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시네똑똑

성난 얼굴로 돌아본 긱 이코노미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

  • 영화평론가·성결대 교수

    yedam98@hanmail.net

    입력2019-12-20 15: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진 제공 · 영화사 진진]

    [사진 제공 · 영화사 진진]

    영국 사실주의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켄 로치 감독은 신자유주의 속 복지제도의 맹점을 파고든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2017년 칸영화제 황금야자상을 수상한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an)’로 불리던 1960년대 영국 청년들의 저항적 문화운동 시기부터 영화를 만들어온 팔순 노감독이 ‘박수 칠 때 떠나라’를 실천했던 것. 그런 그가 올해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들고 나온 영화가 ‘미안해요, 리키’다. 

    리키(크리스 히친 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니던 건축회사가 어려워지자 실업자가 된다. 백수로 살아갈 수 없어 선택한 일이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택배원이다. 이 일을 하려면 밴 차량이 필요하다. 간병인으로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분)는 남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동차를 팔고 밴을 사준다. 

    노인 간병일을 위해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애비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이지만 제로아워 계약(정해진 노동시간 없이 임시직 계약을 한 뒤 일한 만큼 시급을 받는 노동계약)으로 일당은 늘 같다. 리키의 경우 자영업이라 시간을 들인 만큼 수입이 생길 줄 알았건만, 시간 내 물건을 배송하지 못하거나 사정이 생겨 일을 미루게 되면 택배회사가 각종 이유로 벌금을 떼어간다. 대체 인력을 못 구하면 팔이 부러져도 일하러 나가야 하고, 차에서 2분만 벗어나면 ‘총’(배송 위치 추적 장치)이 회사에 신호를 보낸다. 

    집을 사겠다는 목표에 다가서기는커녕, 과도한 노동시간 탓에 가족이 함께할 시간은 꿈도 못 꾼다. 아이들부터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고등학생 아들 셉(리스 스톤 분)은 미래의 희망을 부정하는 불만 가득한 청년이 돼가고, 뭐든 혼자 해내려던 착한 딸 리사 제인(케이티 프록티 분)은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다. 


    [사진 제공 · 영화사 진진]

    [사진 제공 · 영화사 진진]

    영화는 냉혹한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은 매일 똑같아 보이지만 조금씩 쌓이던 문제가 결국 폭발한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현재, 혹은 미래이기도 하다. 비정규 프리랜서 노동 형태의 확산을 낳고 있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의 비인간적 면모를 비판하는 노감독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원제 ‘Sorry, We Missed You’는 물건을 배송했지만 주인이 없을 때 남기는 쪽지다. ‘당신을 만나지 못해 유감입니다’라는 정도의 다정한 문구지만 다음 날 다시 배달을 와야 하는 고달픈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리키 역의 크리스 히친은 배관공으로 일하는 진짜 노동자고, 택배 물류창고의 배우들은 모두 진짜 택배기사다. 다큐멘터리처럼 영화는 현실의 반영을 넘어 현실 자체가 된다. 삶에 지친 그들의 얼굴은 우리 각자의 얼굴이기도 하다. 

    이들의 삶에도 작은 행복의 순간, 유머, 사랑 넘치는 따스함이 있다. 제발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시간을 되찾기를, 간병하는 노인을 부모처럼 대하고 싶어 하는 친절한 애비의 얼굴에 햇살이 비치기를, 그리고 리키가 삶의 희망을 다시 품기를 열심히 응원하게 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