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커 프로젝트

‘서울에서 가장 슬픈 문’ 앞에 세워진 범종교적 신성 공간

올해 재탄생한 ‘서소문역사공원 및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10-04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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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 지하 3층에 위치한 ‘하늘광장’ [김도균]

    박물관 지하 3층에 위치한 ‘하늘광장’ [김도균]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서울 도심에 위치한 서소문역사공원이 6월 새로 문을 열었다. 울창한 나무와 잔디로 둘러싸인 공원에는 도심 속 직장인에게 좋은 산책로가 생겼다. 그 산책로에 붉은색 벽돌담이 군데군데 보인다. 담벼락을 따라 온갖 종류의 장미꽃이 심겨 있다. 그래서 처음엔 조경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원 내 3곳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으로 내려가 ‘하늘광장’에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그 벽돌담의 실체를 깨달았다. 지하 3층부터 지상 1층 3m 담벼락까지 18m 높이의 벽돌담에 둘러싸인 33×33m의 정방형 공간으로 푸른 하늘이 넘실거리며 쏟아져 들어왔다.

    숭고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

    지하 깊은 어둠의 공간을 예상했다 하늘빛이 대책 없이 쏟아지는 공간을 만났을 때 느낌을 뭐라 해야 할까. 에드먼드 버크와 에마뉘엘 칸트 이후 미학자들이 숭고(the sublime)라고 부르는 감정이다. 이는 비례와 조화, 균형과 파격에서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beauty)과 다르다. 숭고는 압도적으로 거대하거나 무한한 것 앞에서 느끼는 한없는 초라함과 더불어 ‘나보다 더 크고 나도 어쩔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경탄과 경외의 마음을 품게 하는 체험이다. 

    고대인은 이를 종교적 신성 체험과 그로 인한 마음의 정화와 연결시켰고, 20세기인은 스펙터클의 재현을 통한 대중 선동과 동원 수단으로 써먹었다. 하늘광장에서 느껴지는 숭고는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종교·정치·경제적 목적의식이 배제된 순수한 느낌에 더 가깝다. 거기엔 숭배와 열광보다 슬픔과 경건의 느낌이 강하다. 붉은 벽돌로 이뤄진 그 광장의 한편에 철도용 침목을 재활용한 설치미술품 ‘서 있는 사람들’(정현 작)도 이런 느낌에 조응한다. 하늘을 향해 서 있는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찬양보다 비통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하늘광장’ 그 맞은편 실내에 위치한 ‘콘솔레이션 홀’. [김도균]

    ‘하늘광장’ 그 맞은편 실내에 위치한 ‘콘솔레이션 홀’. [김도균]

    1 박물관 지하 3층 콘솔레이션 홀의 ‘빛의 우물’을 근접 촬영한 사진. 2 박물관 지하 3층 콘솔레이션 홀 안쪽에서 ‘하늘광장’을 바라본 풍경. 3 박물관 지하 3층에서 지하 2층으로 올라가는 긴 회랑의 통로 ‘하늘길’. 권석만 작가의 자연석 조각품인 ‘발아’가 설치돼 있다. 4 박물관 지하 3층 14m 지하의 어둠을 품은 콘솔레이션 홀. 지상의 채광창으로부터 흘러내려온 자연광이 빛의 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호영 기자, 김도균]

    1 박물관 지하 3층 콘솔레이션 홀의 ‘빛의 우물’을 근접 촬영한 사진. 2 박물관 지하 3층 콘솔레이션 홀 안쪽에서 ‘하늘광장’을 바라본 풍경. 3 박물관 지하 3층에서 지하 2층으로 올라가는 긴 회랑의 통로 ‘하늘길’. 권석만 작가의 자연석 조각품인 ‘발아’가 설치돼 있다. 4 박물관 지하 3층 14m 지하의 어둠을 품은 콘솔레이션 홀. 지상의 채광창으로부터 흘러내려온 자연광이 빛의 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호영 기자, 김도균]

    하늘광장과 연결된 유리문을 지나면 다시 대조적 방식으로 숭고를 체험하게 하는 실내공간을 만나게 된다. 땅속 14m 깊은 어둠을 품은 ‘콘솔레이션 홀’이다. 영어로 위안의 공간이란 뜻이다. 



    사람들이 오갈 수 있게 바닥으로부터 2m가량 띄워놓고 25×25m 사방을 검은색 철판으로 둘러싼 이 공간은 하늘정원과 반대로 깊은 어둠에 침잠하게 한다. 그 어둠에 빛을 밝히는 것은 지상의 채광창으로부터 수직으로 떨어지는 희미한 ‘빛의 우물’뿐이다. 가끔 사방 벽에 명상적 느낌의 슬라이드 사진과 은은한 음악이 흐르지만 내면에 깊이 침잠하게 해주는 공간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지상엔 평화, 지하엔 추모

    5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의 ‘노숙자 예수’. 6 갖가지 장미꽃이 핀 공원 벽돌 담벼락. 7 박물관 지하 3층 상설전시관. 살짝 단조로운 전시 품목을 보완하기 위해 가장 화려한 인조대리석과 특수조명을 썼다. [지호영 기자, 김도균]

    5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의 ‘노숙자 예수’. 6 갖가지 장미꽃이 핀 공원 벽돌 담벼락. 7 박물관 지하 3층 상설전시관. 살짝 단조로운 전시 품목을 보완하기 위해 가장 화려한 인조대리석과 특수조명을 썼다. [지호영 기자, 김도균]

    휴식과 평화를 담은 안온한 지상 공간인 공원, 숭고와 추모의 느낌이 담뿍 담긴 지하 공간인 박물관. 서울의 새 명물로 자리 잡게 될 이 공간의 진면목이다. 이 공간에 대한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 둘을 오가다 보면 절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이 대체 무슨 역사를 품고 있기에…. 

    한양은 본디 4대문과 4소문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동서남북에 위치한 4대문이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다. 그 사이로 다시 4개의 소문이 있었으니 동북의 혜화문(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의문(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속칭 시구문), 서북의 창의문(속칭 자하문)이다. 


    8 서소문역사공원 중간 지점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의 표지석. 9 칼 형태로 변형된 십자가 조각. 10 현양탑. [지호영 기자]

    8 서소문역사공원 중간 지점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의 표지석. 9 칼 형태로 변형된 십자가 조각. 10 현양탑. [지호영 기자]

    이 가운데 가장 슬픈 문이 소의문이었다. 궁궐에서 시체가 나갈 때 이용된 2개의 문이 소의문과 광희문이다. 광희문이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는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린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럼에도 소의문이 더 비극적인 것은 그 바로 앞에 처형장이 있었던 데다 돈의문과 더불어 여태까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를 거치면서 천주교인 100여 명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이 중 44명이 시성되면서 천주교 역사상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곳이 됐다. 그래서 1984년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졌고,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그곳을 참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현양탑 남쪽으로 약 2만1100㎡(6400평) 규모로 길게 조성된 공원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주로 노숙자의 공간으로 각인돼 일반 시민들이 기피하는 공간이 됐다. 그래서 서울시와 천주교가 손잡고 700억 원을 투자해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범종교적 신성함’을 담다

    박물관 지하 2층 ‘성 정하상 기념경당(소성당)’ 내부. 벽면에 십자가를 설치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왼쪽). ‘성 정하상 기념경당(소성당)’ 밖에 설치된 정하상- 정정혜 남매의 조각상. [김도균]

    박물관 지하 2층 ‘성 정하상 기념경당(소성당)’ 내부. 벽면에 십자가를 설치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왼쪽). ‘성 정하상 기념경당(소성당)’ 밖에 설치된 정하상- 정정혜 남매의 조각상. [김도균]

    2014년 현상공모를 통해 당선한 현 건축설계의 모토는 ‘지상은 녹지공간으로, 지하는 추모공간으로’였다. 처형장에서 희생된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든 땅속에 이를 받들고 기리는 그릇을 조성한다는 이념적 구상이었다. 현실적으론 1996년 공원 지하에 지어진 지하 4층의 공영주차장(900대 차량 수용) 가운데 230대 주차공간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시관, 도서관, 소성당, 강연장이 들어선 복합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성 정하상 기념경당(소성당)’의 출입문. 청동문을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회전문으로 제작했다(왼쪽). 박물관 지하 2층 기획전시공간. [지호영 기자, 김도균]

    ‘성 정하상 기념경당(소성당)’의 출입문. 청동문을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회전문으로 제작했다(왼쪽). 박물관 지하 2층 기획전시공간. [지호영 기자, 김도균]

    그렇지만 이곳이 천주교라는 특정 종교의 성지라는 징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천주교 성지 하면 떠오르는 십자가와 스테인드글라스, 대리석 열주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지상에선 앞서 언급한 현양탑과 칼 형태로 변형된 십자가 조각 정도만 눈에 띌 뿐이다. 지하 박물관에서도, 300석 규모의 소성당(‘성 정하상 기념경당’) 내 십자가는 설교대에 그려진 것이 유일하다. 또 미사를 진행할 때는 비신자 관람객을 배려해 청동회전문을 닫는다. 


    1 지하 1층의 역사박물관. 1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다. 2 박물관 지하 1층에 있는 150석 규모의 강연장 ‘명례방’. 3 박물관 지하 1층의 통로 겸 자유 전시공간. 여러 개의 모듈구조를 붙이는 방식으로 독립감과 연속성을 동시에 확보했다. [지호영 기자, 김도균]

    1 지하 1층의 역사박물관. 1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다. 2 박물관 지하 1층에 있는 150석 규모의 강연장 ‘명례방’. 3 박물관 지하 1층의 통로 겸 자유 전시공간. 여러 개의 모듈구조를 붙이는 방식으로 독립감과 연속성을 동시에 확보했다. [지호영 기자, 김도균]

    설계에 참여한 3개의 건축사사무소 가운데 좌장인 윤승현 대표는 “범종교적 신성함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지역별 특징을 적극 수용하면서 보편 종교를 지향하는 천주교의 특징을 살리고, 대다수 사람들 속에 내장된 신성함에 대한 갈망을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그래서 벽돌과 콘크리트, 나무와 돌 등 친숙한 건축자재를 선택했으며, 누구나 거부감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면서 모듈형 단위로 구성된 전시공간을 구상했다는 설명이었다. 

    그 설명을 들으니 지상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노숙자 형상의 예수 동상이 떠올랐다. 이곳이 순교자와 노숙자 같은 ‘호모사케르’의 공간임을 잊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어둠 속에서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신성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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