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팔치아니 리스트’를 공개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ICIJ) 인터넷 홈페이지.
2008년 팔치아니는 이 고객정보를 레바논 은행들에 팔아넘기려다 스위스 경찰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이후 고국 프랑스로 피신해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그는 프랑스 정부에 고객정보를 넘긴다. 당시 스위스 정부는 산업스파이 및 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그를 추적하던 상황. 그러나 그의 고객정보를 높이 평가한 프랑스는 스위스 정부의 범죄인 인도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프랑스 사법당국은 팔치아니가 넘긴 정보를 분석해 탈세 혐의자를 골라 ‘팔치아니 리스트’를 작성했다. 이게 2010년 일이다. 이후 프랑스 정부는 미국과 스페인, 그리스, 벨기에, 아르헨티나 정부와 자료를 공유하며 대규모 탈세 조사에 들어갔다. 현지 언론은 팔치아니를 ‘부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남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2월 8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이날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팔치아니 리스트를 입수해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스위스은행 고객정보 유출(스위스 리크스·Swiss Leaks)’이란 제목으로 공개된 이 자료에는 HSBC 제네바 PB센터의 탈법 영업과 탈세가 의심되는 고객정보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HSBC 제네바 PB센터가 전 세계 권력자와 부자들의 돈을 비밀리에 관리해주면서 탈세 컨설팅까지 적극적으로 한 사실도 드러났다.
장관, 왕, 공주, 기업가 …
ICIJ는 “1988∼2007년 HSBC 제네바 PB센터의 전 세계 203개국, 10만6000명의 고객정보를 입수했다”며 “이들이 예치한 금액만 총 1000억 달러를 웃돌 것”이라고 추정했다. 명단에는 영국, 러시아, 인도, 멕시코 등의 전·현직 정치인 6만여 명이 포함됐다. 영국 BBC는 “ICIJ 자료를 분석한 프랑스 당국이 자료에 등장한 99.8%의 고객이 탈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보도했다. 팔치아니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에 발표된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HSBC는 1999년 스위스 제네바의 한 PB 은행을 인수해 자사의 PB센터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PB센터는 본사의 통제를 크게 받지 않으면서 제네바에 있는 다른 스위스 은행처럼 철저하게 비밀주의를 준수했다. 2007년 기준으로 이 센터가 운용한 금융자산은 3만412개 계좌, 780억 파운드(약 130조5000억 원)에 달한다.
고객 국적은 스위스가 312억 달러로 가장 많고 영국(217억 달러), 베네수엘라(147억 달러), 미국(133억 달러), 프랑스(125억 달러) 순이었다. 한국 국적의 개인과 한국 법인도 20개 계좌를 보유했고, 2130만 달러를 예치했다.
팔치아니 리스트는 일부만 살펴봐도 화려하다. 중동 지역 국왕들을 비롯해 각국 권력자와 가까운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30년 독재 이후 ‘아랍의 봄’을 가져온 무하마드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 측근인 라시드 무하마드 라시드 전 통상산업부 장관 계좌에만 3100만 달러가 남아 있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광산재벌 압둘 카림 단 아주미의 계좌에는 46만7592달러가 있었다. 리펑 전 중국 총리의 딸 리샤오린의 계좌에는 248만 달러가 예치돼 있었다. 성직자도 예외가 아니다. 아르메니아의 카레킨 2세 총대주교는 110만 달러를 가지고 있었다.
중동 군주들은 오랜 단골이었다. 현재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전쟁 중인 압둘라 2세 이븐 알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4180만 달러를 예치했다. 카부스 빈 알사이드 오만 국왕은 1974년부터 계좌를 갖고 있었고, 4460만 달러를 맡겼다. 모하메드 6세 모로코 국왕도 910만 달러를 예치해두었다.
공주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에파트대 부이사장인 롤로와 알파이살 알사우드 공주는 케이맨 제도에 본사를 둔 펄엔터프라이즈 명의로 175만 달러를 예치했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니나리치의 상속녀인 아를레트 리치는 파나마에 본사를 둔 파리타 콤파니아 피난시에라라는 회사명의 계좌를 포함해 총 3개 계좌에 2440만 달러를 맡겼다.
ICIJ 보도에 따르면 이 은행은 일부 고객과 결탁해 본국 정부에 신고하지 않은 ‘검은계좌’를 숨겼으며 국제적인 범죄자, 부패한 기업가, 위험한 개인에게도 계좌를 제공했다. 기니 국방부는 카텍스 광물회사를 통해 라이베리아 반군에 무기를 팔았다. 카텍스 광물회사의 계좌에는 714만 달러가 예치돼 있었다. 라이베리아 반군에게 팔린 무기는 숱한 생명을 앗았다.
은행은 또 고객의 탈세 행위에 눈을 감은 정도가 아니라, 내야 할 세금을 물지 않도록 고객에게 탈세 정보를 제공했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해외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해당 기업 계좌로 예금할 수 있도록 도왔고, 강화된 세법을 피해가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무너지는 스위스 은행 비밀주의
10만6000여 명에 달하는 HSBC 제네바 프라이빗뱅킹 센터의 비밀계좌 고객 리스트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에르베 팔치아니.
팔치아니 리스트 공개로 가장 궁지에 몰린 곳은 80년 이상 고객 비밀주의를 고수해온 스위스 은행들이다. 스위스는 1934년 은행 비밀법을 제정해 10만 프랑(약 1억2000만 원) 이상을 예치하는 예금주는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로 된 계좌만으로 입출금이나 거래명세서 작성이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비밀주의를 포기하라는 압력을 가해왔고, 결국 스위스 정부는 지난 1월 외국 조세당국이 관심을 가질 만한 계좌정보를 발견하면 이를 ‘자발적으로’ 통보하는 내용의 법 초안을 공개한 바 있다. 비밀계좌 제도 또한 이르면 2018년 폐지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