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1

2000.02.10

음모론의 음모

  • 입력2006-07-18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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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모론의 음모
    ‘음모론’의 망령이 또 다시 한국 정치를 멍들게 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에 의해 ‘퇴출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자민련의 김종필명예총재가 음모론을 내세우자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다른 ‘명단 인사’ 들까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덩달아 반격에 나서고 있다.

    진실을 농락하는 반 이성적 작태 앞에서, 그리고 국민을 우롱하는 반 민주주의적 유습(遺習) 앞에서 시민운동의 도덕성도, 한국 정치의 개혁에 대한 염원도 풍전등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른바 음모론은 한국 정치의 위기 국면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이번에는 그 주체와 객체가 뒤섞여 함께 재미를 보는 듯한 묘한 양상을 하고 있다. 우선 자민련은 음모론을 퍼뜨린 결과 꺼져가던 김종필씨의 정치적 입지가 오히려 굳어졌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표정관리’까지 해가며 음모론의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더 가관인 것은 청와대다. 조금 얻어맞더라도, 자민련의 입장이 호전되고 결과적으로 공동 여당 전체의 의석이 늘어난다면 음모론의 확산이 그리 나쁠 것 없다고 계산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음모론의 수위 조절에나 신경을 쓸 뿐, 적극적인 해명도 실체적 진실의 규명에도 관심이 없다. 때리는 자도, 맞는 자도 모두 웃고 있는 역설 앞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고사(枯死)할 수밖에 없다,

    음모론이 정치적 반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일단 그것이 그럴듯한 개연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DJ라면 능히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 시민운동과의 커넥션설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연성만으로 음모론이 기승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음모론이 한국 사회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유권자가 ‘핫바지’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각본을 가지고 음모론이 제기된다 하더라도 유권자들이 그것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처음부터 문제가 안될 것이다. 클린턴의 성 추문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의 길거리 신문들은 그가 힐러리에게 맞아서 눈이 퉁퉁 부었느니 어쩌니 보도를 해댔다.

    그러나 미국 시민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성적인 판단이 통하는 사회라면 음모론이 먹혀들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음모가들은 이 점을 꿰뚫어 보고 있다. 진실을 능멸하며 이성을 욕보이는 것, 이것이 음모론 정치 공학의 본질이다. 유권자가 정신을 못차리는 한, 음모론을 퍼뜨려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술수의 정치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수많은 음모론 제기됐어도 진실 규명된 적 없어

    보다 중요한 사실은 진실을 조작해서 이득을 취한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허다한 음모론이 제기되었지만, 그 진실이 규명된 적이 별로 없다. 따라서 허위 사실을 유포한 집단이 처벌받은 적은 더구나 없다. 반격의 기회도, 법의 심판도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선제공격을 퍼붓는 것이 상책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음모론의 희생자가 된 세력도 진실 규명보다 는 또 다른 음모론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키는 일에 관심을 쏟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진실을 호도해도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는 사회, 음모론이 양생(養生)하기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역시 언론이 중요하다. 이번에도 도하 모든 매체들이 진상을 규명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뿐, 스스로 진실을 밝힐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무책임한 음모꾼을 정죄(定罪)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알량한 객관주의는 음모주의자들의 활동 공간을 넓혀주는데 일조를 할 뿐이다. 등 뒤에서 총을 쏘는 야바위꾼 술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언론이 또 다시 이 소명에 등을 돌린다면 머지 않아 그 자신이 음모 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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