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2

2000.02.24

전문경영인은 총수 총알받이?

주주보다 총수 눈치 살피기 급급…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다”

  • 입력2006-07-18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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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경영인은 총수 총알받이?
    98년 퇴출된 한 지방 생명보험사 사장을 역임했던 K씨는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올초 금융감독원에서 부실경영 책임을 물어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아파트를 압류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보험사 퇴출과 함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집에서 쉬고 있는 그는 일정한 수입원도 없어 당장 생계걱정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못지 않게 그를 괴롭히는 사실은 30년 보험인생이 부실경영인이라는 낙인과 함께 막을 내렸다는 점. 그는 “한때 자신을 따랐던 후배들로부터 ‘실패한 경영인’으로 치부될 때가 가장 괴롭다”고 하소연했다.

    재벌총수들 ‘황제 경영’식 전횡 여전

    그는 96년말 이 보험회사의 경영을 맡은 이후 대주주의 부당한 대출 압력을 거절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 과정에서 대주주로부터 “내가 주는 월급을 받으면서 그래도 되느냐”고 수모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이 맡은 보험사가 퇴출된 이상 부실경영 책임을 묻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수긍한다. 다만 전문경영인의 일상적인 경영활동으로 인한 손실까지 모두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은 승복하기 힘들다는 것. 또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던 대주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고, 수십조원의 부실을 초래한 은행 임원들이 ‘솜방망이’ 제재를 받는 선에서 그친 것은 더더욱 납득할 수 없다.



    K씨의 경우는 우리 나라 전문경영인의 위상과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권한도 없으면서 무슨 일이 터지면 총수들의 ‘총알받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게 우리 전문경영인들의 위상이다. 뿐만 아니라 총수에게 한번 밉보인 전문경영인에게는 더 이상 미래가 없기 때문에 총수의 ‘지시’라면 무슨 일이든 완수해야 한다.

    물론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그같은 풍토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외이사를 포함한 이사회 중심의 민주적이고 투명한 의사 결정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주주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는 사실상 이사제도를 도입, 재벌 총수들의 불법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재벌 회장이 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을 통해 독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재벌 회장들의 의식은 이런 제도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 작년 말 재벌그룹 임원 인사에서도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대부분의 재벌 그룹이 이사회나 주총 결의를 거치지 않고 계열사 대표이사 사장과 임원 내정 인사를 발표하는 등 재벌총수의 ‘황제경영’식 전횡이 계속되고 있는 것.

    특히 작년 말 현대그룹의 인사는 총수의 전횡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만하다. 현대는 작년 말 상선과 종합상사 회장을 겸임하던 박세용 구조조정위원장을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발령냈다가 5일만에 다시 인천제철 회장으로 보냈다. 재계에서는 그 배경을 둘러싸고 온갖 설이 난무했다.

    문제는 현대의 이같은 인사가 상법상 절차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 정상적인 인사라면 먼저 인천제철 주총을 열어 박회장을 이사로 선임하고, 다시 이사회에서 그를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했어야 한다. 그러나 신임 이사 선임을 위한 인천제철 주총은 3월3일에나 예정돼 있다. 그때까지 박세용회장은 인천제철 경영과 관련, 아무런 법적인 권한이 없다.

    박세용회장뿐 아니다. 현대의 대표적 전문경영인이었던 이내흔 현대건설사장도 98년 월드컵 주경기장 건설공사를 수주하지 못하고 삼성에 빼앗긴 직후 “××같이 그것도 못하고…”라는 정주영명예회장의 말 한마디에 눈물을 머금고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 장하성교수(고려대 경영학부)는 “현대 계열사들의 주가가 4대 그룹 중에서 가장 낮은 것은 현대의 이런 경영 행태와도 무관치 않다”고 지적했다. 계열사 자금을 동원해 주가조작에 나서는 등 그룹 오너의 독단적인 경영이 계속되는 한 현대 계열사에 투자할 사람이 적을 수 밖에 없어 주가가 낮게 형성된다는 것.

    현대의 이런 경영행태는 기업가치 극대화를 통한 ‘주가 올리기’를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는 미국 등 선진국 최고경영자들의 주주 중시 의식과 대비된다. 대우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98년 대우자동차와 GM의 외자유치 협상이 깨진 것은 바로 GM 경영진들의 주주 중시 경영관 때문이었다고 실토했다. 당시 GM 경영진들은 대우차의 부채가 지나치게 많아 이를 그대로 인수하면 GM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는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해 대우자동차 인수를 포기했다는 것.

    전문경영인들의 의식도 변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작년 3월20일 현대중공업 주총장에서 벌어진 해프닝도 전문경영인의 구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당시 소액주주들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고문이 한번도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사 선임을 반대하자 사회를 보던 조충휘사장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공이 큰 정주영회장님과 월드컵 일로 바쁘신 정몽준고문에 대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호소하는 등 ‘과잉충성심’을 과시해 참석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것.

    당시 참여연대를 대표해 주총에 참석했던 고태관변호사는 “조사장의 행태를 보고 오너 경영체제를 한순간에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주영명예회장 밑에서 성장해온 조사장이 정명예회장 영향력을 벗어나기 힘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

    문제는 이들 전문경영인이 해당 그룹을 떠나도 그룹총수의 ‘영향권’ 하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 사정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공직사회에 들어온 전문경영인들이 때로 과거 자신이 소속했던 그룹에 편향성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이들이 ‘무늬만’ 전문경영인이 아닌지 회의적일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중공업이 작년 2월과 5월 대우중공업 무담보 기업어음을 각각 1000억원씩 매입했다가 800억원을 아직 회수하지 못한 게 대표적인 사례라고 덧붙였다. 물론 윤영석사장은 한국중공업이 대우중공업과 거래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다 대우중공업 기업어음 이율이 높았기 때문에 투자 차원에서 매입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윤사장의 해명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다. 우선 윤사장은 담당 임원에게만 비밀리에 대우중공업 기업어음 매입을 지시했다. 또 작년 대우중공업 기업어음 매입 당시 윤사장이 서울역 앞 대우빌딩내 김우중회장 사무실에서 김회장과 함께 무언가 협의하고 있는 장면이 대우그룹 임원들에게 목격됐다. 윤영석사장이 대우그룹 ‘봐주기’ 차원에서 대우중공업 기업어음을 매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한국중공업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이사회에 보고하지 않고 투자를 했다가 대규모 손실을 초래했다면 사외이사들의 ‘반란’으로 최고경영진이 자리를 지키기 힘들기 때문. 그러나 한국중공업의 경우 800억원을 떼이게 됐는데도 일부 사외이사들이 반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결국 우리의 경우 그룹 단위 경영행태가 변하지 않는 한 전문경영인들의 설자리는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재벌그룹 임원들도 이 점은 인정한다. 4대 재벌 계열사 한 고위 임원은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소액주주들의 권한이 강화돼 이사들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룹 차원에서 결정된 일이라면 거절하기 힘들다”고 실토했다.

    장하성교수도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기업지배구조를 선진화하겠다고 일부 제도를 바꾸기는 했지만 아직 시장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금처럼 그룹총수가 전문경영인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한 전문경영인의 설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결국 전문경영인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사회에 오너로부터 독립적인 사외이사들이 참여해야 하고, 이사회가 최고경영자를 임면할 수 있는 실제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만 전문경영인들이 총수 눈치를 보지 않고 모든 주주와 기업 자체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독립적인 사외이사로 구성 ‘막강 파워’

    경영책임 물어 최고경영자 해임하기도… 한국선 제 기능 못해


    2월2일 40대의 리처드 와거너 사장에게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6월1일자로 넘겨주겠다고 발표한 미국 제너럴모터스(GM) 회장 겸 CEO 잭 스미스는 92년 사외이사들의 ‘반란’에 힘입어 GM의 회장 겸 CEO에 취임, 빈사 상태의 GM을 구한 전문경영인. 미국에서는 이처럼 이사회가 CEO의 해임을 결정하는 일을 가끔 볼 수 있다.

    원래 이사(director)는 경영진(executive)과 구분된다.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는 주주총회 결의사항을 제외한 경영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하고 경영진을 통제, 감독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반면 경영진은 이사회의 결정을 집행하는 실무적인 기능만을 갖는다. 이런 기능을 갖는 경영진의 대표가 바로 CEO다.

    미국에서 이사회가 CEO를 해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경영진을 감독하는 이사회가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인 사외이사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 김대중정부도 이사회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출범 전인 98년 2월 상장기업에 사외이사 제도의 도입을 의무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사회가 경영진을 견제-감독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 경영진이 자신과 친분있는 인사를 중심으로 사외이사를 추천하고 이를 주총에서 형식적으로 승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또 설사 사외이사가 감독기능을 수행하고자 해도 경영진이 자진해서 제공하지 않는 한 경영정보에도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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