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관님, 회의를 빨리 끝내셔야겠습니다. 짐을 빨리 싸셔야 할 것 같아요. 조금 있다가 후임이 발표된답니다.”
2014년 7월 24일 아침, 이복실(54·사진) 당시 여성부 차관은 하루 업무의 시작으로 실·국장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불쑥 들어온 비서관이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1984년 제28회 행정고등고시(행시)에 합격해 공직에 들어선 지 30년 만에 공무원으로서의 커리어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감상에 젖을 틈도 없었다. 즉시 회의를 매듭짓고 인수인계 사항을 정리한 뒤 짐을 꾸려야 했다.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떠나게 된 것에 대해 이 전 차관은 “정무직 공무원의 숙명”이라고 했다. “차관에 임명된 사실도 평소처럼 일하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는 것이다. 그날 최선을 다해 새로운 업무에 뛰어들었듯, 또 한 번 주어진 상황에 충실해야 했다.
“돌아보면 그 하루가 이전 어느 때보다 바빴던 것 같아요.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끝이라는 걸 실감했죠. 그러자 딸 얼굴이 떠올랐어요.”
커리어와 육아의 딜레마, 양가 어머니의 뒷바라지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두 딸. 늘 바쁜 일상 때문에 밥 한 번 제대로 차려주지 못했는데 제 할 일 꿋꿋이 잘해내고, 오히려 엄마 걱정까지 해주는 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라도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비행기 표를 끊어 들었다. ‘개인 이복실’로의 새로운 삶을 그렇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딸한테 갔어요. 거기서 한동안 정말 그냥 엄마로, 아이 아침밥 먹여 학교 보내고 돌아오면 또 저녁밥 차려주면서 같이 지냈죠.”
낮 시간에는 동네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 처음엔 공직에 있는 동안 경험한 것들을 정리하겠다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옛일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이야기, 또 우리 가족 이야기가 하나 둘 풀려 나오더군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드물던 1980년대 ‘내 일을 갖고 싶어’ 고시에 도전했던 기억, 대학 졸업과 동시에 여성으로는 사상 네 번째로 행시에 합격했던 순간, 결혼 후 한 달 만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남편 때문에 졸지에 ‘싱글맘’이 돼 두 딸과 함께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 추억은 인생의 둔덕과 계곡을 가로질러 뻗어갔고, 그는 홀로 울고 웃으며 비로소 인생의 한 장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결과물이 최근 펴낸 에세이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카모마일북스)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이잖아요. 글쓰기가 참 좋은 자기 치유법이라는 걸 이번에 알았어요. 완성된 글은 멋진 소통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요. 원고를 마무리한 뒤 가장 먼저 남편한테 보여줬는데 ‘당신이 그동안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지 몰랐다. 정말 고생했다’고 하더군요.”
책 출간이 결정됐을 때 제목을 지어준 것도 남편이었다. 대학 3년 선배로 이 전 차관을 30년 넘게 지켜봐온 남편은 “당신 이야기 안에는 사회에서 성공하고 싶은 ‘여자’의 마음과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엄마’ 마음이 다 담겨 있다. 지금 그 딜레마를 풀지 못해 고민하는 워킹맘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이 전 차관도 무릎을 쳤다. 돌아보면 자신의 삶이 꼭 그랬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양가 어른이 안 계셨다면 저는 아무 일도 못 했을 거예요. 결혼식을 하고 남편이 바로 미국으로 떠나기로 예정돼 있었어요. 그런데 허니문 베이비가 생긴 거죠.”
당시엔 출산휴가가 두 달에 불과했다. 다시 출근해야 할 때가 다가오자 양가 어머니는 ‘우리가 도울 테니 걱정 말고 일하라’며 용기를 북돋워줬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핏덩이를 안고 며칠은 친정, 며칠은 시가에 머무는 생활이 시작됐다. 이 전 차관은 “어른들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큰딸을 유아원에 맡겼다가 뒤늦게 그곳 환경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가슴을 친 일도 있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아이는 그곳에서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다. 발을 동동 굴러도 방법이 없었다. 볼거리(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려 끙끙 앓는 딸을 안고 밤새 씨름하다 아침이 돼 다시 출근복을 챙겨 입으며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자문한 날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일을 계속했던 건,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게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또 공무원으로서 우리 딸들이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나아지게 만들어야겠다는 결심도 했고요.”
‘최초의 여성 차관’을 뒤로하고
교육부 행정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그는 1994년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정무 2장관실에 합류하며 여성 정책과 인연을 맺었다. 2013년 여성가족부 출범 이후 최초의 여성 차관으로 임명돼 이듬해 퇴임하기까지, 줄곧 관련 업무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잊지 않았다고 했다. 일하는 여성의 보육 문제 해결에 역점을 뒀다. 그것이 여성뿐 아니라 자녀를 포함한 가족 전체, 특히 여성의 배우자인 남성에게도 매우 필요한 정책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 차관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보육정책국장으로 일하며 전국 보육시설 3만3000여 곳을 관리 감독하는 ‘보육시설 평가인증제도’와 보육교사 국가자격증 제도를 도입하는 등 현행 보육 체계를 세우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그가 바라는 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다. 성희롱 예방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관련 정책을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 최대한 꼼꼼히 문제를 설명해준다. “나쁜 의도가 없는데도 뭐가 문제인지 몰라 성희롱 가해자가 되는 남성만큼은 없도록” 하고 싶어서다. 3월부터는 숙명여대 가족자원경영학과 강단에 서고, 그간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도 또 쓸 계획이다.
2014년 7월 24일 아침, 이복실(54·사진) 당시 여성부 차관은 하루 업무의 시작으로 실·국장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불쑥 들어온 비서관이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1984년 제28회 행정고등고시(행시)에 합격해 공직에 들어선 지 30년 만에 공무원으로서의 커리어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감상에 젖을 틈도 없었다. 즉시 회의를 매듭짓고 인수인계 사항을 정리한 뒤 짐을 꾸려야 했다.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떠나게 된 것에 대해 이 전 차관은 “정무직 공무원의 숙명”이라고 했다. “차관에 임명된 사실도 평소처럼 일하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는 것이다. 그날 최선을 다해 새로운 업무에 뛰어들었듯, 또 한 번 주어진 상황에 충실해야 했다.
“돌아보면 그 하루가 이전 어느 때보다 바빴던 것 같아요.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끝이라는 걸 실감했죠. 그러자 딸 얼굴이 떠올랐어요.”
커리어와 육아의 딜레마, 양가 어머니의 뒷바라지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두 딸. 늘 바쁜 일상 때문에 밥 한 번 제대로 차려주지 못했는데 제 할 일 꿋꿋이 잘해내고, 오히려 엄마 걱정까지 해주는 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라도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비행기 표를 끊어 들었다. ‘개인 이복실’로의 새로운 삶을 그렇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딸한테 갔어요. 거기서 한동안 정말 그냥 엄마로, 아이 아침밥 먹여 학교 보내고 돌아오면 또 저녁밥 차려주면서 같이 지냈죠.”
낮 시간에는 동네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 처음엔 공직에 있는 동안 경험한 것들을 정리하겠다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옛일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이야기, 또 우리 가족 이야기가 하나 둘 풀려 나오더군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드물던 1980년대 ‘내 일을 갖고 싶어’ 고시에 도전했던 기억, 대학 졸업과 동시에 여성으로는 사상 네 번째로 행시에 합격했던 순간, 결혼 후 한 달 만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 남편 때문에 졸지에 ‘싱글맘’이 돼 두 딸과 함께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 추억은 인생의 둔덕과 계곡을 가로질러 뻗어갔고, 그는 홀로 울고 웃으며 비로소 인생의 한 장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결과물이 최근 펴낸 에세이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카모마일북스)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이잖아요. 글쓰기가 참 좋은 자기 치유법이라는 걸 이번에 알았어요. 완성된 글은 멋진 소통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요. 원고를 마무리한 뒤 가장 먼저 남편한테 보여줬는데 ‘당신이 그동안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지 몰랐다. 정말 고생했다’고 하더군요.”
책 출간이 결정됐을 때 제목을 지어준 것도 남편이었다. 대학 3년 선배로 이 전 차관을 30년 넘게 지켜봐온 남편은 “당신 이야기 안에는 사회에서 성공하고 싶은 ‘여자’의 마음과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엄마’ 마음이 다 담겨 있다. 지금 그 딜레마를 풀지 못해 고민하는 워킹맘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이 전 차관도 무릎을 쳤다. 돌아보면 자신의 삶이 꼭 그랬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양가 어른이 안 계셨다면 저는 아무 일도 못 했을 거예요. 결혼식을 하고 남편이 바로 미국으로 떠나기로 예정돼 있었어요. 그런데 허니문 베이비가 생긴 거죠.”
당시엔 출산휴가가 두 달에 불과했다. 다시 출근해야 할 때가 다가오자 양가 어머니는 ‘우리가 도울 테니 걱정 말고 일하라’며 용기를 북돋워줬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핏덩이를 안고 며칠은 친정, 며칠은 시가에 머무는 생활이 시작됐다. 이 전 차관은 “어른들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큰딸을 유아원에 맡겼다가 뒤늦게 그곳 환경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가슴을 친 일도 있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아이는 그곳에서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다. 발을 동동 굴러도 방법이 없었다. 볼거리(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려 끙끙 앓는 딸을 안고 밤새 씨름하다 아침이 돼 다시 출근복을 챙겨 입으며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자문한 날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일을 계속했던 건,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게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또 공무원으로서 우리 딸들이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나아지게 만들어야겠다는 결심도 했고요.”
‘최초의 여성 차관’을 뒤로하고
교육부 행정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그는 1994년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정무 2장관실에 합류하며 여성 정책과 인연을 맺었다. 2013년 여성가족부 출범 이후 최초의 여성 차관으로 임명돼 이듬해 퇴임하기까지, 줄곧 관련 업무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잊지 않았다고 했다. 일하는 여성의 보육 문제 해결에 역점을 뒀다. 그것이 여성뿐 아니라 자녀를 포함한 가족 전체, 특히 여성의 배우자인 남성에게도 매우 필요한 정책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 차관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보육정책국장으로 일하며 전국 보육시설 3만3000여 곳을 관리 감독하는 ‘보육시설 평가인증제도’와 보육교사 국가자격증 제도를 도입하는 등 현행 보육 체계를 세우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그가 바라는 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다. 성희롱 예방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관련 정책을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 최대한 꼼꼼히 문제를 설명해준다. “나쁜 의도가 없는데도 뭐가 문제인지 몰라 성희롱 가해자가 되는 남성만큼은 없도록” 하고 싶어서다. 3월부터는 숙명여대 가족자원경영학과 강단에 서고, 그간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도 또 쓸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