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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점검|의료보험 통합 연기

‘엉터리 서명’에 날아간 ‘개혁’

‘500만표’ 의식 내년 7월로 의보통합 연기… 실제 서명 97만명도 안돼

  •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엉터리 서명’에 날아간 ‘개혁’

‘엉터리 서명’에 날아간 ‘개혁’
지난 11월15일부터 5일간 국회본청 528호실과 149호실, 201호실에서는 이색적인 작업이 벌어졌다. 9월27일 ‘봉급자 사회보험개혁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가 ‘의료보험 조직 통합을 2년 연기하고 시범사업을 실시하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국회에 청원하며 첨부한 514만명의 서명지에 대한 공개 조사작업이 벌어진 것. 수북히 쌓인 서명지를 놓고 밤샘조사를 하던 자원봉사자와 아르바이트생 40~80여명 사이에서는 “너무했다” “심하다” “이건 서명이 아니라 장난”이란 탄식이 터져나왔다. 서명자 이름이 ‘자장면’으로 돼있는가 하면, ‘김영삼 김종필 김대중’이란 이름이 연달아 들어가 있는 무성의하고 장난기 어린 서명지들이 있었던 것.

동일인 필체… 無서명… 복사…

김홍신의원(한나라당)과 이성재의원(국민회의)은 이 1차 공개검증작업을 토대로 11월16일 기자회견을 통해 서명자수가 당초 범국민대책회의 주장인 514만명이 아닌 339만7000여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 뒤 이뤄진 2차조사는 서명지 중 허위서명자를 솎아내는 작업. 이 작업을 관리한 이성재의원의 비서관 허윤정씨는 “분류작업 결과 명백한 허위로 밝혀진 서명지를 모두 빼고나니 약 97만명 정도만 남았다”고 밝힌다.

조사 과정에서 실제 서명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돼 제외된 서명지는

△모든 서명을 동일인의 필체로 작성한 것



△서명날인이 아예 없는 것

△서명자의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돼 있는 것

△주소지는 다르지만 동별로 서명이 뭉쳐 있는 것

△몇사람이 번갈아가며 여러 군데 서명한 ‘피아노식 서명’

△서명지를 복사해 이중으로 끼워넣은 것

△이름과 서명이 다른 사례

△연예인과 유명인사의 이름만으로 이뤄진 서명지 등이라고 한다.

또한 “96만명 분량으로 분류된 서명지도 거의 대부분 실제 서명이라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이성재의원이 직접 100여명분의 서명지에 적힌 주소를 추적, 일일이 전화확인해본 결과 주소와 성명까지는 일치해도 서명을 했다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서명란에 전화번호가 일률적으로 적혀 있어 전화를 해보니 서명자가 모두 4~5세 어린이인 경우가 여럿이었다고 한다.

인구 4000여만명의 나라에서 514만명의 서명이 가지는 위력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4000만 인구 중 미성년자를 빼고 남은 그 정도의 서명이라면 ‘민의’가 되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명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이고, 그에 의해 정책이 흔들렸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난 10월9일 정부 여당은 8인당정협의회에서 내년 1월1일로 예정됐던 의보통합을 6개월 연기해 7월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0월11일 차흥봉 보건복지부장관에 의해 발표됐다. 차장관이 밝힌 연기사유는 ‘준비부족’.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검토한 결과 물리적으로 내년 1월1일 시행은 어려워 연기를 요청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하루 뒤인 12일 김대중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정직한 정부론’을 역설하며 “의보 통합연기의 경우 준비부족도 이유가 되지만 500만명 이상이 서명을 하고 항의를 하는데 민주정부로서는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고 말했다.

이후 의보통합을 주장하는 ‘국민건강권 확보를 위한 범국민연대’(건강연대)와 통합 시기상조론을 펴온 ‘봉급자 사회보험개혁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 사이에 치열한 성명전이 벌어졌다. 민주노총과 시민단체들이 주도하는 건강연대가 서명의 조작의혹을 제기한 반면 한국노총과 직장의보노조가 주도하는 범국민대책회의는 건강연대의 서류 탈취의혹 등을 문제삼고 나섰다.

그러나 막상 김홍신의원과 이성재의원이 서명지를 놓고 일일이 숫자세기 작업을 한 결과를 내놓자 한국노총은 머쓱해진 분위기. 한국노총은 11월18일 “일부 지역에서 의욕이 앞선 나머지 실제 서명자 수치보다 부풀리거나 집계 과정에서 중복 또는 허수가 개입된 데 대해 유감”이며 “해당조직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의보통합 연기는 자영업자 소득파악이 될 때까지 무기한 연기해야 한다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지는 않았다.

김대중정부의 개혁안 중 가장 개혁적이라는 평을 받아온 사회복지 분야 개혁안들이 이익단체의 저항과 여론 조작, 총선을 의식한 정치권의 입장 변화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의보통합은 지난 88년에도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던 숙원사업이며 97년 대선 때는 김대중 이회창후보 모두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업이다. 또한 이는 98년초 노사정 합의사항이기도 하다.

그렇듯 중요한 의보통합 작업이 연기된 속사정은 과연 무엇일까.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있지만 내년 4월의 총선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의보통합 연기 과정에서 청와대와 한국노총간의 정치적 거래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홍신의원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회 국정감사 첫날에는 법안 통과만 되면 의보통합에는 실무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밝혔는데도 추후에 준비부족을 이유로 연기를 결정한 것은 정치적 고려가 개입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며 보건복지부 장관과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의 사퇴와 대통령의 사과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연대측은 의보통합 연기과정에서 김유배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수석이 대통령에게 직보를 하는 채널인 데다 청와대 입성 전부터 한국노총 박인상위원장과 막역한 사이이기도 하다는 점 때문. 건강연대측은 “김수석이 연기결정 이전부터 공공연히 연기불가피론을 개진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김유배수석측은 “국회공전 등에 따라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시행법 시행규칙 등의 개정에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보건복지부측 보고에 따라 연기를 결정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서명자 수는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건강연대측은 의보통합 연기 청원이 이뤄진 게 9월말인데 그 때라면 의보통합을 실시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던 셈이며, 500여만명의 서명이 아니었다면 정치권이 다 결정된 국민건강보험법의 국회통과를 질질 끌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찌됐건 의보통합 연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인 500만 서명이 ‘함량미달’임이 밝혀진 상황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김유배수석측은 “일정상의 문제 때문에 6개월만 연기했을 뿐 기조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는 입장. 그러나 ‘통합연기=무산’ 가능성을 우려하는 건강연대측은 다른 주장을 한다. 김용익 건강연대 정책위원장(서울대 의료관리학과 교수)는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법 통과 뒤 시행령과 시행규칙 개정 등에 필요한 시간은 약 3개월이다. 정부여당의 주장대로 순수하게 준비부족 때문에 연기한 것이라면 내년 7월이 아니라 내년 4월1일부터 통합 실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부 여당으로선 ‘총선을 의식한 연기조치’란 의심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사태를 “이익집단의 여론조작 공세와 정치권의 표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정권이 소신을 저버린 상징적 사건”이라 평하는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김연명교수는 개혁이 비틀거리는 현상을 “개혁의 센터와 프로그램 부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사회복지에 관한 사안은 어차피 선택의 문제였다. 일단 선택했다면 실현을 위한 주도면밀한 준비가 있어야 했다. 힘있는 이익집단의 눈치보기에 급급하거나 모든 집단으로부터 표를 얻으려 한다면 개혁정책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의보통합을 둘러싼 논란과는 별도로 정치권이건 건강연대건 범국민대책회의건 입을 모아 걱정하는 일이 있다. 이번 파문을 계기로 시민단체의 강력한 ‘무기’였던 서명운동의 운동적 가치가 훼손됐다는 점이다. 의보통합 연기 서명지 조사작업에 참여했던 한 대학생은 “이제 서명운동 권유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묻지마 다쳐! 무조건 서명해”

병원 환자 보호자에 ‘반강제적’ 요구 … 부속 중학교에 서명지 돌리기도


사회복지 분야 개혁과 관련, 의료계에서는 또다른 서명운동이 진행중이다. 병원협회가 주도하는 ‘약사법 개정안’ 반대 서명운동이 그것. 이는 지난 5월10일 약사회와 의사협회가 동의한 의약분업 방안에 따라 마련돼 현재 국회에 상정된 ‘약사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운동이다.

병원협회는 지난 10월27일부터 각 병원별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직원별로 할당을 주고 외래환자나 보호자에게까지 서명용지를 내밀고 있다.

출산을 위해 집 근처 병원에 다니던 현직 간호사 Y씨는 “병원에 가니 서명용지를 내밀더군요. 무조건 서명만 하라는 식이었는데, 속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이라면 대개 서명을 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경희의료원의 경우 부속학교인 경희여중 교실에서까지 서명지를 돌린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서명운동이 시작된 시점은 의보통합 연기 500만명 서명의 성과가 나타난 때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의보통합 연기결정 발표가 있은 10월11일로부터 일주일 뒤인 18일 병원협회 명의로 의약분업반대광고를 각 신문에 내고 27일자로 각 병원에 공문을 보낸 것. 이는 의보통합 반대서명이 실질적 힘을 발휘한 것에 고무된 결과로 해석된다.

병원협회가 의약분업 연기를 주장하는 명분은 ‘국민 불편과 선택권 보장’.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병원협회와 의사협회의 입장이 명백히 갈려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음을 짐작케 한다. 병원협회측은 병원을 의약분업대상기관에서 빼라는, 즉 병원내 약국을 인정하라는 주장인 반면 개원의들이 중심이 된 의사협회는 약사법의 한 조항을 바꾸라는 주장이다. 약사법 21조 4항의 ‘약사가 전문의 약품을 처방하려 할 때 처방전에 의거해야 한다’는 조항에서 ‘전문의약품’ 대목을 ‘의약품’으로 바꾸라는 것. 즉 아스피린 감기약 등 일반의약품도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 사먹을 수 있는 구조로 바꾸라는 얘기다.

의사협회는 이같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대규모 집회도 불사할 태세. 11월30일 전국의 개원의들이 모두 병원문을 닫고 서울 장충체육관에 모여 궐기대회를 연다는 계획이다.

“역시 ‘국민의 편의와 선택권’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집단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는 게 참여연대 김기식정책실장의 지적이다.




주간동아 211호 (p44~46)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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