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3

2000.03.02

“유태인 학살? 독일인에 돌을 던지지 마라”

2차대전 때 살아남은 한 유태인의 베를린 생존기

  • 입력2006-02-03 13: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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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태인 학살? 독일인에 돌을 던지지 마라”
    20세기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면서 20세기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 대한 기억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그리고 잊히지 않는 사건도 있는 법이다.

    서구인들에게 그러한 사건은 무엇일까. 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에 의해 자행되었던 유태인들의 학살 비극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사건’ 1위를 차지하지 않을까. 나치 정권은 4년 남짓의 짧은 기간에 무려 600만명의 유태인을 희생시킴으로써 인간의 숨겨진 잔인함과 폭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최근 오스트리아에서 결성된 극우연정에 대한 서구 세계의 격렬한 반발이나, 독일 정부가 2차대전 당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생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키로 결정한 것 역시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 이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 일과 관련해 한 가지 의문이 있다. 히틀러 괴벨스 아이히만 등 나치스 당원들과 게슈타포(비밀경찰)들이 유태인 학살의 주범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전쟁 당시의 독일인들은 범죄자일까, 아닐까. 지금까지의 평가는 전자에 기울어져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온 유태인 작가 엘리 위젤은 독일이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고 천명했다. 비록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당시의 독일인들은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한 유태인의 회고록이 이러한 기존 관념에 조용히 반기를 들었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이 미국 독자들에게 소개한 이 회고록의 주인공은 콘라트 라테라는 유태인 지휘자다. 그는 유태인이 깡그리 몰살되던 2차대전 동안 독일의 수도, 나치스의 본거지인 베를린에서 숨어 살았다. 라테의 회고록은 말하자면 ‘살아남은 안네 프랑크의 수기’인 셈이다.

    역사학자들은 2차대전 당시 5000명에서 1만명 정도의 유태인이 베를린 곳곳을 숨어다니며 도피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유태인은 그중 2000명 남짓 된다. 2000명이라는 숫자는 17만 명이라는 베를린 거주 유태인의 숫자에 비교하면 미미할 수도 있다. 17만명 중 겨우 2000명이 살아남은 것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그리고 그 2000명의 존재가 어떻게 독일인들에게 면죄부가 될 수 있는가.



    라테는 회고록을 통해 이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을 도왔던 50여명의 독일인을 회상하고 있다. 그중에는 무명의 연극배우, 교도소 간수, 건물 관리원 같은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에트빈 피셔나 레오 보차드 같은 저명한 음악인들도 들어 있다. 라테는 고향인 브레슬라우에서 베를린으로 도망온 처지였으며 갓 스물을 넘긴 젊은이였다. 도움을 준 독일인들 대부분은 그와 별다른 친분도 없었다.

    회고록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1943년 3월, 브레슬라우에 살던 콘라트 라테 가족은 남몰래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에게 3일치 식량과 최소한의 의복을 가지고 집합하라는 통지서가 전달된 저녁이었다. 유태인의 기차 이용은 이미 금지되어 있었다. 라테 가족은 친구에게 빌린 나치스의 십자기장을 옷깃에 달았다. 베를린에는 라테의 고모 일가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빌름머스도르프 구에 있던 고모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 역시 게슈타포에게 끌려간 뒤였다.

    라테의 가족은 우여곡절 끝에 연극배우인 우르슬라 메이스너의 아파트로 숨어들었다. 우르슬라는 자신과 일면식도 없었던 라테 가족을 장기간 숨겨 주었다. 아파트 아래층의 주민이 “왜 당신 집에서 전에 없던 소음이 들리지요?”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때까지.

    라테 가족은 우르슬라의 아파트를 나와 한 교도소 간수의 집에 새로운 은신처를 구했다. 그리고 떨어져 사는 것이 은신하기에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뿔뿔이 흩어졌다. 라테의 부모는 각기 청소부와 하녀의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음악학교 학생이었던 라테는 간수의 도움으로 화장터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라테가 은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평소 동경해오던 음악가들에게 레슨을 받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피아니스트 에트빈 피셔는 페인트공으로 변장한 라테를 자신의 연주회장에 숨어들게 해 주었다. 나치스에 반대해 지휘 활동을 중단하고 있던 지휘자 레오 보차드는 그에게 무료로 지휘 레슨을 해 주었다. 라테가 보차드에게 자신이 유태인임을 밝히자 보차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렇게 말했다. “방금 그 이야기는 못들은 것으로 하겠네.”

    라테가 독일인 ‘이웃’들에게서 받았던 도움은 어찌 보면 사소한 것들이지만 당시로서는 절실한 것이었다. 구두끈이 없어서 헐렁한 구두를 신고 다니는 라테를 본 한 독일 여성은 자신의 몫으로 나온 의복 배급표를 몰래 건네주었다. 남루하게 차리고 다니면 게슈타포의 눈의 뜨일 염려가 있다는 충고와 함께. 라테는 그 배급표로 구두끈과 의복을 구할 수 있었다.

    라테는 스무 군데가 넘는 은신처와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베를린에서의 지하생활을 이어나갔다. 게슈타포에게 끌려가던 도중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의 부모는 결국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라테 일가를 도운 독일인들은 물론이고 어렴풋이나마 ‘유태인’의 존재를 눈치챈 독일인들 중에서도 그를 고발한 사람은 없었다. 그를 도와준 독일인 중 한 사람인 엘렌은 전쟁이 끝난 뒤 라테와 결혼했다.

    라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유태인이 살아남는 데 50명의 독일인이 도움을 주었다고 가정하면, 최소한 10만명 이상의 베를린 시민이 유태인을 숨기거나 먹여주고 일자리를 구해 주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광기와 유혈로 얼룩진 아리안족 우월주의가 전 유럽을 휩쓰는 와중에서도 적잖은 수의 독일인들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당시 유태인을 숨겨주는 일은 운이 나쁘면 사형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중죄였다.

    올해 80세가 된 콘라트 라테는 전쟁 중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그는 생이별한 부모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리고 독일인을 두둔한다는 오해에 휘말리는 것이 두려워 지금껏 침묵을 지켜 왔다. 그러나 2년 전 베를린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에서 은퇴한 뒤, 그는 50년간 가슴속에 묻어왔던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독일인들, 아무 조건도 없이 그를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를 역사에 남기고 싶었다.

    라테 가족에게 처음으로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던 메이스너는 “그들을 숨겨줄 때 겁나지 않았느냐”는 ‘뉴욕타임스’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반문한다. “내가 그 사람들을 숨겨주는 일 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라고. 그녀의 낮은 목소리, 인간의 양심을 대변하는 그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린다. 조용하게, 그리고 힘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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