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6

2016.07.13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신화와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트록 ‘팬질’의 아스라한 기억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6-07-12 11: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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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오래된 CD 한 장을 꺼내 오디오에 올려놓았다. 아마 21세기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틀었을 거다. 1970년대 이탈리아 밴드 메타모르포시(Metamorfosi)의 두 번째 앨범 ‘인페르노’(Inferno·사진)였다. 단테의 ‘신곡’을 모티프로 만든 이 앨범은 근 20년 만에 들어도 생생했다. 보컬은 물론이거니와 웅혼하고 장중한 키보드 라인까지 흥얼거릴 수 있었다.

    메타모르포시를 비롯한 1970년대 이탈리아 음악이 국내에서 흥한 적이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중반 이야기다. 당시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어야 했던 KBS 2FM의 심야 프로그램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아트록 앨범을 소개한 것이다. 라이선스는커녕 수입도 되지 않던 음반을 구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설령 구할 수 있다 해도 몇 만 원은 우습게 뛰어넘는 ‘원판’을 살 돈이 고등학생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오직 밤잠을 참아가며 라디오에 귀 기울여야 했다.

    라테 에 미엘레(Latte E Miele), 뉴 트롤스(New Trolls), 일 로베치아 델라 메달리아(Il Rovecchaio Della Medalia), 퀘벤다 베키아 로칸다(Quevenda Vecchia Locanda)…. 이름 외우기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만큼이나 어려운 이탈리아 밴드들을 그때 알았다. 음반뿐 아니라 밴드나 음악에 대한 정보조차 획득하기 어려웠다. 방송에서 소개되는 극히 단편적인 내용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든 게 상상의 영역이었다. 마치 빈 퍼즐 조각을 맞추듯 쪼가리 정보들을 엮었다. 모자란 퍼즐은 확인할 길 없는 루머로 채웠다. 그게 ‘팩트’건 ‘구라’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싸한 무협지 같은 이야기가 애호가들의 주먹을 불끈 쥐게 했다. 상상은 정보에 그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메타모르포시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비극적 상황이 일어났다. 여느 이탈리아 밴드들과는 다른, 마치 파바로티를 연상케 하는 성악적 보컬과 연옥 순례자의 심경을 그리는 듯한 키보드 연주에 심취해 있었는데, 하필 이 곡이 방송 마지막 곡이었던 것이다. 마치 계곡에서 비급을 획득한 우리의 주인공이 속세로 돌아와 숙적과 대면하는 순간! 바로 뒤 결투의 장이 파본으로 발행된 무협지를 읽는 심경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음반을 구할 길은 없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것. 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확인할 길 없는 뒷부분을 가까스로 녹음한 앞부분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그려나갔다(후일 대학 음악동호회 사람들과 비슷한 경험을 안주 삼아 술깨나 마셨다).



    과학이 신을 몰아내고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근대 이전, 모든 신화와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대 에게 해 문명의 누군가가 번개를 보고 제우스를, 불의 근원을 생각하다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이다. 상상으로 창조해낸 이야기들은 한 문화권에서 얽히고설켜 세상 이치를 설명하는 신화가 됐다. 과학의 시대에 태어나 그리스 신화를 무협지처럼 읽었던 지난 세기의 끝 무렵에도, 여전히 신화를 만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신화의 세계에서 1970년대 유럽이란 공간은 일종의 유토피아이자 엘도라도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상상도 할 필요가 없다. 듣고 싶은 음악은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궁금증에 대한 답은 구글에 모두 있다. 팬들끼리 논쟁에 필요한 무기는 그럴싸한 상상에서 엄정한 근거가 된 지 오래다. 정보혁명은 우리에게 지적, 경제적 편리를 선사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역시 공짜가 없다. 우리는 편리를 택한 대신 상상력의 많은 부분을 대가로 치렀다. 처음부터 이 선택의 결과에서 살아온 세대는, 후일 자신들이 경험한 세상을 어떻게 기억할까. 인공지능이 생활을 지배하게 될 그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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