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3

2001.05.10

흔들리는 40대… “아, 사랑하고 싶다”

‘인생의 정오’ 맞아 심리적 갈등, 정신적 혼란… 일상의 일탈 갈구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입력2005-01-25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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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는 40대… “아, 사랑하고 싶다”
    “아, 사랑을 하고 싶다.” 커피 광고에서 긴 머리의 여성이 창 밖을 내다보며 읊조릴 만한 이런 대사를 머리 희끗한 중년의 남성에게 듣는다면? 오랫동안 ‘외도’ ‘불륜’이라는 말로 간단히 단죄해 온 중년의 사랑이 ‘순정’의 옷을 입고 터벅터벅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다.

    바람 핀 남편에게 처절한 응징을 가했던 드라마 ‘아줌마’의 오삼숙에게 열광했던 주부들은 40대 유부남과 20대 미혼 여성의 사랑을 다룬 KBS 드라마 ‘푸른안개’를 보며 “저건 불륜이 아니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라고 공감을 표시하는 남편들의 모습에서 어안이 벙벙함을 느낀다. 한 주부는 “평소 드라마라곤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이 주말 저녁이면 만사 제쳐두고 TV앞에 앉아 몰두하는 걸 보고 너무 황당했다”고 털어놓았다.

    중년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랑을 그린 이 드라마의 평균 시청률은 10% 내외지만 40, 50대 중년 시청자가 전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진 성재(이경영)를 두고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남성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저런 놈들은 다 영창에 처넣어 콩밥을 먹여야 해”라고 분개하는 주부들에 맞서 “저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불륜’으로 매도하는 건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무감동한 인간들의 삭막한 이성적 판단일 뿐”이라고 두둔하는 남성들이 많다.

    중년의 남성도 가슴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드라마와 영화, 소설들을 요즘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작년에 개봉하여 큰 인기를 얻은 일본영화 ‘쉘 위 댄스’ 역시 직장과 가정에서 성공적인 삶을 꾸려가던 42세의 남성이 불온해 보이는 사교 댄스의 세계에 빠지면서 인생의 참맛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태엽 감은 로봇처럼 집과 가정을 무기력하게 오가던 그는 사교 댄스 교습소의 창가에 서 있던 아름다운 여인 ‘미아’를 발견하면서 활력을 되찾고, 일상에서의 작은 ‘일탈’을 꿈꾼다.

    흔들리는 40대… “아,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에 찾아온 현실 속의 흔들림과 일탈이 어찌 영화처럼 유쾌하기만 하랴.



    “아내가 싫거나 미워서 그랬다면 나에게 변명할 거리라도 생기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나도 이해가 안 돼요. 그냥 속수무책이었어요. 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더군요.” 대기업 부장 윤모씨(43)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얼마 전까지 업무로 만난 젊은 여성과 연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그녀를 만나면서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 사랑하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그 여성은 윤씨가 이혼하길 바랐지만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고 여자는 유학을 떠났다. “적어도 이 사회에서 나는 가장으로서 아내와 자식에 대해 강한 책임감을 갖도록 훈련되어 있던 거죠.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품었던 마음은 누구에게 꺼내보여도 자신 있을 만큼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중년의 방황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이성친구를 사귀어 보려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회사원 김모씨(40)는 요즘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채팅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채팅을 통해 알게 된 여성들과 쪽지를 주고받고 시도 적어보내는 것이 그에겐 큰 즐거움이다. 김씨는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아내에게도 할 수 없는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기도 한다. “마음이 맞고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만나 진한 연애를 하고 싶어진다. 일단 만나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보다 감추기 어려운 절절한 사랑을 호소하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남자들도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최근 40대에 접어든 남성들이 이성문제로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지난 3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 성인 남성의 65%가 혼외정사 경험이 있고(이는 조사 대상인 아시아 5개국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남성의 이혼율과 외도비율이 가장 높은 연령은 40대 전반인 것으로 조사되었다(통계청 자료). 지난해 광고 대행사 엘지애드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40대 남성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고, 1999년 ‘사랑의 전화’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우리 나라 중년 남성의 62.2%가 ‘현재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답했다. 가히 ‘위기의 중년’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수치들이다.

    불혹(不惑)의 나이라는 40대. 그러나 40~45세 남성들의 80%가 이 시기에 심리적 위기를 경험한다는 것이 정신분석-심리학적 연구결과다. 학자들은 “중년기는 외면적으로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분노, 탐욕 같은 유치한 감정을 지니는 시기”라며 “바람직한 생활 뒤에 숨은 미성숙한 탐욕과 유치한 야망 같은 양면성으로 인해 40대 남성들은 갈등에 빠진다”고 말한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40대가 사실은 ‘불혹’이 아닌, ‘유혹의 시기’라고 규정한다. 30대 초반까지 교육을 받고 직업을 선택해 생활의 기반을 다지고 결혼을 하는 등 삶의 외형적인 틀을 갖추는 준비에 모든 에너지를 투입한 남성들은 삶의 외형이 어느 정도 잡힌 30대 후반, 40대 초반에 이르러 앞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지 몰라 방향을 잃고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진다는 것. 정박사는 “이때를 ‘제2의 사춘기’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인생의 진정한 사춘기다. 10대 사춘기는 생물학적 변화가 우선이지만, 중년의 사춘기는 물리적-심리적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흔들림의 강도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해진다”고 설명한다.

    흔들리는 40대… “아, 사랑하고 싶다”
    심리학자 카를 융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40세 전후가 인간의 행동과 의식을 탈바꿈하는 결정적 전환기임을 밝혀냈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 매진하다가 어느덧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음을 깨달은 중년 남성들이 인생의 정오에서 느끼는 정체성의 위기를 그는 ‘상승정지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였다. 전문가들은 중년기에 나타나는 이런 심리적 갈등과 정서적 혼란은 당연한 것이며, 정상적인 발달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시기에 남성들의 외도가 많아지는 것도 이런 ‘감성화 경향’과 관계가 깊다. 흔히 중년 남성의 외도를 들끓는 성욕을 못 이겨 젊은 여성이나 찾는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눈길이 많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공감하며 얘기를 들어줄 상대를 갈구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한 섹스 파트너가 아닌, 교감의 상대를 찾는 것. ‘이제 퇴물이 되었다’는 초조감과 무력감 속에서 살아가던 중년의 남성은 누군가 자신을 인정해 주고, 남성다움을 확인해 주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휘말린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남성의 전화’의 한 관계자는 “중년의 외도가 가정에 불만이 있어서 발생하는 것만은 아니다. 부인에게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거나 부부 간에 대화가 끊어질 때 외도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새 연인이 생겨도 가정 파탄은 원치 않는 것이 대다수 남성들의 바람이다”고 말한다. 결국 부부 간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고, 부부가 각자의 사생활을 얼마나 폭 넓게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것.

    IMF 사태를 겪으며 실직 위기를 넘겼고 지금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불안감 속에서 위축한 삶을 사는 한국의 중년 남성들. 인터넷과 지식정보산업의 득세 등 급격한 구조개편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이들 중에는 직업을 바꾸거나 불 같은 연애에 몸을 던짐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에 충분히 흔들리면서 내면의 길을 스스로 찾은 남자가 이후에 유연하고도 매력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년은 남성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겨온 일과 결혼생활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기이다. 이때에는 부부관계에도 재타협과 재조정이 필요하다”(서울대 사회교육학과 이미나 교수). 남편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다 늙어서 철딱서니없는 짓만 한다’고 핀잔만 줄 일은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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