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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남북 정상회담 비화

“서울서 만든 공동선언문 초안 없었다”

우리측 당초 예상은 ‘공동성명’ 수준…남북 합의 내용 북한 전문가들조차 “기대 이상”

“서울서 만든 공동선언문 초안 없었다”

“서울서 만든 공동선언문 초안 없었다”
말 타니까 견마(牽馬) 잡히고 싶다는 말이 있다. 역사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 일명 ‘평양선언’에 남북 두 정상이 서명한 지 보름여가 지난 지금의 상황이 그렇다. 그러나 4월10일 남북한 당국이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공표한 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두 달 동안 북한 전문가들이 정상회담에 걸었던 기대와 요구 수준에 견주면 그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사실 55년 동안 대립과 반목으로 얼룩진 남북관계에 비추어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6·15 공동선언문 가운데 통일의 원칙과 방안을 담은 제1, 2항에 대한 시비도 마찬가지다. 시비의 근원은 두 항에 담긴 ‘자주’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표현이다. 요컨대 북한이 그동안 ‘자주적’이라는 용어를 외세 배제, 즉 미군 철수 개념으로 해석해왔음에 비추어 북한측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것이 시비의 핵심이다. 또 우리측이 북한의 양보로 간주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표현도 북한측이 80년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공표한 이후 내비친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또 이같은 시비에 근거해 한나라당과 보수층 일각에서는 정상회담의 성과를 은근히 폄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김대통령 특별수행원으로 회담 진행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종석 박사(세종연구소 연구위원·남북한관계연구실장)가 이같은 ‘오해’의 원인과 배경을 소상히 밝혀 주목된다. 이종석 연구위원은 세종연구소(소장 김달중)가 6월30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개최한 제5차 국가전략 포럼(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개선전략)에서 정상회담 성과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부차적인 시행착오를 부각시키려는 일부 분위기는 김대중 정부가 극복해야 할 장벽이라고 주장했다.

이종석 연구위원에 따르면, 이같은 ‘오해’의 출발은 우리측 회담 전략과 현장의 분위기를 모르기 때문에 비롯됐다는 것. 이연구위원은 “이번 정상회담은 전략적으로 준비되었지만, 실제로는 전술적으로 대응되었다. 4시간 동안의 정상회담을 통해 너무 많은 얘기가 오갔기에 그 내용은 이론 중심이 아니라, 현장에서 통일방안에서의 외교권 문제 등 핵심문제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연구위원의 발언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우리측이 처음부터 공동선언을 염두에 두고 그 ‘초안’을 준비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일부에서는 “원래의 우리측 초안에 들어 있던 긴장완화나 평화체제 구축 문제가 최종 합의문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문제삼고 있으나 당초에 ‘우리측 초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연구위원은 “서울에서 만들어간 (공동선언문) 초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초안이 없었다고 해서 회담의 전략`-`전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초 우리측은 평양에 가면서 공동선언보다는 한 단계 낮은 공동성명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우리측 전략은 북한측이 우리측에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남북 화해협력 선언’, 즉 베를린 선언에서 우리측이 북측에 제안한 내용을 공동성명에 담는다는 것이었다.



6월14일 3시 김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2차 단독회담에 임할 때까지도 우리측 회담 전략은 베를린 선언 4개항을 토대로 두 정상이 서명한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베를린 선언의 핵심 내용은 △남북 경협을 통한 북한경제 회복 지원 △한반도 냉전 종식과 남북한 평화공존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 △남북 당국 간 대화 추진 등 4개항이다. 그런데 두 정상은 4시간 동안의 마라톤 회의에서 너무 많이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베를린 선언을 담은 공동선언문 3, 4, 5항 외에 통일의 원칙과 방안을 담은 1, 2항을 추가하게 됐다는 것. 그러나 절차상의 오해 소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 정상이 대략적인 원칙에 합의하고 회의를 끝낸 것은 저녁 7시 무렵. 공동선언문 작성을 둘러싼 실질적인 밀고 당기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임동원 특보와 김용순 비서를 중심으로 양쪽 실무팀이 본격적인 문건 절충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박선숙 부대변인은 베를린 선언을 토대로 긴장 완화 등 4개항의 합의사항을 평양 프레스센터가 설치된 고려호텔에서 발표했다. 회담이 끝난 뒤 결과가 “잘 되었다”는 박준영 대변인의 말을 듣고서였다. 물론 합의문이 나오기 전이었다.

그러나 이종석 연구위원에 따르면, 임동원 국정원장과 김보현 5국장(현 3차장)이 ‘우리측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한 시점은 정상회담이 끝나고 난 뒤인 7시경부터였다. 그리고 이 초안을 가지고 임동원 원장-김용순 비서 간의 절충이 시작되었고, 두 사람이 합의한 ‘절충 초안’을 김비서가 만찬장의 김정일 위원장에게 내민 때가 9시20분쯤이었다.

김위원장은 이 문건을 5분 동안 읽어본 뒤 김비서에게 수차례 귓속말로 지시했다. 잠시 뒤 김비서는 서류를 김대통령 옆에 있던 임원장에게 전달했고, 임원장은 이를 김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대통령은 서류를 훑어본 뒤 손으로 몇 군데의 수정을 지시했다. 이후 밤 9시30분께 양 정상의 의견이 가미된 서류를 받은 문건 작성팀의 마지막 작업이 시작됐고 두 정상의 서명(수표)만 남겨둔 최종 합의문이 작성된 시각은 10시50분쯤이었다.

이연구위원은 “회담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현지에서 회담 전략팀을 자문했기 때문에 우리측 초안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서 “우리측 초안이 회담 이후 북한의 주장에 따라 바뀐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남북 정상이 사상 처음으로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것은 오히려 북한이 현실의 변화를 수용하여 기존의 고려민주연방제를 수정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공동선언문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평화체제 및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음을 암시했다.

“평화 문제와 관련해 두 정상은 많은 논의를 하고 상당부분에서 인식의 공유를 이뤄냈지만 공동선언에 명기된 것은 원칙과 방향 정도에 그쳤다. 상당부분이 생략된 것이다. 생략은 서로 의견개진에 그친 사안과, 인식의 공유가 이뤄졌어도 한반도 주변의 역학 관계나 북한 내부사정이 고려되어야 할 경우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남측이 진지하게 설명한 핵-미사일 문제가 전자(前者)라면 북측의 인식 변화가 확인된 주한미군 문제 등이 후자(後者)로 보인다.”

이종석 박사는 “정작 평양에서 돌아와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김정일 쇼크’를 보고 충격받았다”면서 “북한은 변했지만 오히려 우리는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상상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과 눈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의 차이 때문에 커다란 혼란을 느꼈다면, 그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만큼 그를 잘못 보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즉 상대방의 변화를 요구해온 우리가 정작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할 만큼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우리도 남북 평화공존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 변화가 필요하다.”



주간동아 2000.07.13 242호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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