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9

2015.10.19

승리의 영광 패배의 굴욕

그리스 조각 ‘신과 거인들의 싸움’

  • 황규성 미술사가 samsungmuseum@hanmail.net

    입력2015-10-19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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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의 영광 패배의 굴욕

    ‘신과 거인들의 싸움’, 기원전 170년,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소장.

    그리스시대 조각 ‘신과 거인들의 싸움’은 제우스의 대제단(또는 페르가몬 제단)을 장식하고자 만든 넓은 띠 모양의 프리즈(frieze)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각가는 하얀 대리석에 신(神)과 거인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싸우는 신화의 한 장면을 표현했습니다.

    직사각형의 화면에 4명이 등장합니다. 화면 상단에 서 있는 2명은 신이고, 하단의 2명은 거인입니다. 그리스어로 거인은 기가스(Gigas), 복수의 거인 또는 거인족을 가리킬 때는 기간테스(Gigantes)라고 합니다. ‘대지의 여신’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기간테스는 싸움이 벌어지면 산과 바위를 무기 삼아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화면 맨 왼쪽의 인물은 남성적인 근육이 잘 발달한 모습입니다.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다른 쪽 다리는 쭉 편 엉거주춤한 자세로 온몸에 뱀을 휘감고 있습니다. 하반신은 뱀이고, 상반신은 인간인 거인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로 오른쪽에 있는 아테나 여신에게 머리채를 잡혀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아테나는 거인과 달리 부드럽고 풍만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얼굴은 파손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지만, 섬세하게 조각한 드레스와 장식품은 잘 남아 있습니다. 아테나는 왼팔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으로 거인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습니다. 거인은 온몸을 비틀며 도망치려 안간힘을 씁니다. 아테나 옆으로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오른손을 든 채 아테나의 빛나는 머리에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니케의 얼굴도 파손됐지만 큰 날개가 있어 니케임을 알 수 있죠.

    아테나와 니케 사이에는 막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한 여인이 표현돼 있습니다. 거인의 어머니인 가이아입니다.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이며,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쟁쟁한 신들, 즉 카오스, 아이테르, 타르타로스, 우라노스, 폰토스, 오케아노스, 포세이돈, 제우스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이 조각 작품은 격렬한 전쟁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뒤엉켜 싸우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세밀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니다. 신들은 1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비로소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가졌고, 반면 패한 기간테스는 지하에 묻혔습니다. 남부 이탈리아 화산 밑에 감금됐다는 전설도 있어, 고대인들은 화산 활동이 기간테스가 화를 내는 것이라 믿었다고 합니다. 워낙 고부조로 조각된 작품이다 보니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안타깝지만, 이 제우스의 대제단은 헬레니즘 건축물의 백미로 꼽히며,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은 독일을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코스가 됐습니다.

    페르가몬은 그리스의 한 지방으로, 현재는 터키에 속해 있으며 터키인은 베르가마라고 부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이 세운 페르가몬 왕국은 로마와 아시아를 잇는 교통로에 있어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우며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남겼습니다. 19세기 제국주의시대에 독일은 터키에 발굴단을 파견해 제우스의 대제단 같은 페르가몬 유적들을 통째로 가져다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 밖에 ‘밀레투스 시장의 문’ ‘이슈타르의 문’ ‘무샤타의 궁전’ 등 많은 볼거리를 소장하고 있어 페르가몬 박물관은 독일 여행의 필수 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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