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0

2001.02.08

뻣뻣해진 南, 한풀 꺾인 北

남북 ‘게임의 법칙’ 대변화 예고 … 남측, 전력지원 등 무기로 주도권 장악에 자신감

  • 입력2005-03-16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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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뻣뻣해진 南, 한풀 꺾인 北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1년 새해 벽두부터 ‘신사고’를 강조하고 나선 가운데 국가정보원의 한 고위관계자가 남북관계의 질적인 변화를 예고해 주목된다. 익명을 전제한 이 고위관계자는 최근 “그동안 남북관계에서의 국정원 대북전략이 유인공작(誘引工作) 단계였다면 이제는 오픈단계로 들어섰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동안은 공작단계였고 북한이라는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공개하지 못한) 말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국회 남북관계특위에 대북정책 사안을 공개하면서 북한과 상대하게 될 것이다”고 밝혔다.

    정부의 대북전략을 조율하는 국정원 고위 관계자의 이와 같은 발언은 북한에 대한 주도면밀한 유인공작 및 탐색단계를 거쳐 향후 남북관계는 우리 정부의 주도 아래 전개될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 이와 같은 발언은 향후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게임의 방식’이 달라질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관계자는 그와 같은 판단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정보수집 및 공작목표는 북의 변화가 전술-전략적인 것인지, 공작이 개입되지는 않았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대화록과 비디오테이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면밀히 분석했다. 그 결과 거기서 드러난 김정일의 메시지는 개방-개혁 의지와 그 불가피성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세한 분석틀은 밝힐 수 없지만 우리가 내린 결론은 김정일은 개방-개혁을 하지 않으면 북한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과, 또 북한이 그렇게(개방-개혁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었다.”

    뻣뻣해진 南, 한풀 꺾인 北
    이 관계자는 정상회담 이후 우리 정부가 북한의 페이스에 끌려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오히려 북한이 우리의 유인공작에 끌려오고 있다”며 “북한은 이미 우리가 만들어 놓은 판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모든 것을 북에 퍼주기만 하고 질질 끌려왔다”는 보수층의 시각을 일축하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의 ‘속도 조절론’ 등과 관련해서도 “사실 우리가 속도를 조절하고 말 것도 없이 북한은 이미 소화불량 상태에 빠져 있다. 오히려 중국은 우리에게 ‘북한을 너무 재촉하지 말고 북한이 천천히 변화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라’고 사인(신호)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이 관계자의 말이다.

    “남북한이 정상회담을 한 지 이제 6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그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산가족 교환 방문, 장관급회담, 국방장관회담, 경의선 복원공사 착공 등 북한으로서는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남북한 사이에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속도조절을 요구하면서도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변화를 북한측에 기대한다. 국민들은 2∼3년은 지나야 북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북한이 이미 우리가 유인한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이다. 그것이 전술적인 것인지, 전략적인 것인지는 계속 지켜봐야 하겠지만….”



    사실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게임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조짐은 이미 지난해 12월 중순 평양에서 열린 제4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나타난 바 있다. 당시 남북한 당국은 4차회담을 마치고 △이산가족 문제 해결 일정 조정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구성-운영을 통한 민족경제의 균형 발전과 공동번영 도모 △남북경협 관련 4개 합의서(투자보장, 이중과세 방지, 상사분쟁 해결, 청산결제) 정식 서명 △2001년 상반기 중 북측 경제시찰단 방문 △남북 어업협력 △2001년 3월 중 한라산 관광단 방문 △남북 태권도 단체간 접촉 권고를 골자로 한 합의사항을 공동보도문 형식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남북한 당국은 4차회담에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 일정 조정을 합의하는 데 상당한 난항을 겪은 바 있다. 북측이 합의사항에 전력지원 문제의 우선 해결을 명기해줄 것을 강력히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처럼 북측이 전력지원 문제를 합의문에 포함시킬 것을 고집하는 바람에 회담이 자칫 결렬될 뻔했다는 회담 분위기는 당시 장관급회담을 수행 취재한 우리측 공동취재단 보도에 의해서도 전해진 바 있다. 그래서 남측 대표단이 남측의 우선 관심사인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일정 조정에 합의해주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북측에 역으로 ‘벼랑 끝 전술’을 구사했다는 회담 뒷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의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남측 대표단의 ‘벼랑 끝 전술’은 전반적인 남북관계 일정을 감안한 주도면밀한 계산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즉 평양-서울 직통전화를 통해 현장 분위기를 파악한 서울 남북대화사무국 상황실에서 남측 대표단에 그런 훈령을 내린 배경에는 남측이 제시한 ‘문제의 해답’을 벗어나는 북측의 요구에 대해 이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는 전략적인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당시 회담 대표단에 참여한 국정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북측이 쌀을 달라고 하면 쌀을 주고, 비료를 달라고 하면 비료를 주는 식으로 북측이 요구하면 우리가 다 들어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측의 양보로 비친 사안 대부분은 우리가 그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북측에 제시한 홈워크(숙제)의 범위 내에서 들어준 것이다. 즉 우리가 북측에 숙제로 던져준 ‘4지 선다형 문제’ 중에서 그들이 풀어온 것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전력지원 문제의 경우 우리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력지원 문제는 우리측이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북측에서 신뢰의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쪽에서 당황했다. 북측 인사들이 공식회담석상에서는 강경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제 우리(북측)와 대화할 의사가 없는 것 아니냐’고 물어올 만큼 저쪽도 걱정하는 분위기가 심각했다.”

    사실 전력지원 문제는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자존심을 꺾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특별히 부탁한 사안이다. 물론 북한측은 정상회담 이전부터 남측 대기업에 발전소 건설을 통한 전력지원을 요청해왔고, 북측과의 물밑 비밀접촉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당시 국정원 김보현 대북전략국장(현 3차장)-서영교 단장(대북전략국장) 라인은 전력, 철도 복선화 등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을 지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북측에 건넸었다. 그리고 그것의 ‘결정판’이 김대통령의 2000년 3월9일 ‘베를린 선언’이었던 것이다.

    뻣뻣해진 南, 한풀 꺾인 北
    바로 그런 배경 하에서 정상회담이 열렸고 6월14일 밤 두 정상이 남북공동선언문에 합의한 다음날 가진 예정에 없던 6월15일 고별 오찬장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통령에게 불쑥 북측의 어려운 비료 사정을 얘기하고 남측이 비료 20만t을 지원해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한 뒤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전기도 부족합니다. 지방 특히 황해도 농촌은 전력 사정이 매우 안 좋습니다. 불이 깜빡깜빡하고…시급히 해결해야 합니다. 남쪽에서 남는 전기가 있으면 주십시오. 없으면 할 수 없고요.”

    정상회담 뒤에 정부가 곧바로 북한에 대한 전력지원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도 김위원장의 이런 절박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확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측으로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에게 직접 부탁한 사안인 만큼 신의 문제를 제기하며 남측의 남북 공동선언 이행 의지를 의심할 수도 있는 중대사였다.

    그러나 4차 장관급 회담에서 남측 대표단은 면회소 설치 같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 일정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전력지원 문제 해결은 ‘현단계 출제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물론 ‘벼랑 끝 전술’을 쓸 때부터 예상했던 바이지만, 이에 대한 북한측 반응은 완강했다. 특히 북측은 전력지원에 따르는 기술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남는 전기 좀 달라는데 같은 민족끼리 그럴 수 있느냐”며 따지는 바람에 남측은 이를 설득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측이 이처럼 전력지원에 매달리는 것은 다른 나라의 원조에 기댈 수 있는 식량난 해결과 달리 남한이 단기간에 전력난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측이 전력지원을 남측에 기대도록 만든 ‘공작’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지난해 9월 추석 연휴에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김용순 비서가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등 대남 공작팀을 거느리고 서울을 방문했을 때 국정원은 일부러 이들을 공군기에 태워 ‘장난’을 쳤다. 당시 이들을 영접한 국정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이렇게 밝혔다.

    “김정일은 생존을 위한 변화를 결심하면서 맨 먼저 체제의 버팀목인 군부의 동참을 유도했다. 김정일은 김대통령과의 평양 만찬에서 군부가 모두 술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김일철 대장을 서울에 보내 군부도 변화의 ‘공범’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는 김용순과 대남 공작팀을 보내 ‘남조선이 잘사는지를 직접 보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변화의 흐름을 간파했기 때문에 김용순이 왔을 때 공군기에 태워 ‘장난’도 했다. 공군기는 고도가 낮고 시간도 30∼40분 더 걸린다. 경주에 갈 때도 (추석 연휴에) 고속도로에 밀린 차량을 보여주고 밤에 서울로 돌아올 때는 일부러 고도를 낮춰 한 바퀴 돌려서 테헤란로 등 서울 야경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남한의 풍부한 전력 실태를 보고 놀라라는 뜻이었다. 굉장히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잘사는 남한 실정을 보고 돌아가 김정일에게 ‘남쪽에 기대면 살 것’이라고 보고하도록 작전을 편 것이다. 김정일의 결심과 군부의 동의로 변화의 흐름에 큰 곡절이 없는 한 우리도 계속 북한을 끌어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김정일 위원장의 최근 중국 방문(1월15~20일)은 남북관계 변화의 흐름에 비추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김위원장은 지난해 5월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을 방문한 이후 약 8개월 만에 다시 중국을 찾았다. 특히 김위원장은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안내를 받아 체류기간의 대부분을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지구를 집중적으로 시찰함으로써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본받아 경제재건에 나설 방침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그러나 “중국측은 북한이 천천히 변화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라고 충고하고 있다”고 밝힌 앞서의 국정원 고위관계자의 발언이 암시하듯, 김위원장의 상하이 방문은 사실 예정된 것이었다. 최근 박재규 통일부장관도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배경과 관련해 “김정일 위원장의 상하이방문은 지난해 봄부터 중국측에서 김위원장뿐만 아니라 북한의 다른 간부들에게도 ‘상하이를 보라’고 권고한 데 따른 듯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이와 같은 분석은 지난해 5월 김위원장의 방중 때 이미 제시되었다. 당시 김위원장의 방중 일정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중국측은 당초 상하이 방문을 권고했지만 김위원장이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특히 주룽지 총리는 다음 방중 때는 반드시 상하이를 들러볼 것을 김위원장에게 강력히 권유했고 그것이 이번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중국의 현대화를 이끌고 있는 최고 지도자인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주룽지 총리 등이 상하이방(上海幇)이라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로서는 김위원장에게 중국 개혁-개방 20년의 성과를 설명하는 데는 백 마디 말보다 상하이를 한 번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그러나 김정일로서도 자신이 방향을 설정한 중국 개혁-개방의 현장을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외국 문물에 어둡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군부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상하이를 방문지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에는 김영춘 군 총참모장, 연형묵 국방위원회 위원, 김국태 당 중앙위 비서, 정하철 당 선전선동부장,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김양건 당 국제부장, 박송봉 당 제1부부장, 현철해-박재경 대장이 수행했다.

    바야흐로 남북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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