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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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사이에서 이창호까지 ‘한중일 삼국지’

조남철 9단 한국바둑 불지펴… 조치훈-조훈현-이창호 등 “21세기 우리 손에”

  • 정용진/ 월간 ‘바둑’ 편집장

    입력2007-03-15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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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는 5000년 바둑사에 유례없는 중흥기였다. 바둑 이론이 크게 발전했고 바둑 인구도 비약적으로 늘었다. 지난 100년 동안 바둑사를 빛낸 기사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 걸출한 스타들의 면면을 알아보자.

    1. 현대기전의 가교자, 본인방 슈사이

    20세기에 바둑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 데에는 기전(棋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프로화’가 정착되면서 아울러 ‘대중화’에도 성공한 것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바둑은 4대 바둑문파가 실질적인 바둑통수권을 행사하는 명인(名人·9단)의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대였고 본인방가(本因坊家)는 이중 최고의 문파였다. 그러나 바둑의 후원자였던 막부(幕府) 체제가 붕괴하고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4대 문파는 급격히 쇠락했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음을 절감한 마지막 세습 본인방 슈사이(秀哉·40년 작고)는 “본인방의 이름을 일본기원에 양도하고 일본기원은 본인방전이라는 기전을 개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39년 6월21일부터 시작된 본인방전은 현대기전의 효시이며, 이는 구시대와 새시대를 잇는 가교의 장이었다. 그 역할을 한 사람이 슈사이다.

    2. 명조련사, 기타니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은 젊어서는 괴동환(怪童丸)으로 불리며 신예 중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으며, 이후 우 칭위엔(吳淸源) 9단과의 신포석 공동연구, 두 차례에 걸친 10번기 대결 등으로 일본바둑사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전전(前戰) 열도바둑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가 20세기 바둑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면 역시 도장 운영을 통해 뛰어난 제자들을 다수 배출한 것을 첫째로 꼽지 않을 수 없다. 조치훈 9단 등 훗날 일본바둑계를 이끈 스타들이 모두 기타니 도장 출신이다.



    기타니 도장은 비단 일본바둑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한국에 현대바둑을 처음으로 보급한 조남철 9단이 내제자 1호였고 그 뒤로 김인 등의 후배기사들이 기타니 도장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국내바둑의 초석을 다졌으니 따지고 보면 한국바둑은 기타니의 큰 은덕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3. 반상의 거인, 우 칭위엔

    바둑사에서 우 칭위엔은 물리학에서의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 비견된다. 바둑의 세계관(패러다임)을 바꾼 인물이 바로 우 칭위엔이기 때문이다.

    중국 출신으로 13세에 도일하여 기타니와 함께 그때까지 실리적인 3선에만 치우쳐 있던 바둑수법에 중앙의 가치와 돌의 효율을 극대화한 ‘신포석’(新布石) 이론을 발표, 일본열도를 열광케 하며 바둑붐을 일으키고 현대바둑사를 다시 쓰게 한 천재. 그는 17년간 일본의 최고수들을 상대로 벌인 10번기에서 전승을 거둔 위대한 승부사일 뿐만 아니라 그의 바둑에 대한 구도적 자세는 지금도 ‘살아 있는 유일한 바둑신(棋聖)’으로 뭇 바둑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조남철 9단은 바둑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바둑에 불을 지펴 20세기 종반에 바둑 최강국으로 키운 개척자이자 선구자다. 37년 도일, 기타니 도장의 내제자로 입문했고 41년 일본기원 초단으로 입단한 뒤 해방 전해인 44년 귀국했다. 그리고 45년 11월 남산동에 한국기원의 모태인 한성기원을 세운다.

    지리산에서 해방을 맞으며 조9단은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못사는 이유가 뭔가. 그것은 각 분야를 이끌 어나갈 전문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바둑으로 국가에 보은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5. 투혼의 승부사, 조치훈

    6세 코흘리개 때 부모 품을 떠나 낯선 땅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11세), 최연소 9단 승단, 최연소 타이틀 획득, 본인방 10기 연패에서 대삼관 3회 달성에 이르기까지 일본바둑계의 모든 기록들을 모조리 갈아치우면서 일본 바둑사를 새로 써 나가고 있는 조치훈 9단. 86년초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유명한 전대미문의 휠체어 대국까지 치른 끝에 일인자 자리를 라이벌 고바야시(小林光一)에게 내주었으나 94년 8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기성 타이틀을 획득, 지금까지 일본바둑 부동의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다. 한번 정상에서 물러난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승부세계의 속설을 최초로 뒤집은 20세기 최고의 승부사.

    6. 꺼지지 않는 신화, 조훈현

    조훈현 9단은 20세기 세계바둑계 지도를 바꾸어 놓은 주역이다. 한-중-일 동양 3개국이 힘의 균형을 이루며 정립(鼎立)한 현재의 구도 중심에는 조훈현이 존재한다.

    도일 전 9세 입단이란 신화를 창조했던 조훈현은 일본에서 활약하다 72년 군복무차 귀국했다. 조훈현 개인적으론 당시 바둑계의 메이저리그인 일본에서 뛸 수 없는 불운이었으나 한국바둑계로선 이 한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천재의 귀국이 엄청난 도약으로 이어졌다. 이후 그의 활약과 연구는 한국바둑을 적어도 한점 이상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얻었다. 무엇보다 조훈현의 공로는 89년 제1회 응씨(應氏)배 대회 우승으로 그때까지 일본, 중국에 괄시받던 한국바둑을 국제무대의 주역으로 올려놓은 데 있다. 이창호를 발굴, 제자로 육성해 낸 것도 그의 공적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적어도 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은 그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해가 지지 않는 반상의 대제국’ 이었다. 그런데 85년 막을 올린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이자 주장으로 출전한 녜 웨이핑(褐衛平) 9단이 일본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추풍낙엽 쓸 듯 쓸어버리고 우승컵을 안아간 기절초풍할 사건이 벌어졌다. 꿈에서조차 패배를 생각지 않았던 일본은 주장인 후지사와(藤澤秀行)와 부장격인 가토(加藤正夫), 그리고 3장으로 출전한 고바야시(小林光一) 9단이 국민 앞에 사죄의 삭발식을 거행했을 정도로 충격에 전율했다. 이 쾌거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실제 이 때부터 일본바둑의 철옹성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8. 중앙바둑의 개척자, 다케미야

    철저히 집(실리)을 추구하는 바둑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20세기에 중앙 세력바둑만을 고집한 다케미야(武宮正樹) 9단의 실험정신은 오늘날 중앙에 대한 가치전환을 가져왔으며 화점바둑의 유행을 몰고왔다. 다케미야의 뛰어남은 그런 미지의 길로 과감히 들어가서도 당대의 실리바둑들을 당당히 제압하고 일가를 이뤘다는 데 있다. 다케미야는 특유의 우주 고공쇼로 일본의 최고 타이틀인 명인, 본인방을 여러 차례 땄고, 88∼89년에는 ‘후지쓰배’를 연속 제패했으며, 89∼91년에는 ‘TV아시아 선수권전’을 3연속 제패했다.

    9. 바둑의 세계화 물꼬 튼 잉창치

    88년 국제대회가 생기기 전까지 일본은 자기들이 단연 세계최강이라고 자신만만해 했고 중국과 한국은 또 나름대로 “우리도 한 칼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대만의 실업가 잉창치(應昌期·97년 작고)가 4년마다 개최되는 우승상금 40만달러의 국제대회를 창설할 테니 “우물 안에서만 떠들지 말고 한번 붙어보라”고 나섰다. 국제기전은 한국이 부동의 1등이라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고 그 뒤를 중국과 일본이 다투는 대차대조표로 나타났다.

    잉씨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덤 8점, 그리고 잉씨룰이라는 독자적인 바둑룰을 제창하는 등 획기적인 활동을 전개, 그때까지의 일본룰 주도 바둑계 관행에 쐐기를 박았다.

    10. 반상의 정복자, 이창호

    이창호 9단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바둑의 대명사다. 20세기 말에 등장한 이창호는 14세에 국내챔피언이 되고 17세에 세계챔피언이 되는 ‘최연소’ 기록 등, 이제 고작 25세의 청년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기네스북감 기록을 갖고 있고 또 날마다 갈아치우고 있다. 그의 독주는 21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중원을 거쳐 유럽대륙을 정복한 칭기즈칸의 말발굽을 그 누구도 막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 이창호의 질주를 막을 기사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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