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러 도시로 출장을 다니면서 그 도시에서 나는 고유 음식을 먹는 것이 하나의 지침이 됐다. 동행자가 김치와 얼큰한 국물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체류가 길어져도 한국 식당을 거의 찾지 않는다. 출장은 비즈니스 미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일상 밖 도시의 건물과 문화, 그리고 사람 사는 모습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는 중요한 기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도시를 경험하면 우연히 만난 멋진 사람들, 박물관에서의 차분한 추억, 낯설지만 아름다운 거리 풍경, 순간을 사로잡는 향수 등 많은 이미지가 차곡차곡 뇌리에 남아 스타일에 관한 나 자신만의 관점이 오래된 와인처럼 서서히 숙성해간다.
정성 다한 슈트와 음식은 닮은꼴
사실 어느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려면 지체 높은 문화부 장관을 만날 게 아니라, 공항이나 음식점에 들어가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음식을 먹는 환경이나 차려 내는 수준,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의 태도는 급조할 수 없는 오래된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해외 출장지에서 한국 식당을 자주 찾지 않는 건 외국 문물을 숭상해서가 아니다.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는 예외로 하고, 다른 해외 도시에 있는 한식당들은 수준 높은 한국 음식문화를 외국인에게 선보이거나 그 나라 주류 문화 속에 스며들려고 노력한다기보다, 그저 중·장년 국내 여행객 향수에 의존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더욱이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의 인테리어와 테이블도 그렇지만, 갈비에서 해물파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음식을 취급하는 메뉴를 보면 타국에서 우리 음식을 먹는 고마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음식을 배불리 먹기만 하면 그만이고, 음식을 먹는 순간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민족일까. 조선 선비는 의관을 정제하지 않으면 외출조차 하지 않았을 만큼 격을 중시했다. 또 일찍이 발효식품을 깨쳤던 우리 음식문화의 진취성은 얼마나 압도적인가. 유럽에서 화려한 사시미(생선회)를 파는 일식당은 늘 고급 음식점으로 취급받지만, 솔직히 생선회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서 호기심에 먹는 유럽인이 안타까웠던 적도 많다.
음식은 허기를 채우는 행위 이전에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국가의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그 문화를 만든 사람의 가치를 즐기고 존중하는 방법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클래식’이라 한다면 음식이나 남성복, 미술, 인문학은 그런 클래식 철학이 가장 필요한 분야다. 매일 빠른 속도로 소비되는 패스트푸드를 과대 생산해 대량 소비되는 염가 기성복에 비유한다면, 클래식 철학을 갖고 제대로 만들어 소중하게 소비하는 음식은 몇 개월이 걸려도 세상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존재하며 의미를 갖는 맞춤복과 같다.
물론 우리가 매일 한정식을 먹을 수는 없고 때로 짜장면과 떡볶이에 끌리듯, 두 문화는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사는 배경이나 취미가 달라도 공유점을 갖고 결국 친해지는 사람들처럼 음식, 그림, 와인, 슈트 등 남자를 위한 핵심 가치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되고 만나는 문화이며, 서로 깊은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는 특성을 갖는다. 그런 면에서 음식과 슈트는 매우 닮았다. 겉으로 보기엔 잘 드러나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에 드는 완벽한 옷을 지으려는 재단사의 완고한 고집은 음식 기본이 되는 재료 하나하나를 양심을 걸고 고르는 훌륭한 요리사 마음과 닿아 있다.
클래식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음식은 애피타이저로 시작해 메인 요리, 디저트로 마무리하는 전체 요리 가짓수나 가게 인테리어, 혹은 압도적인 가격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음식점이 자연스럽게 획득하는 불멸의 명성이란 요리사가 가진 정직한 실력, 그 음식을 즐기는 공간이 주는 고유한 매력, 그리고 손님 취향을 꼼꼼하게 상상하며 준비하는 직원들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훈장이다. 그래서 서울 청담동 프렌치 레스토랑이든, 팔판동 경양식집이든, 광장시장 족발 가게든, 을지로 평양냉면집이든 종류와 환경이 달라도 음식 각각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입는 사람 인격도 담아내
음식에 영혼을 담지 않고 오직 트렌드로만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듯, 숙련된 솜씨로 인체에 가장 적합한 패턴을 만드는 지난한 과정 없이는 한 남자의 인생을 바꿀 정도의 슈트가 탄생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시간을 들여 소재를 고르고 정성을 다해 바느질하는 클래식 슈트의 수제 정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헌신과 자존심을 갖고 자신이 잘하는 음식을 최선을 다해 내놓는 요리사의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슈트와 음식의 경우, 유행을 말하거나 따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 보니 거품 낀 양복점이나 식당이 생기고, 스스로 선구안이 있다며 지나친 자부심을 드러내는 이도 꽤 만날 수 있다. 가능한 많은 경험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슈트와 음식 두 문화는 케이팝(K-pop) 스타처럼 경쟁이나 서열로 정해지는 절대적 정답보다 우리 삶을 조금씩, 하지만 즐겁게 채워주는 가치로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
불고기와 비빔밥의 지향점이 다르듯, 슈트와 재킷의 의미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지 않을까. 결국 슈트와 음식은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의 압축된 마음이 고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솔직한 매개다. 혀뿐 아니라 음악과 식기, 온도 등 나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느끼는 모든 감성을 배려하는 식당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옷장에서 먼저 손이 가고 착용감도 편해 마음까지 흡족해지는 슈트를 우리 인생에서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남자가 40대를 넘어 단골식당 하나 없으면 뭔가 좀 부족해 보이듯, 자기 옷인데도 배우자나 파트너가 골라주는 대로 입기만 하는 건 문제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식당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편안하고 어울리는 슈트를 발견하고 입고 느껴봐야 한다. 나 스스로 많은 슈트를 입어보면서 분명히 느낀 한 가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슈트는 남자와 더 잘 어울린다는 진실이다. 제러미 아이언스, 숀 코네리, 피어스 브로스넌 같은 남자는 원래 훌륭한 배우였고 대단한 남자들이지만, 나이가 충분히 든 지금 오히려 더 멋져 보이는 이유도 그들이 입는 슈트 때문이 아닐까. 슈트는 ‘묵은지’처럼 혹은 와인처럼 입은 사람의 인격과 함께 숙성하는 옷이기 때문이다.
정성 다한 슈트와 음식은 닮은꼴
사실 어느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려면 지체 높은 문화부 장관을 만날 게 아니라, 공항이나 음식점에 들어가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음식을 먹는 환경이나 차려 내는 수준,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의 태도는 급조할 수 없는 오래된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해외 출장지에서 한국 식당을 자주 찾지 않는 건 외국 문물을 숭상해서가 아니다.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는 예외로 하고, 다른 해외 도시에 있는 한식당들은 수준 높은 한국 음식문화를 외국인에게 선보이거나 그 나라 주류 문화 속에 스며들려고 노력한다기보다, 그저 중·장년 국내 여행객 향수에 의존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더욱이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의 인테리어와 테이블도 그렇지만, 갈비에서 해물파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음식을 취급하는 메뉴를 보면 타국에서 우리 음식을 먹는 고마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음식을 배불리 먹기만 하면 그만이고, 음식을 먹는 순간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민족일까. 조선 선비는 의관을 정제하지 않으면 외출조차 하지 않았을 만큼 격을 중시했다. 또 일찍이 발효식품을 깨쳤던 우리 음식문화의 진취성은 얼마나 압도적인가. 유럽에서 화려한 사시미(생선회)를 파는 일식당은 늘 고급 음식점으로 취급받지만, 솔직히 생선회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서 호기심에 먹는 유럽인이 안타까웠던 적도 많다.
음식은 허기를 채우는 행위 이전에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국가의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그 문화를 만든 사람의 가치를 즐기고 존중하는 방법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클래식’이라 한다면 음식이나 남성복, 미술, 인문학은 그런 클래식 철학이 가장 필요한 분야다. 매일 빠른 속도로 소비되는 패스트푸드를 과대 생산해 대량 소비되는 염가 기성복에 비유한다면, 클래식 철학을 갖고 제대로 만들어 소중하게 소비하는 음식은 몇 개월이 걸려도 세상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존재하며 의미를 갖는 맞춤복과 같다.
물론 우리가 매일 한정식을 먹을 수는 없고 때로 짜장면과 떡볶이에 끌리듯, 두 문화는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사는 배경이나 취미가 달라도 공유점을 갖고 결국 친해지는 사람들처럼 음식, 그림, 와인, 슈트 등 남자를 위한 핵심 가치는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되고 만나는 문화이며, 서로 깊은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는 특성을 갖는다. 그런 면에서 음식과 슈트는 매우 닮았다. 겉으로 보기엔 잘 드러나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에 드는 완벽한 옷을 지으려는 재단사의 완고한 고집은 음식 기본이 되는 재료 하나하나를 양심을 걸고 고르는 훌륭한 요리사 마음과 닿아 있다.
클래식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음식은 애피타이저로 시작해 메인 요리, 디저트로 마무리하는 전체 요리 가짓수나 가게 인테리어, 혹은 압도적인 가격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음식점이 자연스럽게 획득하는 불멸의 명성이란 요리사가 가진 정직한 실력, 그 음식을 즐기는 공간이 주는 고유한 매력, 그리고 손님 취향을 꼼꼼하게 상상하며 준비하는 직원들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훈장이다. 그래서 서울 청담동 프렌치 레스토랑이든, 팔판동 경양식집이든, 광장시장 족발 가게든, 을지로 평양냉면집이든 종류와 환경이 달라도 음식 각각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입는 사람 인격도 담아내
음식에 영혼을 담지 않고 오직 트렌드로만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듯, 숙련된 솜씨로 인체에 가장 적합한 패턴을 만드는 지난한 과정 없이는 한 남자의 인생을 바꿀 정도의 슈트가 탄생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시간을 들여 소재를 고르고 정성을 다해 바느질하는 클래식 슈트의 수제 정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헌신과 자존심을 갖고 자신이 잘하는 음식을 최선을 다해 내놓는 요리사의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슈트와 음식의 경우, 유행을 말하거나 따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 보니 거품 낀 양복점이나 식당이 생기고, 스스로 선구안이 있다며 지나친 자부심을 드러내는 이도 꽤 만날 수 있다. 가능한 많은 경험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슈트와 음식 두 문화는 케이팝(K-pop) 스타처럼 경쟁이나 서열로 정해지는 절대적 정답보다 우리 삶을 조금씩, 하지만 즐겁게 채워주는 가치로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
불고기와 비빔밥의 지향점이 다르듯, 슈트와 재킷의 의미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지 않을까. 결국 슈트와 음식은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의 압축된 마음이 고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솔직한 매개다. 혀뿐 아니라 음악과 식기, 온도 등 나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느끼는 모든 감성을 배려하는 식당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옷장에서 먼저 손이 가고 착용감도 편해 마음까지 흡족해지는 슈트를 우리 인생에서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남자가 40대를 넘어 단골식당 하나 없으면 뭔가 좀 부족해 보이듯, 자기 옷인데도 배우자나 파트너가 골라주는 대로 입기만 하는 건 문제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식당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편안하고 어울리는 슈트를 발견하고 입고 느껴봐야 한다. 나 스스로 많은 슈트를 입어보면서 분명히 느낀 한 가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슈트는 남자와 더 잘 어울린다는 진실이다. 제러미 아이언스, 숀 코네리, 피어스 브로스넌 같은 남자는 원래 훌륭한 배우였고 대단한 남자들이지만, 나이가 충분히 든 지금 오히려 더 멋져 보이는 이유도 그들이 입는 슈트 때문이 아닐까. 슈트는 ‘묵은지’처럼 혹은 와인처럼 입은 사람의 인격과 함께 숙성하는 옷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