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0

2018.05.30

황승경의 on the stage

강요된 이타심은 善일까

연극 ‘피와 씨앗’

  • 입력2018-05-29 16: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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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고장 난 기차가 인부 5명을 향해 맹렬히 달리고 있다. 내 앞에 철로 변경 스위치가 있고, 그 스위치를 누르면 기차는 다른 철로로 진입해 인부 1명만 덮치게 된다. 스위치를 눌러 5명을 구할 것인가. 그 순간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결정이 어려우면 다른 가정을 해보자. 인부가 아니라 어린이 5명이 놀고 있고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아이들을 구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위치를 눌러 어린이 5명 대신 어른 1명을 희생시키는 게 나을지 고심할 것이다. 그런데 그 1명이 자신의 아내를 처참하게 살인한 범죄자라면 대다수 사람은 스위치 누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테다. 

    이 가정은 영국의 촉망받는 작가 겸 연출가 롭 드러먼드(32)가 연극 ‘피와 씨앗’의 작가 노트에 적은 ‘트롤리 딜레마’의 윤리적 사고 실험 일부분이다. 트롤리 딜레마는 고장 난 트롤리 상황을 제시하고 다수를 구하고자 소수를 희생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게 하는 윤리학 사고 실험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언급돼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다. 드러먼드는 ‘피와 씨앗’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더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선과 악, 윤리, 종교, 도덕의 애매한 경계와 한계를 묻는다. 그리고 타인을 향한 우리의 선악 기준이 과연 정의롭고 정당한지에 대해서도 묻는다. 

    주술적 의식을 행하다 만삭의 아내를 살인한 죄로 복역하던 아이작(이기현 분)은 감찰보호관 버트(안병식 분)와 함께 12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가 죽음 직전 출산한 자신의 딸 어텀(최성은 분)은 소녀가 돼 있고, 자신이 쓰던 방은 처형 바이올렛(박지아 분)의 방이 됐다. 안타깝게도 어텀은 신장병을 앓고 있고, 할머니 소피아(강명주·우미화 분)는 손녀의 장기 공여자를 애타게 찾고 있다. 어텀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아이작뿐이지만 아이작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한다. 결국 장기 이식을 놓고 갈등은 극단을 향해 내달리고, 이타심을 강요하는 소피아와 바이올렛의 행동은 폭력으로 치닫는다. 무엇이 선(善)한 행동일까. 소피아의 선택을 바라보는 관객은 딜레마에 빠진다. 

    연출자 전인철은 세련된 전방위적 영상기법으로 인물의 갈등을 섬세하게 응축한다. 전인철 특유의 수려한 시각적 무대언어를 통해 관객은 윤리의 틈에 서서 선악의 조각과 파편을 마주한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자극적인 일상에 빠져 인간 본연의 성찰을 잊어버렸는지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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