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3

2000.03.02

카페 같은 분위기… 여기 화장실 맞아?

화려한 인테리어·베이비 시트에 향수병까지…월드컵 아셈 맞춰 ‘바꿔 붐’

  • 입력2006-02-03 13: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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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같은 분위기… 여기 화장실 맞아?
    2월18일 경기 수원시 화성(華城)의 한 공원 화장실. 작업복 차림의 아주머니가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열심히 걸레를 빨고 있다. 걸레는 희다 못해 눈이 부셨다.

    “시장님, 구청장님이 수시로 나오니까 발자국만 생겨도 닦아야죠.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계속 청소해요.”

    분홍색의 화장실바닥은 그림자가 비칠 정도로 말끔했다. 화장실 안에서는 문고리를 전자장치로 바꾸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안에 사람이 있으면 ‘사용중’이라는 알림등이 들어오는 장치였다.

    지난해 말 ‘월 스트리트 저널’에 실려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은 수원 광교 저수지 ‘반딧불이’ 화장실도 마침 대대적인 물청소로 시끌벅적했다. 43평 넓이에 화장실이라기보다는 교외의 카페처럼 생긴 ‘반딧불이’ 화장실은 각 지자체 화장실 담당자들과 동남아시아 내무 관리들의 견학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갖춰진 전용 화장실, 유아의 기저귀를 갈 수 있게 한 베이비 시트, 비닐커버가 깔린 위생 변기…. 그동안 우리가 당연히 요구했어야 하는 시설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산과 물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광을 갖춘 장소에 갈비집이 아니라 공공화장실이 세워졌다는 것이 일단 고마웠다.



    수원시는 지자체 중에선 처음으로 97년부터 화장실 개보수 사업에 집중 투자, 다른 시의 모범이 됐을 뿐 아니라 화장실문화에 대한 전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시의 화장실문화 담당자와 구청장들뿐 아니라 (사)한국화장실문화협의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심재덕 수원시장은 수시로 화장실로 ‘출장’을 나오신다. 불결함의 대명사였던 한국의 ‘뒷간’이 근대화의 혁명을 겪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화장실이 전체 이미지를 결정짓는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단순히 깨끗하고 편리할 뿐 아니라 건물과 통일감을 갖는 공간으로 깊은 인상을 주는 곳도 많이 늘어났다.

    올해 문을 연 서울 종로 국세청빌딩 내 레스토랑 ‘탑 클라우드’의 화장실. 서울시의 전망이 한눈에 펼쳐지는 레스토랑 공간의 연장이면서 일렬형 세면대 대신 분수 같은 원형의 세면대를 가운데에 놓아 복잡한 머리를 잠시 식힐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기능성만 남긴 단순한 인테리어는 시원한 느낌을 극대화한다.

    동양적 인테리어로 유명한 청담동 카페 ‘플라스틱’의 화장실도 카페의 명성에 한몫한다. 흑백의 카페 내부가 차분한 명상적 공간이라면 화장실은 같은 색을 작은 모자이크로 이용해 활기있는 느낌을 준다.

    ‘옷로비 사건’ 때 입방아에 오르내린 고급의상실들의 화장실에는 향수병이 놓인 아르누보풍의 화장대와 크리스털이 박힌 휴지통이 놓여 있다. 화장실은 어두운 조명과 안락한 의자 때문에 비밀스런 이야기가 오가기에 더없이 좋아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능성과 미감을 조화시킨 화장실보다는 말 그대로 ‘변소’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화장실문화시민연대(http://www.restroom.or.kr)나 화장실 전문가 박윤희씨(인포가이드 대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토일렛(http://www.toilet.co.kr)에 자주 최악의 화장실로 추천되는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이나 2호선 선릉역, 남산타워, 남산한옥마을, 명동역, 제부도관광지 등이 한국 화장실의 솔직한 ‘현실’이다. 이런 화장실들은 대개 남녀공용이고, 협소하고 냄새나며, 심지어 ‘푸세식’ (제부도)으로 구더기가 굴러다니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이 화장실들은 외국 관광객들의 발걸음도 잦은 곳에 위치해 ‘제발 외국인들이 안왔으면 좋겠다’는 게 사람들의 바람이다.

    특히 1호선 청량리역 화장실은 서울 도심에 있는 다중 화장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옹색하다. 물론 입구는 남녀 공용이다. 문짝이 없는 좁은 문을 들어서면 9개의 가파른 계단이 있고 오른쪽으로 남자 변기가 훤히 보인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거울 속에 소변보는 남자들의 뒷모습이 한눈에 비친다. 화장실에서 지켜본 5분 동안 10명 넘는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여자변기는 단 두 개뿐인데다 3명 이상 줄서기도 어려워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의 이마와 부딪치는 곤혹스런 장면이 반복됐다.

    이런 화장실 몇 곳에서 씁쓸한 경험을 하다보면 삶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여전히 근대화 이전의 단계임을 실감하게 된다. 즉 정신적 활동에 비해 육체적 활동은 열등한 것이며 몸은 부끄럽고 감춰야 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술작가들이 화장실에 작품을 설치하거나 배변을 작품의 주제로 끌어오는 것도 인간을 완전한 형태로 파악하려는 의도와 우리의 화장실이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서울 송파구청 화장실에 설치작업을 한 배종헌씨는 “화장실을 일상적 장소로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배씨 등 ‘화장실팀’은 서울시의 ‘미디어시티 2000’에 참여해 올 가을 왕십리역 화장실에 원시인의 배변 자세를 그린 벽화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 예산으로 남대문 등에도 ‘작품’으로서 공중화장실이 들어설 계획이다.

    이같은 화장실 개선 열풍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중 화장실은 사람들이 찾기 쉬운 곳에, 깨끗한 채 휴지를 갖추고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금으로 만든 화장실이 있으면 뭐합니까.”

    화장실문화시민연대 표혜령사무국장의 지적이다. 그녀는 “앞으로 화장실에 지나친 세금을 쓰지 않는지도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 화장실 개조 붐은 장기적인 복지대책의 일환이라기보다는 2002년 월드컵과 아셈(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을 대비한 ‘비상’ 행정의 성격이 짙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의 고급 비품을 지키기 위해 공무원이 30분에 한 번씩 검사하러 가거나 물이 튄다며 청소담당자가 손을 씻지도 못하게 막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공원의 화장실 한 곳에 10개가 넘게 놓인 조화 꽃병도 쓴웃음을 짓게 한다.

    “지금 화장실 땜에 공무원들이 죽어나”라고 근로활동을 나온 할아버지는 혀를 쯧쯧 찼다.

    이렇게 본다면 ‘화장실 혁명’이 반짝 전시 행정이 아니라 장기적 정책으로 자리잡도록 감시하고 요구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다. 이같은 인식의 변화야말로 ‘문화’라는 말을 ‘화장실’에 붙여쓸 수 있는 최소 조건이기도 하다.

    매출은 화장실 인심서 나온다

    쇼핑센터들 여성·어린이 전용 만들어 손님 유혹


    서울 남대문이나 동대문 등 재래시장에서 쇼핑할 때 가장 난처한 순간은 화장실을 찾을 때다. 큰 빌딩이나 은행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는 밤에 100원짜리 유료화장실이라도 쓸 수 있으면 운이 좋은 편이다. 그래서 밤에는 방뇨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는 게 시장 사람들의 말이다.

    최근 문을 여는 대형 상가들도 화장실 인심이 박하긴 마찬가지. 동대문에 있는 한 대형 쇼핑센터의 여성복 매장에도 여성용 변기가 단 4개뿐이어서 소비자들의 불평을 사고 있다. 이 때문에 올해 8월에 문을 여는 남대문의 쇼핑센터 ‘메사’는 ‘화장실 마케팅’으로 후발 주자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대형 상가의 여자 화장실들을 일일이 다녀보고 무엇이 불편한지를 조사했습니다. 재래시장의 복잡함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더군요.”(임경호 이사)

    ‘메사’ 아동복매장에 있는 어린이 전용 화장실과 밝은 색상의 여성 전용 화장실에 갖춰진 파우더룸과 여성흡연실이 눈에 띈다. 최근에는 백화점들도 화장실을 이미지 통합 작업의 일부로 바꾸고 있어 ‘화장실 마케팅’이 전에 없이 중요해지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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