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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북-미 ‘밀월 3국지’

클린턴 방북 전 북-미 수교 가능성…‘선 북미평화협정’ 변경 기류도

남-북-미 ‘밀월 3국지’

남-북-미 ‘밀월 3국지’
북한 노동당의 창건 55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린 10월10일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올브라이트 장관이 베푼 워싱턴 환영만찬에서 “김정일 동지는 공화국의 자주권과 안전에 대한 미국의 담보만 확인되면 대립과 적의의 조-미 관계를 평화와 친선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중대결단은 세번째 중대 결단을 낳았다. 10월12일 발표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미 합중국 사이의 공동코뮤니케(북-미 공동선언)가 그것이다. 그러나 북미간 모든 현안을 두루 언급한 이 공동선언에서 양국이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경제협력과 교류를 확대하며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를 유예하는 조처 등은 조명록 특사의 방미기간 중 어느 정도 합의가 예상되었던 것이다. 물론 조특사의 방미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목이다. 클린턴의 중대결단은 이 공동성명의 맨 끝 문장에 담겨 있다(이하 공동선언은 북한측 원문을 인용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위원장께 클린턴 대통령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며 미합중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가까운 시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로 합의하였다.”

내년 1월20일로 임기가 끝나는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 중에 북한을 방문하는 결정을 내린 데는 국내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클린턴이 민주당 대통령후보(고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북풍’을 이용하고 있다는 국내의 지적도 있으나 이는 미국 선거 메커니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북한 변수’는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클린턴 자신이 매달렸던 중동평화 문제가 타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북한과의 극적인 타협을 이룸으로써 성공적인 한반도 개입정책으로 기록되기를 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배경이 무엇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북은 수교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남은 100일 안에 ‘테러지원국 고깔 벗겨주기’ 같은 또다른 중대결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중대 결단을 예고하는 것은 바로 북-미 공동선언에 담긴 다음과 같은 북한의 메시지다.



“조명록 특사는 역사적인 북남 최고위급 상봉(정상회담) 결과를 비롯하여 최근 몇 개월 사이의 북남 대화상황에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했다. 미합중국측은 현행 북남대화의 계속적인 전진과 성과 그리고 안보대화(국방장관회담)의 강화를 포함한 북남 사이의 화해와 협조를 강화하기 위한 발기들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적절한 방법으로 협조할 자기의 확고한 공약을 표명하였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남북간의 협력에 대해 논의한 것부터가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는 과거의 대외 협상에서 북한이 보인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면모다. 북한이 남한과의 대화 의지를 미국에 분명히 밝히고 이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 입장을 받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남한이 ‘할 일’을 북한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변모는 대내외적으로 다음과 같은 북한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당초 조명록 차수((次帥)가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 국내의 보수언론에서는 북한이 남한을 도외시한 채 미국과만 상대하려는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정책을 추구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과거의 잣대로 잰 이와 같은 관측은 북한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만들어야 하고 이는 정전협정 체결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의 협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해온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공동선언에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명문화함으로써 ‘통미봉남’의 논리 자체를 봉쇄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명문이 외교적 선언에 그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지난 9월25~26일 제주도에서 사상 처음으로 개최된 남북 국방장관급회담 공동발표문 제2항의 실천적인 행동으로 풀이된다.

당시 남과 북은 제2항에서 “쌍방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한반도에서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를 이룩하여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긴요한 문제라는 데 이해를 같이하고 공동으로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명시해 북한이 미국과의 ‘새로운 평화보장체제’를 논의하면서 남한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을 낳았다. 게다가 이 조항은 오히려 북한측의 강력한 요구로 반영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번 북미공동선언에도 현행 북남 안보대화(국방장관회담)의 강화를 명시함으로써 실천 의지를 분명히 했다.

북한의 또다른 의중은 북-미 공동선언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은 역사적인 북남 최고위급상봉(정상회담)에 의하여 조선반도의 환경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강화하는데 이롭게 두 나라 사이의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들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6·25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4자회담 등 여러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선언한 데 그 ‘묘미’가 드러난다.

이는 대외적으로는 북한이 한반도 평화보장의 한 수단으로 4자회담의 길을 열어놓은 것을 의미하지만, 대내적으로는 남북정상회담에 의해 야기된 한반도 환경의 변화로 인해 북-미 관계의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지난 반세기 동안 주민들에게 미국을 ‘철천지 원쑤’로 주입해온 북한 지도부가 대미선린관계로 전환하는 중대 결단을 내리는 데는 ‘원쑤와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논리’를 주민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조명록 특사가 10월10일 워싱턴 도착성명에서 “새로운 세기로 접어든 이 역사적 시점에 한반도에서 확산되고 있는 평화와 화해의 환경에 발맞춰 북미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 양국 정부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한 것도 바로 중대 결단에 따른 배경설명인 셈이다. 실제로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언론들이 10월12일 북-미 공동선언 발표소식을 전하면서 북미 선언에 나오는 바로 이 대목을 맨 앞에 내세워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 ‘대내용’이라는 분석을 낳게 한다. 또 북미고위급회담과 북미 공동선언 자체가 한반도에 지각 변동을 몰고 올‘역사적인 사변’임에도 불구하고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때와는 달리 북한 언론들이 이를 크게 보도하지 않은 데서도 이와 같은 분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10월15일 현재까지 북미 고위급회담 및 공동선언에 대해 나온 북한 언론보도는 짤막한 사실보도뿐이다. 남북정상회담을 각종 화보 등으로 크게 보도한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2+2 방식’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

그러나 이것이 대외용이든 대내용이든 북미간의 이번 합의가 특히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환경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북미관계의 개선은 남북관계의 진전과 한반도 정세 안정에 더욱 밝은 전망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북한이 4자회담용 북미간 정전협정에서 평화보장체제로 전환하는 유용한 틀의 하나로 그 길을 열어놓은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최근 주장해온 ‘2+2 방식’의 평화협정 체결방식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는 한반도 문제 해법의 유일한 공식으로 간주되어온 선(先) 북미평화협정이 선(先)남북-후(後) 북미평화협정으로 바뀌는 중대 결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김대중-김정일-클린턴 3자가 서로 상대방의 중대 결단을 도와주는 남-북-미 밀월 시대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간동아 2000.10.26 256호 (p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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