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2

2000.07.13

‘낙하산’ 타고 한자리 꿰차볼까

정부산하단체장 등 40여곳 예정…여권 실세 찾아 ‘눈도장’ 찍기 종종걸음

  • 입력2005-07-12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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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하산’ 타고 한자리 꿰차볼까
    “혹시 좋은 소식 없습니까?”

    요즘 민주당이나 자민련 주변에서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질문이다. 자신이 정부산하단체 기관장으로 나간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느냐는 얘기다. 지난 4·13 총선 공천 과정에서 현역 의원이었음에도 낙천한 사람들이나, ‘적진’(영남권)에 뛰어들어 낙선한 사람들일수록 이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현재 여권은 ‘공기업 임원의 중임은 없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이에 따라 생겨나는 자리는 대략 4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 임기 말과 현정부 들어 임명한 공기업 임원들의 임기가 대부분 올 가을부터 만료된다는 것. 한 여권인사는 “낙천-낙선자들은 어디가 임기가 끝나는 곳인지 리스트를 작성하기에 바쁜 분위기”라고 전했다.

    민주당 호남 출신 전직 재선의원 A씨도 안부를 묻는 기자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좋은 소식 없느냐’는 말부터 꺼냈다. A씨는 요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골프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한 달 전 서울 여의도 63빌딩 근처에 19평 규모의 사무실을 냈지만 평소 활동력이 왕성한 그는 사무실에 붙어 있는 날이 별로 없다. 아는 선후배들을 불러 필드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A씨는 지난 총선에서 애초에는 공천자 명단에 들어 있었으나 최종 단계에서 한 동교동 실세가 들이민 인사에게 밀렸다. 당연히 공천받을 것으로 알고 사업체까지 정리했던 그에게 ‘낙천’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 골프장을 찾기까지 한 달여가 걸렸다. 그러나 그는 한 가닥 기대감을 갖고 있다. 잡음 없이 깨끗하게 낙천을 수용한 데 대해 “뭔가 보상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 그가 골프장을 찾으면서도 잊지 않고 핸드폰을 챙기는 것은 혹시라도 ‘높은 곳’으로부터 걸려올지 모를 전화 때문이다. 성사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A씨는 올 12월 임기가 끝나는 한 국영기업체 장자리를 ‘찜’해놓은 상태다.



    A씨의 한 측근은 “하명만 기다리고 있다. 낙천했던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공기업체 장으로 나간다는 소식에 요즘 들어 부쩍 초조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A씨측이 가만히 눌러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A씨의 측근은 ‘주군의 고민을 해결코자’ 얼마 전 권노갑 상임고문을 찾아 호텔신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눈도장만 찍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권고문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얘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 낙천-낙선자들 사이에서는 “(권고문이 주로 머무는) 신라호텔에 가봤냐”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낙선한 재선의원 출신 민주당 B씨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낙천자들에 비해 사정도 좋지 않다. ‘배려 순위’가 1순위 낙천자, 2순위 낙선자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때 청와대 쪽에서 ‘모 공사 사장설’이 흘러나와 기대를 갖기도 했으나 헛물만 켰다.

    서울 여의도 라이프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내는 등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그는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로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하고 있다. 열심히 움직이고 실세들에게 적극적으로 로비하는 사람들이 (산하단체장을) 하나씩 맡아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도 사실은 로비에 매우 열심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권고문의 집으로 자주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호텔이나 당사보다는 눈도장을 찍기가 한결 쉬운 까닭이다.

    이들과 달리 마음만 졸이는 사람들도 많다. 성격이 모질지 못하거나 억척스럽지 못한 정치인들이 그렇다. 서울 지역 한 낙선 의원은 “나처럼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연락도 오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문화 관련 부서에서 일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는 그는 “이제는 나도 사람들을 좀 찾아다녀야겠다”고 했다. 경기 지역 한 낙천자도 이제나 저제나 전화벨이 울리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자리는 적은데 사람은 많다 보니 정작 본인이 가고 싶어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채영석 전 의원은 당초 농업기반공사 사장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권 핵심부는 그에게 처음에는 총리실 국무조정실장(장관급) 자리를 권했다는 것. 결국 채 전 의원은 “총리보다 나이도 많은데…”라며 고심하다 고사했다. 그런 뒤 고속철도건설공단 이사장으로 나가게 됐다. 채이사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나 서울에 돌아올 때 모두 공항에 나가 당내 인사들로부터 “그가 나갈 자리가 아니었다. 자리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산하기관장을 원하는 사람들은 “시선이 따갑기는 했겠지만 그 정도는 기본 아니냐”는 입장을 보인다.

    박태영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여기저기 하마평은 무성하나 정작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다가 7월1일 정식 출범한 통합의료보험기구인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은행 통폐합 등에 대비해 외환은행에서 모셔가려 했었고, 산업은행 총재설도 있었다. 대우증권에 회장으로 간다는 얘기도 있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갈 생각은 없었는데, ‘의료보험 문제가 골치가 아프니 좀 맡아달라’는 청와대 고위 인사의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박 전 장관은 15대 때부터 공천 문제로 권고문 측근인 국창근 전 의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한때 “산하기관장으로 나가는 게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었다.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간 조홍규 전 의원은 한때 남미 쪽 대사로 나가는 것이 유력하게 검토됐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사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대통령께 누를 끼칠까 걱정된다. 내 능력에 맞는 데 가서 열심히 일하고 싶다”며 고사해 작은 화제를 낳았다. 관광공사 사장 자리는 경기 지역 낙선자인 이 아무개 전 의원도 원했던 곳. 그러나 그는 낙선자라는 ‘원죄’로 낙천자인 조 전 의원에게 밀렸다.

    낙천-낙선자만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공기업 임원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벌이고 있다. 여권의 한 인사는 “공기업의 모 감사가 재신임을 받기 위해 동교동 실세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어 최근 재임 확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감사원 한 관계자는 “모 국영기업체 사장의 경우, 이미 연임을 포기하고 자민련으로 들어가 입각을 노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전했다. 연임에 대해 민주당측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자민련을 통한 우회 전략을 써 살아남으려 하고 있는 것.

    낙천-낙선 의원들과 공기업 임원들이 펼치는 ‘살아남기’ 로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은 역시 권노갑 고문이다. 최근 자리를 찾아 나간 사람들 대부분이 권고문이 고문으로 있는 ‘일오회’(15대 의원 중 낙천자들의 모임) 소속인 까닭이다. 비록 친목 모임이라고는 하지만 ‘일오회’가 결성된 것부터가 총선 이후 새 자리를 받기 위한 압력 넣기의 성격이 강하다.

    권고문 주변의 한 인사는 “권고문은 당 고문실에 거의 안 나온다. 회의가 있어 나왔을 때도 잠깐 들렀다가 당사를 빠져나가기 바쁘다. 사람들이 몰려 있어 피하려는 것”이라고 전했다. 다른 측근 인사도 “여기저기 호텔을 옮겨다니고 있다. 어디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전당대회 준비에 바빠 사람들도 많이 못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권고문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전화가 많이 오지만 나도 어디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해도 권고문 측근의 ‘이너 서클’에 속하는 인사들은 다 선이 닿게 마련이다. 국회에는 권고문과의 ‘핫 라인’을 가지고 있는 의원들이 여러 명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권고문 쪽에서 정부산하기관장마저 다 차지하고 있다”는 비판론이 당내에 등등한 것. 수자원공사 사장 내정설이 파다한 국창근 전 의원이 최근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욕심 없다. 다른 사람들이 간 뒤에 가겠다”는 입장을 주변 사람들에게 피력하고 있는 것도 권고문에게 쏠리는 따가운 시선 때문인 듯하다.

    물론 자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권고문에게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양성철 주미대사 내정자는 김대통령의 의지가 직접 작용한 경우다. 한화갑 의원이나 정균환 의원 등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달래기에 바쁘다고 한다. 동교동계의 한 핵심 의원은 “낙하산 인사에 대해 여론이 비판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야당 시절 당에 대한 공헌도 등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가 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한쪽의 힘이 너무 과하게, 그리고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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