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한의 세상 관심법

이춘재 자백하게 한 것은 ‘과학’ 아닌 ‘사람’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com

    입력2019-10-04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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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연쇄살인’ 사건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2006년 4월 2일 경기 오산시 화성경찰서 강력반 직원들이 범인 몽타주를 걸어놓고 수사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이훈구 동아일보 기자]

    ‘화성 연쇄살인’ 사건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2006년 4월 2일 경기 오산시 화성경찰서 강력반 직원들이 범인 몽타주를 걸어놓고 수사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이훈구 동아일보 기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이춘재(56)가 드디어 범행을 자백했다. 8월부터 진행된 경찰 조사에서 계속 범행을 부인해오던 그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입증된 DNA 검사 결과와 9명의 범죄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 투입, 시외버스 안내양 등 목격자들의 증언, 가석방 가능성 소멸 등이 그로 하여금 범행을 자백하게끔 했을 것이다. 30년 전 발생해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미제 사건이 지금이라도 해결돼 다행이다. 필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해결이 우리 사회에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언젠가는 밝혀진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해 과거 수사본부에 남아 있는 사건 기록과 사진들.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해 과거 수사본부에 남아 있는 사건 기록과 사진들.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첫째, 죄를 지으면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춘재는 경기 화성에서 9차례나 여성을 강간한 후 살해했다. 5건의 추가 범행도 이번에 밝혀졌다. 1994년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해 교도소에 수감되기까지 거리를 활보했고, 모범수로 지내면서 가석방을 꿈꿨다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범인인 것이 드러났다. 33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을지라도 말이다. 만일 큰 죄를 지어도 그것이 비밀로 묻힐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진다면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과 준법정신은 한없이 추락할 것이다. 정의롭지 못하고 불공정한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 악마는 결국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말하자. “거 봐. 죄를 지으면 수십 년이 지나도 다 밝혀져. 그러니 죄 짓지 말고 살자.” 

    둘째, 과학기술의 발전이 세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세상을 파괴하고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고 염려한다. 사실 과학기술에는 양면성이 있다.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한편으로 환경오염, 일자리 감소 등의 문제를 양산한다. 1869년 스위스 의사 요한 프리드리히 미셰르가 DNA를 처음 추출한 이래 DNA에 관한 연구가 꾸준히 이어졌고 오래된 범죄 증거물에서도 범인의 DNA를 찾아낼 수 있을 만큼 관련 기술이 발전했다. 

    셋째, 프로파일러의 활약이 사람에 대한 믿음을 키운다는 것을 알았다. 이춘재가 자백하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프로파일러 때문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DNA 일치’라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를 내밀었음에도 이춘재는 범행 사실을 부인해왔다. 하지만 프로파일러들과 여러 차례 만나 대화하면서 ‘라포(rapport)’가 싹텄다. 라포란 친밀감과 신뢰가 있는 인간관계를 뜻한다. 정신과에서도 의사와 환자 사이에 라포가 형성돼야 상담과 진료가 원활히 진행되고 기대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결국 강력 범죄자를 설득시킨 것은 ‘과학’이 아닌 ‘사람’이다. 이번 일로 우리는 모든 문제가 사람에서 비롯되지만, 또한 사람에 의해 해결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넷째,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자각적 성찰의 계기가 됐다. 이춘재는 잔혹했다. 이춘재 전에도 계획적 살인범이나 연쇄살인범이 존재했고 앞으로 새로운 살인마가 나타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악인은 매우 극소수며,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살인 대신 ‘공격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많고 적음에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공격성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안타깝지만 공격성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다. 화가 나 소리를 지르는 것은 분노라는 감정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인데, 이 또한 공격성 표출에 해당한다. 다만 대부분은 공격성을 늘 조절하고 살기에 여간해서는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다른 사람을 때리는 행동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는다.

    ‘공격성’에 대한 자기 성찰 계기로

    간혹 친구 간에, 가족 간에 공격성과 폭력성을 넘나드는 일이 발생한다. 심한 경우 가정폭력, 아동학대, 학교폭력, 직장폭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이 잔혹하거나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어도 공격성이라는 인간 본능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자기 성찰을 해나가야 한다. 평소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하고, 사람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며, 긍정적인 사고와 감정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분노하면 상대도 맞대응해 분노한다. 내가 누군가를 공격하면 그 역시 나를 공격해온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내가 긍정적인 태도와 감정을 보이면 상대도 그렇게 한다. 선한 영향력은 존재한다. 나의 선한 심성과 언행이 상대의 잔혹성을 감소 또는 소멸시키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 있던 끔찍한 범죄자가 밝혀진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악마는 사라지고 천사가 더 많이 생겨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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