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포퓰리즘의 종착점은 국가 경제 해체

미국 제재로 경제난 악화…원유 공급 끊긴 쿠바에는 마차 등장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9-10-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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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왼쪽)과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포옹하고 있다. [ACN]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왼쪽)과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포옹하고 있다. [ACN]

    중남미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서 최근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마차다. 휘발유, 디젤 등 연료가 부족해 대중교통 운행이 대폭 줄어들자 쿠바 정부가 말이나 소가 끄는 ‘동물 운송 수단’을 이용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수도 아바나의 경우 출퇴근시간 때면 사람들이 몇 시간씩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주유소에는 기름을 사려는 차와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줄을 서 있다. 쿠바 국민은 1990년대 겪은 연료 위기가 재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당시 쿠바 국민은 1991년 옛 소련이 붕괴되면서 연료 지원이 끊기자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수입품을 전적으로 소련에 의존해왔던 쿠바는 심각한 경제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가 운행되지 못해 마차를 타고, 농기계를 돌릴 연료가 없어 소로 밭을 갈아야 했다.

    카스트로와 차베스

    쿠바 학생들이 마차를 타고 등교하고 있다(왼쪽).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주유소에 휘발유를 사려고 줄 서 있는 시민들. [위키피디아, Mecro Press]

    쿠바 학생들이 마차를 타고 등교하고 있다(왼쪽).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주유소에 휘발유를 사려고 줄 서 있는 시민들. [위키피디아, Mecro Press]

    쿠바가 1990년대로 되돌아간 것은 베네수엘라의 원유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는 2000년부터 하루 평균 11만5000배럴의 원유를 거의 무상으로 쿠바에 공급해왔다. 쿠바 전체 수요의 60%를 베네수엘라 원유로 충당한 것이다. 원유를 포함해 쿠바에 대한 베네수엘라의 연간 지원 규모는 50억 달러(약 6조120억 원)로 쿠바 경제에서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베네수엘라가 쿠바를 적극 지원해온 것은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끈끈한 인연 덕분이었다. 특히 차베스에게 카스트로는 정치적 아버지며 구원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베스는 중령이던 1992년 2월 쿠데타를 기도했다 실패해 2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94년이었다. 당시 카스트로는 감옥에서 풀려난 차베스를 쿠바로 초청했다. 그리고 차베스에게 자신의 혁명 노하우를 전수하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차베스는 1998년 12월 대선에서 역대 최연소(44)로 당선했으며, 이후 계속 승리해 2013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차베스는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가주택 공급, 휘발유와 생필품 무료 배분 등 쿠바식 사회주의 모델을 철저히 추종했다. 또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해 천연자원을 국유화했고, 대규모 예산을 빈민구제 프로그램에 투입했으며, 분배를 강화하는 등 베네수엘라를 중남미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카스트로는 이 과정에서 차베스에게 조언하는 등 사실상 멘토 역할을 했다. 게다가 쿠바도 원유 공급에 대한 보답으로 베네수엘라에 의사를 비롯해 전문 인력을 대규모로 파견했다. 쿠바가 베네수엘라에 보낸 인력은 4만여 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75%는 의사였다. 베네수엘라는 이들의 인건비로 연간 54억 달러가량을 쿠바에 지급했다. 쿠바에서 파견한 인력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차베스 정권을 지키는 데 투입된 정보요원과 군 자문관들로, 이들의 규모는 1만여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베네수엘라 법무부와 정보기관, 각종 군부대에서 근무했다. 차베스는 이들 쿠바 정보요원에게 자국 내에서 총기를 소지하고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줬다.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역시 쿠바와 관계가 돈독했다. 마두로는 카스트로가 2016년 사망한 이후 정권을 잡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와도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마두로는 오일머니를 석유산업과 인프라에 투자하지 않고 무상복지를 늘리는 등 포퓰리즘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데 사용해왔다. 마두로는 또 지난해 5월 20일 실시된 대선에서 각종 불법행위를 통해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대선은 주요 야당 후보가 불참하는 등 국제사회로부터 부정선거라는 비판을 들었다. 미국 정부는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원유 수출 금지 같은 강력한 제재조치에 나섰고, 야권 지도자인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올해 1월 스스로를 임시대통령으로 선언한 뒤 마두로 퇴진운동을 벌이고 있다.

    중남미 폭정 3인방

    식료품을 배급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쿠바 국민들. [cubanreporer.net]

    식료품을 배급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쿠바 국민들. [cubanreporer.net]

    베네수엘라 경제는 차베스와 마두로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2014년 중반 배럴당 100달러대였던 국제유가가 2015년 배럴당 20~30달러대로 폭락했다. 국가 재정의 95%를 원유 수출에 의존해온 베네수엘라는 유가 하락으로 수입이 대폭 줄어들고 원유 수출량마저 크게 감소했다. 마두로가 재원을 마련하려고 돈을 마구 찍어내면서 초인플레이션과 함께 식료품·생필품 품귀 현상이 나타났고, 베네수엘라 경제는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4월 말 과이도가 군사봉기를 시도했지만 군부 등이 마두로를 지지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마두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쿠바가 베네수엘라 군부의 뒷배로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쿠바는 또 마두로의 신변 보호를 위해 경호 인력까지 파견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8월 베네수엘라에 대해 전면적인 금수조치, 이른바 엠바고(embargo)를 단행하면서 쿠바를 비롯한 모든 국가에 더는 마두로 정권을 지원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미국 정부는 아예 본보기로 9월 26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공산당 제1서기와 자녀 4명 등에 대해 자국 입국을 금지하는 제재를 단행했다. 9월 24일에도 베네수엘라 석유를 쿠바로 운송한 파나마 등의 해운업체 4곳을 제재했으며, 쿠바 유엔대표부 외교관 2명도 추방했다. 이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추진해온 쿠바와의 화해 정책을 취소하고 제재조치를 강화해왔다. 오바마는 2014년 12월 쿠바와 관계 복원을 선언하면서 해빙 분위기에 물꼬를 텄고, 2015년 7월엔 외교 단절 54년 만에 아바나에 미국대사관을 열었다. 반면 트럼프는 미국인의 쿠바 개인 여행을 제한한 것은 물론, 쿠바 군부와 거래하는 미국 기업을 단속하는 조치를 내리는 등 양국관계를 국교 정상화 이전으로 되돌리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트럼프 정부의 전략은 마두로 정권 붕괴를 고리로 쿠바와 니카라과 정권을 와해시키고 더 나아가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켜 ‘미국의 뒷마당(backyard)’인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를 ‘폭정 3인방(troika of tyranny)’이라고 규정해왔다. 

    트럼프 정부는 이처럼 쿠바에 대한 고강도 제재조치를 계속 내놓고 있으며 지금까지 내린 제재조치의 핵심은 쿠바 정권의 돈줄을 끊는 것이다. 대표적인 제재조치 내용을 보면 쿠바계 미국인의 가족 여행을 제외한 모든 국민의 쿠바 여행 금지를 들 수 있다. 또 쿠바계 미국인이 쿠바에 사는 가족을 위해 달러를 송금하는 것도 분기당 최대 1000달러(약 120만 원)로 제한했다. 

    미국에는 쿠바계 국민 180만여 명이 살고 있다. 전체 쿠바 인구가 112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6명당 1명꼴이다. 이들이 고국의 가족과 친지에게 보내는 돈은 매년 30억 달러(약 3조6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쿠바의 자유와 민주화 연대법’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경제난으로 국경을 넘어 콜롬비아로 탈출하고 있다. [UNHCR]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경제난으로 국경을 넘어 콜롬비아로 탈출하고 있다. [UNHCR]

    트럼프 정부는 23년간 서랍 속에 묵혀뒀던 이른바 ‘헬름스-버턴법’도 꺼내 들었다. 헬름스-버턴법의 정식 명칭은 ‘쿠바의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법’으로, 미국 의회가 1996년 3월 제정했다. 이 법의 제3조는 1959년 쿠바혁명으로 쿠바 정부에 자산을 몰수당한 미국인들이 이 자산을 이용해 이익을 내온 외국 기업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 역대 정부는 쿠바와 거래해온 유럽과 캐나다, 일본 등 동맹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법의 제3조를 6개월 단위로 계속 유예해왔다. 트럼프 정부는 더는 이 법을 유예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트럼프 정부의 이런 고강도 제재는 마두로 정권에 대한 쿠바의 지원을 차단하려는 의도다. 트럼프는 또 내년 대선에서 플로리다주 등에 거주하며 쿠바 정권 붕괴를 원하는 쿠바계 미국인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속셈도 있다. 

    쿠바 정부는 이에 맞서 민간과 공공사업자들의 상품 및 서비스 가격 인상 금지 등 전면적인 가격 통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쿠바 정부는 닭고기, 쌀, 콩, 달걀을 인당 한정 수량만 판매하고 나머지는 국가 배급 시스템을 통해 통제하는 조치를 내렸다. 쿠바 정부는 그동안 연간 20억 달러를 들여 식료품의 3분의 2를 외국에서 들여왔지만 외화 수입이 크게 줄면서 제대로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상황이 갈수록 악화하자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미국 정부가 각종 제재조치 등 잔악한 집단학살 정책을 통해 우리를 옥죄고 있다”며 국민에게 에너지와 식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천국’을 만들겠다는 지도자들의 말과는 달리 경제난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고 있는 쿠바와 베네수엘라 국민의 신세가 고달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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