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사기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과거 어눌한 조선족 억양으로 전화를 걸어 개인 금융정보를 요구했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검사를 사칭하고 사건번호와 금융거래법을 운운하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개인 금융정보를 빼내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4월 초 기자의 휴대전화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팀 김지훈 수사관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기자의 정확한 생년월일과 이름을 물으며 본인 확인부터 했고, 이어 “보이스피싱 전화로 의심받아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당신 명의 계좌가 범죄조직의 금융사기에 연루돼 피해자인지 가해지인지 수사해야 하니 협조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면 전화를 끊고 서울중앙지검으로 전화를 걸어 자기 이름을 찾아보라고까지 말했다.
스스로 팀장 검사라며 수사 협조 요구
기자는 일단 가해자라는 누명을 벗고자 수사에 협조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으리라 보고 전화통화를 이어갔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긴급하게 수사 협조를 요청했던 자칭 김지훈 수사관은 사건 경위부터 설명했다. 그는 “전남 광주 출신 42세 김동일이라는 남성과 그 일당 28명이 당신 이름으로 2013년 8월 경기 광명시 철산동에서 농협과 하나은행 통장을 개설해 이 계좌로 5000만 원 상당의 불법자금을 거래한 사실이 드러났다. 김동일 일당은 2014년 12월 30일 검거됐으며 현장에서 대포통장과 복제된 보안카드, 신용카드까지 발견돼 압수 처리했고, 당신 명의의 농협과 하나은행 통장도 즉시 동결 처리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건번호를 불러주며 그는 “수사를 지휘하는 팀장 검사와 전화연결을 할 것이니 본인이 피해자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된다”고 말했다.
전화를 돌려받은 여성은 똑 부러진 표준어를 구사했다. 그는 자신을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팀 팀장인 정은혜 검사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좀 더 구체적인 사건 정황을 설명했는데 그는 “김동일 일당이 인터넷 쇼핑사이트 옥션, 11번가, G마켓 등에 당신 이름을 판매자로 등록하고 저가 항공권, 고가 명품백들을 판매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 62명에게서 돈을 받고 물건을 발송하지 않아 피해자 62명이 당신을 고소·고발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일주일 안으로 피해자라는 것을 입증받지 못하면 다음 주에 있을 김동일 재판에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 참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스로 팀장 검사라고 말하는 이가 ‘재판’ ‘피해자 입증’ ‘고소’ 등의 단어를 막힘없이 꺼내며 수사 협조를 재차 요구하자 보이스피싱이라는 의심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라는 누명을 빨리 벗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검사라는 이는 “이번 사건은 단순한 명의 도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은행 적금과 예금을 해약해 해외로 자금을 빼돌린 사실까지 확인됐다”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그러자 기자가 최근 만기 해지한 보험금을 은행 예금에 옮겨놓은 것이 떠오르며 간담이 서늘해졌다.
해당 검사라는 사람은 계속해서 최대한 빨리 피해자 입증을 받아야 혐의를 벗고, 고소·고발 건도 자동으로 취하된다고 몰아갔다. 만약 조사 과정에서 금전적 피해 사실이 입증되면 금융감독원 재산보호 신청서를 통해 국가에서 보상 처리를 해준다고 조언도 했다. 그러나 “김동일 일당과 금전적 거래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통장 불법거래로 금융거래법 제49조 3항 1호 및 2호에 따라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고 엄포를 놓았다.
계속되는 통화에서 그는 기자가 사용하는 주거래 은행과 통장 예·적금 상태를 물었다. 김동일 일당이 거래한 불법자금과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의심은 됐지만 힘들게 모은 돈이 날아갈까 봐 은행별 보유 금액을 친절히 설명했다. 이어 그는 “컴퓨터를 통해 공문을 열람하게 해줄 것이라며 공유컴퓨터가 아닌 개인컴퓨터를 통해 내가 불러주는 인터넷 주소로 접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고, 걸려온 번호로 다시 걸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 흘러나왔다.
괜찮다는 은행, 수사 어렵다는 경찰
불안감에 곧장 주거래 은행으로 향했다.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고 염려되니 보유 현금을 모두 인출해 다른 계좌로 옮기겠다고 했다. 창구 직원은 “예·적금의 경우 전화로 본인 확인, 보안카드 입력 등 해약 절차가
2중으로 돼 있어 돈이 저절로 빠져나갈 리 없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보안카드를 다시 발급받는 편이 안전하다고 설명해 그 자리에서 보안카드만 다시 발급받았다.
생애 첫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터라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보이스피싱’ 단어를 입력해 검색해봤다. 기자와 비슷한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이들의 최신 피해 사례가 각종 블로그와 카페에 올라와 있었다. 이름만 다를 뿐 수법은 같았다. 개중에는 지시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계좌번호와 보안카드 등을 포함한 개인정보를 모두 입력하는 바람에 보이스피싱 일당이 제2금융권에서 2000만 원가량을 대출받아 대신 빚을 떠안게 됐다는 이도 있었다.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에 신고하려고 전화하니 주거 지역 경찰서 지능수사팀으로 전화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울 종로경찰서 지능수사팀에 전화를 걸자 담당 경찰관은 휴대전화로 걸려온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수사를 진행할 것인지 문의하자 “전화번호만으로는 수사가 어렵다”며 “만약 돈을 다른 계좌로 송금하는 피해를 입었다면 계좌번호를 가지고 수사를 진행하는데 그것도 대부분 다른 사람 명의로 개설한 통장이기 때문에 범죄 일당을 검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검거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피해자가 경찰과 은행에 즉시 신고해 은행직원의 신고로 경찰이 현장에서 자금을 인출하려는 범죄 일당을 잡는 것이고 그마저도 운이 좋아야 잡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해당 경찰관은 “수사를 요청하고 싶으면 해당 경찰서로 찾아와 진정서를 접수하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금융감독원에도 신고하려고 대표전화 1332로 전화를 걸었다. 보이스피싱 내용을 말하자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걸려온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금융감독원에서 조사를 진행하느냐고 묻자 앞선 경찰과의 통화처럼 전화번호만으로는 조사가 어렵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말에 분통이 터졌다.
아직까지 전국적으로 보이스피싱 범죄가 판을 치고 있지만 경찰은 피해를 입지 않으면 수사에 나서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사후약방문’ 형식의 수사만 하고 있으니 보이스피싱 범죄가 근절될 리 없다. 그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금융감독원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보이스피싱 방지 사이트 ‘보이스피싱 지킴이(http://phishingkeeper.fss.co.kr)’. 이 사이트에는 표어로 ‘피싱사기 피해, 예방만이 최선의 방법입니다’라고 명시돼 있고, 피싱 사기 개요와 피해 예방 동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어디에도 보이스피싱 범죄 근절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을 기점으로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정교한 수법으로 발전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당국의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피해자가 발생한 뒤 범죄단 검거에 나서는 방식으로는 보이스피싱을 뿌리 뽑을 수 없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일어나기 전 잡을 수 있는 예방책을 지금이라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 누군가는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4월 초 기자의 휴대전화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팀 김지훈 수사관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기자의 정확한 생년월일과 이름을 물으며 본인 확인부터 했고, 이어 “보이스피싱 전화로 의심받아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당신 명의 계좌가 범죄조직의 금융사기에 연루돼 피해자인지 가해지인지 수사해야 하니 협조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면 전화를 끊고 서울중앙지검으로 전화를 걸어 자기 이름을 찾아보라고까지 말했다.
스스로 팀장 검사라며 수사 협조 요구
기자는 일단 가해자라는 누명을 벗고자 수사에 협조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으리라 보고 전화통화를 이어갔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긴급하게 수사 협조를 요청했던 자칭 김지훈 수사관은 사건 경위부터 설명했다. 그는 “전남 광주 출신 42세 김동일이라는 남성과 그 일당 28명이 당신 이름으로 2013년 8월 경기 광명시 철산동에서 농협과 하나은행 통장을 개설해 이 계좌로 5000만 원 상당의 불법자금을 거래한 사실이 드러났다. 김동일 일당은 2014년 12월 30일 검거됐으며 현장에서 대포통장과 복제된 보안카드, 신용카드까지 발견돼 압수 처리했고, 당신 명의의 농협과 하나은행 통장도 즉시 동결 처리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건번호를 불러주며 그는 “수사를 지휘하는 팀장 검사와 전화연결을 할 것이니 본인이 피해자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된다”고 말했다.
전화를 돌려받은 여성은 똑 부러진 표준어를 구사했다. 그는 자신을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팀 팀장인 정은혜 검사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좀 더 구체적인 사건 정황을 설명했는데 그는 “김동일 일당이 인터넷 쇼핑사이트 옥션, 11번가, G마켓 등에 당신 이름을 판매자로 등록하고 저가 항공권, 고가 명품백들을 판매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 62명에게서 돈을 받고 물건을 발송하지 않아 피해자 62명이 당신을 고소·고발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일주일 안으로 피해자라는 것을 입증받지 못하면 다음 주에 있을 김동일 재판에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 참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스로 팀장 검사라고 말하는 이가 ‘재판’ ‘피해자 입증’ ‘고소’ 등의 단어를 막힘없이 꺼내며 수사 협조를 재차 요구하자 보이스피싱이라는 의심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라는 누명을 빨리 벗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검사라는 이는 “이번 사건은 단순한 명의 도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은행 적금과 예금을 해약해 해외로 자금을 빼돌린 사실까지 확인됐다”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그러자 기자가 최근 만기 해지한 보험금을 은행 예금에 옮겨놓은 것이 떠오르며 간담이 서늘해졌다.
해당 검사라는 사람은 계속해서 최대한 빨리 피해자 입증을 받아야 혐의를 벗고, 고소·고발 건도 자동으로 취하된다고 몰아갔다. 만약 조사 과정에서 금전적 피해 사실이 입증되면 금융감독원 재산보호 신청서를 통해 국가에서 보상 처리를 해준다고 조언도 했다. 그러나 “김동일 일당과 금전적 거래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통장 불법거래로 금융거래법 제49조 3항 1호 및 2호에 따라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고 엄포를 놓았다.
계속되는 통화에서 그는 기자가 사용하는 주거래 은행과 통장 예·적금 상태를 물었다. 김동일 일당이 거래한 불법자금과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의심은 됐지만 힘들게 모은 돈이 날아갈까 봐 은행별 보유 금액을 친절히 설명했다. 이어 그는 “컴퓨터를 통해 공문을 열람하게 해줄 것이라며 공유컴퓨터가 아닌 개인컴퓨터를 통해 내가 불러주는 인터넷 주소로 접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고, 걸려온 번호로 다시 걸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 흘러나왔다.
괜찮다는 은행, 수사 어렵다는 경찰
KB국민은행 금융사기 안내 홍보 웹툰에 최근 기자가 당한 보이스피싱 사례가 최신 범죄 유형으로 소개돼 있다.
2중으로 돼 있어 돈이 저절로 빠져나갈 리 없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보안카드를 다시 발급받는 편이 안전하다고 설명해 그 자리에서 보안카드만 다시 발급받았다.
생애 첫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터라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보이스피싱’ 단어를 입력해 검색해봤다. 기자와 비슷한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이들의 최신 피해 사례가 각종 블로그와 카페에 올라와 있었다. 이름만 다를 뿐 수법은 같았다. 개중에는 지시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계좌번호와 보안카드 등을 포함한 개인정보를 모두 입력하는 바람에 보이스피싱 일당이 제2금융권에서 2000만 원가량을 대출받아 대신 빚을 떠안게 됐다는 이도 있었다.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에 신고하려고 전화하니 주거 지역 경찰서 지능수사팀으로 전화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울 종로경찰서 지능수사팀에 전화를 걸자 담당 경찰관은 휴대전화로 걸려온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수사를 진행할 것인지 문의하자 “전화번호만으로는 수사가 어렵다”며 “만약 돈을 다른 계좌로 송금하는 피해를 입었다면 계좌번호를 가지고 수사를 진행하는데 그것도 대부분 다른 사람 명의로 개설한 통장이기 때문에 범죄 일당을 검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검거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피해자가 경찰과 은행에 즉시 신고해 은행직원의 신고로 경찰이 현장에서 자금을 인출하려는 범죄 일당을 잡는 것이고 그마저도 운이 좋아야 잡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해당 경찰관은 “수사를 요청하고 싶으면 해당 경찰서로 찾아와 진정서를 접수하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금융감독원에도 신고하려고 대표전화 1332로 전화를 걸었다. 보이스피싱 내용을 말하자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걸려온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금융감독원에서 조사를 진행하느냐고 묻자 앞선 경찰과의 통화처럼 전화번호만으로는 조사가 어렵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말에 분통이 터졌다.
아직까지 전국적으로 보이스피싱 범죄가 판을 치고 있지만 경찰은 피해를 입지 않으면 수사에 나서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사후약방문’ 형식의 수사만 하고 있으니 보이스피싱 범죄가 근절될 리 없다. 그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금융감독원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보이스피싱 방지 사이트 ‘보이스피싱 지킴이(http://phishingkeeper.fss.co.kr)’. 이 사이트에는 표어로 ‘피싱사기 피해, 예방만이 최선의 방법입니다’라고 명시돼 있고, 피싱 사기 개요와 피해 예방 동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어디에도 보이스피싱 범죄 근절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을 기점으로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정교한 수법으로 발전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당국의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피해자가 발생한 뒤 범죄단 검거에 나서는 방식으로는 보이스피싱을 뿌리 뽑을 수 없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일어나기 전 잡을 수 있는 예방책을 지금이라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 누군가는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