 아닙니까. 90년 민간인 최초로 평양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할 수 있던 것도 다 민족 덕분이죠.”
창작활동 40년에 정년퇴임이 내일 모레면 “다 이루었다”며 물러앉을 법도 하련만 황교수는 아직도 밤이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잠 못 이루는 홍안의 소년이다. 정년 퇴임 후 계획을 묻자 태연스럽게 “아무 계획이 없지”라고 한다.
“지금까지 목표 없이 살아왔어요. 목표를 세우는 것 자체가 싫어요. 학교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 작품 쓸 시간이 좀 많겠구나, 건강이 허락하면 연습을 많이 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죠.”
65세의 ‘청년’ 황병기. 그는 이번 음악회를 40년 음악인생을 정리하는 무대가 아니라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로 삼는다. 여전히 작곡과 연주 어느 한쪽도 양보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작곡은 나의 창작적 욕구의 반영이죠. 내가 원래 호기심이 많으니까. 그리고 연주는(이 대목에서 그는 3초간 뜸을 들인 뒤) 반 이상이 육체행위죠. 가야금을 1년 정도 안 했다면 다시 연주할 수 없어요. 마라톤 선수가 1년 동안 쉬다 갑자기 풀코스를 뛰는 거나 마찬가지죠. 연습은 세수하고 이 닦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연주를 그만두든지 아니면 날마다 연습하든지 둘 중 하나예요. 나쁘게 보면 연주는 구속인데 사람은 구속당하면서 살아야 해요. 구속에서 맛보는 자율…. 나는 연주연습을 통해 그것을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