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5

2017.11.29

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보통 사람의 이유 있는, 그러나 비합리적인 선택

행동경제학 관점으로 톺아본 신고리원전 5, 6호기 공론화 과정

  • 입력2017-11-28 15:5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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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울주군 새울원자력본부 내
신고리원전 5, 6호기 건설 현장.[동아일보]

    울산 울주군 새울원자력본부 내 신고리원전 5, 6호기 건설 현장.[동아일보]

    10월 9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리처드 탈러(세일러)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연이 있다. 이 전 대통령이 그의 책 ‘넛지’(리더스북)를 2009년 여름 휴가지로 가져가면서 유례없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전 대통령이 행동경제학의 값진 통찰로 가득한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배웠는지는 미지수다. ‘넛지’를 읽은 국내 많은 독자가 이 책에서 무엇을 배웠을지에 대한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단적인 예로 사람들이 행동경제학으로부터 배운 바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문재인 정부가 신고리원전 5, 6호기 공사 중단 여부를 놓고 실시한 공론화 과정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극단 기피 | 왜 중간 가격 요리가 잘 팔릴까

    신고리 5, 6호기 공사를 둘러싼 공론화 과정을 행동경제학 시각에서 음미해보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준 것은 고학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그는 행동경제학의 통찰 가운데 하나인 ‘극단 기피(extremeness aversion)’를 언급하며, 공론화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대다수 사람은 의사 결정을 할 때 가급적 극단적인 선택을 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극단 기피). 이런 성향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곳이 바로 식당이다. 예를 들어 2만 원, 4만 원, 6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파는 식당이 있다면 매출이 가장 많은 요리는 4만 원짜리일 공산이 크다. 고객 열 명 가운데 여덟은 두 번째를 선택할 테니까.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신고리 5, 6호기 공사를 놓고 공론화위원회가 참여 시민에게 제시한 선택지는 문제가 있다. 공론화위원회는 참여 시민에게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 여부(A)만 묻지 않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찬반(B)도 함께 물었다. 본의 아니게 극단 기피를 부추기는 선택지를 제공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마지막까지 남은 시민 471명은 극단(A-O/B-O 혹은 A-X/B-X) 대신 중간(A-X/B-O)을 택했다. 신고리 5, 6호기 공사 재개를 간절히 바라는 원자력 산업계와 (이미 보상금을 받은) 지역 주민의 절박한 호소에 응하면서(A-X),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도 지지를 보내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B-O). 만약 둘 가운데 하나만 물었더라면 471명의 선택이 어땠을까.




    손실 기피 | 일단 손에 쥐면 잃기 싫다

    10월 13일 오후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시민참여단 종합토론회가 열린 충남 천안시 교보생명 연수
원(왼쪽)과 행동경제학의 다양한 통찰이 담긴 책 ‘넛지’ 표지.[뉴시스]

    10월 13일 오후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시민참여단 종합토론회가 열린 충남 천안시 교보생명 연수 원(왼쪽)과 행동경제학의 다양한 통찰이 담긴 책 ‘넛지’ 표지.[뉴시스]

    행동경제학의 또 다른 통찰 가운데 하나는 ‘손실 기피(loss aversion)’다. 보통 사람 다수는 미래의 기대 이익이 클지라도 그보다 적은, 당장 손에 쥐고 있는 이익을 취하는 경향을 보인다. 탈러 교수에 따르면 사람은 일단 싸구려라도 자기 손에 쥔 것에 실제보다 2배 이상 가치를 매긴다. 

    이와 관련한 실험이 있다.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 절반에게 대학 심벌이 찍힌 머그잔을 나눠준다. 컵을 못 받은 학생에게는 옆 학생이 가진 머그잔을 살펴보라고 요구한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가진 학생에게는 머그잔을 팔고, 머그잔이 없는 학생에게는 머그잔을 사라고 지시한다. 그러고 나서 묻는다. “가격이 어느 정도면 기꺼이 머그잔을 판매 혹은 구매할 것인가.” 

    이때 머그잔을 가진 학생은 머그잔이 없는 학생이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가격의 2배를 원했다. 똑같은 실험을 수십 번 실시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일단 손에 쥔 머그잔을 포기해야 할 때 느끼는 상실감은 똑같은 것을 얻을 때의 만족보다 2배나 큰 것이다. 

    그렇다면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과정은 어땠을까. 공론화 과정에서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을 주장하는 측(반핵)은 재생 가능 에너지 산업이 제공할 장밋빛 미래를 시민에게 제시했다. 덴마크, 독일처럼 이 작업에 어느 정도 성공한 외국 사례를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다. 참여 시민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왜 자꾸 외국 얘기만 하세요.” 

    반면 신고리 5, 6호기 공사 재개를 주장하는 측(찬핵)은 사람들이 당장 손에 쥐고 있는, 그래서 공사를 중단할 경우 잃게 될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줬다. 핵발전소가 제공하는 전력, (과장이 약간 섞인 걸 감안하더라도) 외국 수출 얘기가 오갈 정도로 상당한 경쟁력을 갖춘 핵발전소 기술, 이미 공사가 20%가량 진행된 신고리 5, 6호기 현황 등. 

    똑같이 먹고사는 얘기를 하는데 한쪽은 ‘지금의 손실’을 언급하고, 다른 한쪽은 ‘미래의 이득’을 말했다. 더구나 시민 471명 가운데 과반수는 어쩔 수 없이 ‘미래’보다 ‘오늘’에 관심이 많은 50대 이상이었다. 만약 공사 중단을 주장하는 측이 시민에게 신고리 5, 6호기 건설로 당장 잃을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면 결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매몰 비용의 오류 | 재미없는 영화도 꾹 참고 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 이미 설명했듯이 신고리 5, 6호기 공사 재개를 주장하는 측은 20%가량 진행된 건설 현황과 그 과정에 들어간 비용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매몰 비용이 이렇게 많은데 공사를 중단하다니’라는 이 주장은 시민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바로 ‘매몰 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를 부추긴 것이다.

    1만 원을 내고 극장에 가서 30분쯤 관람했는데 도무지 영화가 취향에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이때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봐야 할까. 끝까지 본다면 그게 바로 매몰 비용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선택할 때는 오직 앞으로의 비용과 편익만 따져야 한다. 손실을 메우겠다고 더 큰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매몰 비용의 오류는 전사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며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은 이렇게 경고했다. 그런데 공론화 과정 내내 이런 매몰 비용의 오류를 정부도, 언론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교정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행동경제학은 보통 사람의 선택이 항상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한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보통 사람은 오류(매몰 비용의 오류)와 편견(극단 기피, 손실 기피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당장 핵발전소 인근인 경북 포항시에서 지진이 난 지금 똑같은 질문을 같은 시민에게 던진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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