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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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돈’ ‘숨은 돈’ 홍콩·싱가포르로

무너지는 스위스은행 비밀주의, 반사이익 얻는 아시아

  • 안성학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 shahn0330@hanafn.com

    입력2015-03-16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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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밝은 독자라면 몇 주 전 세계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스위스 제네바 소재 HSBC 프라이빗뱅킹(PB)센터의 비밀계좌 스캔들을 기억할 것이다. 퇴직한 은행원이 들고 나온 10만여 명의 은밀한 고객정보가 각국 사법당국의 초미 관심사로 떠올랐던 사건이다. 각 나라 유력 정치인과 중동 왕족, 팝가수와 연예계 인사 등이 엄청난 돈을 은닉하고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폭로되면서 일정 금액 이상을 예치한 예금주는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로 된 계좌만으로 입출금이 가능한 스위스은행의 비밀주의가 다시 한 번 도마에 올랐다.

    실제로 최근 스위스를 비롯한 룩셈부르크, 홍콩, 싱가포르 등 주요 글로벌 자산관리 지역의 해외자금 유치 규모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에서 벗어나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얼마 전 회계법인 전문업체 딜로이트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글로벌 자산관리 지역의 해외자금 유치 규모는 지난해 말 9조2000억 달러로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인 2008년 말 9조 달러를 넘어섰다. 유로존 재정위기로 2011년 8조2000억 달러까지 감소했던 해외자금 유치 규모가 이후 지속적인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운명을 가른 2012년

    이 같은 회복세에는 여러 원인이 작용했다. 먼저 세계 금융시장의 회복과 경제 성장, 고액자산가의 증가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빠른 경제 성장과 전 세계적인 소득 양극화는 고액자산가를 많이 양산했다.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와 컨설팅업체 캡제미니가 매년 발간하는 ‘세계 부 리포트(World Wealth Report)’에 따르면 100만 달러 이상의 고액자산가 수는 2008년 860만 명에서 2013년 1370만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관리 지역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스위스는 이어지는 논란에도 외견상 세계 최대 자산관리국이라는 위상을 지키고 있다. 2014년 말 기준 해외자금 유치 규모는 2조4000억 달러. 전체의 5분의 1을 넘는 수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에 비해 약 14% 증가했다. 그러나 2012년 이후로 기간을 좁혀보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2012년 말 유치 규모 2조1000억 달러 수준에서 크게 변함이 없는 것. 증가세가 꺾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는 유로존 경제위기의 심화와 글로벌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위기가 지속되면서 유럽 지역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기피 현상이 가시화하는 한편, 미국의 압력에 의해 스위스은행의 비밀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 결정타를 날린 셈. 미국이 도입한 해외금융계좌신고법(FATCA)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자간 조세정보자동교환협정 등 최근 수년 사이 등장한 강력한 규제장치가 글로벌 자산관리 지역으로 명성을 떨치던 유럽 지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위스뿐 아니라 채널 제도,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등 유럽 조세회피 지역 모두가 마찬가지다.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곳은 홍콩과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이다. 유럽 지역에 비해 해외자금 유입이 큰 폭으로 늘면서 글로벌 자산관리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는 것. 기존 유럽 자산관리 지역의 평판이 무너지고 법률적 불확실성이 증가하자 이들 지역이 새로운 피난처로 떠오르는 셈이다.

    실제로 홍콩과 싱가포르의 해외자금 유치 규모는 공교롭게도 스위스의 성장세가 꺾인 2012년 이후 큰 폭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말 기준 홍콩과 싱가포르의 총 해외자금 유치 규모는 각각 6400억 달러와 4700억 달러. 스위스에 비하면 아직은 적은 규모지만 2012년에 비해 각각 48.8%, 30.6% 증가했다. 주요 글로벌 자산관리 지역 가운데 가장 빠른 증가율이다.

    ‘아시아 1위’ 둘러싼 경쟁

    이들 지역의 성장은 중국, 인도네시아 등 대규모 자금을 맡기는 아시아 고액자산가의 증가와도 관련 깊은 것으로 풀이된다. 홍콩은 중국 등 동북아 지역의 자산가,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 자산가의 자금 유입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홍콩과 싱가포르가 동북아와 동남아의 금융 중심지로서 상호 보완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요인과 함께 그간 홍콩과 싱가포르가 자산관리 중심지로 발돋움하려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 나라는 아시아 금융허브를 구축한다는 목표 아래 거센 경쟁을 벌여왔다. 싱가포르 1위 은행인 DBS(싱가포르개발은행)는 지난해 자산관리 부문을 강화하고자 프랑스 시중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로부터 싱가포르 및 홍콩 지역 PB사업 부문을 2억 달러에 매입한 바 있다.

    홍콩은 최근 부동산값 폭등과 민주화시위로 싱가포르에 반사이익을 안겨주긴 했지만, 해외자산 유입 규모로 따지면 여전히 아시아 최고의 자산관리 중심지다. 2008년만 해도 홍콩의 자금 유치 규모는 싱가포르에 미치지 못했지만, 2012년 싱가포르를 추월한 이후 격차를 벌여나가고 있다. 금융당국의 정책과 민간 부문의 노력이 이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도 홍콩과 싱가포르로 향하는 고액자산가의 자금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홍콩은 중국 부유층이라는 충성도 높은 고객층이 있고, 싱가포르는 안정된 정권과 투명한 법률 시스템, 오래된 투자유치 역사가 강점이다. 여기에 제네바 소재 HSBC PB센터의 탈세 스캔들이 겹치면서 유럽의 관련 규제는 강화되고 거꾸로 익명성을 원하는 투자자들의 불신은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유럽 주요 조세피난처들의 흔들리는 입지야말로 이러한 전망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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