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은 입학 초기엔 무관심하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마음이 급해진다. 곳곳에서 선배의 공모전 수상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다 수상 경력이 있는 선배가 기업에 덜컥 합격하기라도 하면 ‘공모전에 꼭 나가야 한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제 대학가에서 ‘공모전’ 입상은 또 하나의 ‘스펙’이 된 지 오래다.
상금 지급 계속 미룬 기업
인터넷 공모전 사이트 ‘씽굿’에 따르면 2013년 한 해에만 2200개, 월 평균 180여 개 공모전이 열렸다. 최근 가수 윤민수가 경남제약 레모나 공모전에 참가한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모전은 기업도 즐겨 활용한다. 자사를 홍보하고 대학생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기 때문이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길다고 했던가. 공모전이 늘어갈수록 피해자도 양산되고 있다. ‘공모’를 가장해 대학생의 열정을 무색게 만드는 기업들 때문이다. 공모전에 입상하고도 상금을 받지 못한 사례부터 출품작에 대한 저작권을 부당하게 기업에 빼앗긴 사례까지 피해 양상도 다양하다. 기업의 얄팍한 술수에 당한 피해 학생은 하소연할 곳도 마땅치 않다.
일대일 공모전 코칭 등 공모전 전문학원이 등장하면서 ‘순수한 도전’이라는 공모전 취지도 무색해졌다. 각 전문학원은 ‘멘토’ 기능을 넘어 작품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대리 공모’를 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산다. 유명 강사를 초청해 공모전 입상 비법을 알려주는 곳도 있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로 전락해버린 공모전의 피해 양상과 백태를 고발한다.
건국대 교정 게시판에 붙은 다양한 공모전 포스터(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그러나 A기업은 공모기간이 끝났음에도 상금 지급을 계속 미뤘다. A기업은 채무관계에 놓인 다른 기업과 소송을 벌여 자금 사정이 현저히 악화된 상태에서 공모전을 개최했다. 그러면서 그런 사실을 공모전 참가자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 결국 A기업은 부도가 났고 이씨는 상금을 수령하지 못했다. 이씨는 “어이가 없었다. 워킹홀리데이 준비로 너무 바빠 소송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직원처럼 일했지만 월급도 못 받은 셈이다. 일종의 노동착취라는 생각도 들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씨 경우는 대학생으로부터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고 직원처럼 부려먹으려고 추진하는 ‘사기성 공모전’에 당한 단적인 사례다.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A쇼핑몰이 지난해 10월 개최한 ‘매출 증대 방안 공모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공모전 내용은 ‘역세권 주변이라 입지가 좋은데도 사람이 오지 않는 이유를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오종호(28·가명) 씨는 “회사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사내 직원이 해결하는 것이 맞다. 기업이 알량한 상금을 걸어놓고 자신들이 많은 돈을 들여 해야 할 일을 대학생에게 떠넘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실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공모전·상금’을 검색하면 공모전에 당선했지만 상금을 받지 못한 피해 사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공모전 피해는 사기업이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한 공모전에서도 있었을 정도다. 디자인공모전에 입상하고도 8개월 동안 상금 지급을 미룬 사례도 있다.
공모전 출품작의 저작권을 기업 측에 부당하게 빼앗긴 사례도 부지기수다. 경기 남양주시에 사는 박미나(27·여·가명) 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013년 10월 스포츠용품 전문 B기업의 디자인공모전에 참가했다.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B기업이 공모전 수상자가 없다고 통보했다. ‘심사 결과에 따라 수상작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공모전 요강을 근거로 들었다.
내 작품 도대체 어디로?
하지만 더 큰 피해는 공모전 출품작에 대한 박씨의 저작권을 B기업이 자기 회사로 귀속해버렸다는 것이다. 이 또한 공모전 당시 요강 중 ‘출품작의 저작권은 귀사에 속합니다’라는 조항 때문이었다. 박씨는 “수상자가 없는데도 다른 공모전에 같은 아이디어를 낼 수조차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아이디어를 빼가기 위한 회사 측 꼼수가 분명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B기업은 참가자의 이런 불만을 잠재우려고 자사 스포츠용품을 ‘참가상’ 명목으로 줬지만, 참가자들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공모전이 열리면 ‘수상작 또는 출품작의 저작권은 귀사에 속합니다’라는 단서조항이 요강에서 빠지지 않는다. 특허청에 따르면, 최근 1년(2013년 1~11월)간 열린 아이디어·기술 관련 공모전 201건을 분석한 결과 응모된 아이디어 권리를 주최 측이 가져가는 경우가 전체의 절반(95건)에 이르고 제안자가 권리를 가진 경우는 18%(36건)에 그쳤다.
이처럼 입상만 기대하는 공모전 참가자 대부분은 공모전 요강에 쓰인 저작권 귀속 단서조항을 무심코 지나쳤다 자신의 소중한 아이디어에 대한 저작권을 주최 측에 고스란히 빼앗기는 피해를 입게 된다. 요강의 단서조항 때문에 자기 아이디어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수상자와 비수상자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해당 기업에 물어봐도 제대로 된 답변을 주는 기업은 거의 없다.
사실 더 이해할 수 없는 단서조항은 ‘심사 결과에 따라 수상작이 없을 수도 있다’는 대목이다. 공모전 개최 기업 중 적지 않은 수가 이 조항을 이용해 대상(大賞)을 최우수상으로 바꾸거나 수상자를 내지 않는 꼼수를 쓰기도 한다. 이 경우 혼신을 다해 공모전에 참가한 대학생은 엄청난 심적 타격을 입는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따져 물을 수도 없다. 박씨 경우 수상자는 없고 디자인 아이디어만 가져가는 최악의 공모전에 참가했던 셈.
B기업 관계자는 “심사 결과에 따라 수상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했고, 작품이 22점뿐이라 평가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아닌 출품작 아이디어까지 저작권으로 귀속한 부분은 실수였다. 박씨 아이디어는 모두 파기했다”고 해명했다. 박씨는 아직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제대로 파기됐는지 의문이다.
최근 A페스티벌 포스터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화란(27·여·가명) 씨도 저작권과 관련해 황당한 경험을 했다. 상금은 150만 원. 그런데 주최 측이 김씨 디자인을 마음대로 변형해 포스터로 사용해버린 것이다. 공모전 요강에 따라 저작권은 이미 주최 측으로 넘어간 상태였고,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공모전 상금 미지급에 대한 피해 학생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왼쪽). 이와 함께 공모전 일정이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이렇듯 ‘사기성’ 또는 ‘꼼수’ 공모전이 판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기업이 상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저작권을 빼앗아가도 피해 학생은 그에 대한 실질적인 배상을 받을 방법이 요원하다는 점이다. 대학생에겐 장기간 법적소송을 감당할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법무법인 미인 조창구 변호사는 “출품작에 대한 권리가 공모전 개최 기업에 이전되는 점은 계약자유의 원칙상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이씨처럼 심리적으로 궁박한 대학생의 경우, 그러한 공모전 요강은 불공정한 조항으로 무효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 주장을 계속 들어보자.
“계약자유의 원칙이란 동등한 위치에 이는 당사자 간 계약을 전제로 하는데, 이 경우에는 공모전을 주최한 기업과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대학생의 처지를 동등한 위치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저작권 귀속사항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기업 측 주장은 법 논리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해당해 무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 유수 기업의 경우 공모전 출품작에 대한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취재 결과, 세계 3대 공모전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의 저작권 규정은 국내 기업과 달랐다. 첫째, 당선하지 않은 디자인 콘셉트는 발표되지 않으며 미공개 상태로 유지된다. 둘째, 디자인 콘셉트가 당선작으로 선정되면 그 결과에 대한 공지부터 작품 공개까지 최소 2개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 작품이 선정되더라도 출품작을 공개하지 않을 수도, 활용하지 못하도록 선택할 수도 있다. 이렇듯 레드닷은 상세한 규정을 통해 아이디어 제안자의 지적재산권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 대학생 안희선(25·여·가명) 씨는 “국내 공모전은 믿을 수 없고 아이디어를 착취당하는 느낌이 들어 차라리 공신력 있는 해외 공모전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무늬만 공모전’의 광풍은 그칠 줄 모른다. 이루 다 열거하기도 힘든 성형외과 아이디어 모집 공모전, ○○○교복 안감 디자인 공모전 등 정체불명의 공모전이 도처에 널렸다. 심지어 기업으로부터 의뢰받아 공모전 주최를 대행하는 컨설팅업체도 등장했다. 돈을 받고 기업의 공모전 주최를 관리하는 식이다. 공모전 컨설팅 기업 D사는 대기업, 정부부처, 협회로부터 의뢰받아 공모전을 대행한다. 기획부터 공모전 전문 포털 등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온라인 홍보전까지 전 방위 마케팅도 담당한다. 이미 기업도 공모전을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꼼수’ ‘사기성’ 공모전이 판치지만 이제 공모전은 대학생 사이에서 학점, 토익, 해외연수, 봉사활동과 함께 취업의 필수 5대 스펙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인터넷 취업 포털사이트 잡코리아가 지난해 11월 대학생 46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57.3%(264명)가 ‘취업을 위해 사교육을 받아봤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1년간 지출하는 사교육비는 평균 207만 원으로 집계됐으며, 이는 5년 전(170만 원)보다 37만 원 증가한 규모다.
공모전이 취업 5대 스펙으로 자리 잡은 만큼 토익이나 해외연수, 전공과목 과외처럼 공모전에도 사교육 바람이 불고 있다. 공모전 전문학원까지 등장한 것이다. 누구나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공모전 본래 취지는 무색해지고, 공모전 멘토링은 공모전을 학원에서 함께 ‘공모(公模)’해서 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지난여름 P학원은 공모전 교육 및 취업 전문 멘토링을 하는 2개월의 강의 일정을 공지하고 수강생을 모집했다. 최다 공모전 수상에 빛나는 유명 강사들이 수강생을 상대로 공모전 첨삭과 취업상담을 병행했다. 수강료는 15만 원. 이뿐이 아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공모전 코칭’을 입력하면 구체적인 사례까지 등장한다. 어느 학부모는 고교생 딸의 스펙을 위해 공모전 컨설팅을 의뢰했다. 코치는 출품작의 기획 단계부터 철저히 지도했다. 결국 이 고교생은 금상을 수상했다.
자신의 창작물로 승부하는 공모전에서 전문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일각에서는 학생이 공모전에 참가하려고 팀을 짤 때 속칭 ‘공모전 선수’를 영입해 상금을 나눈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실제로 공모전 수상 경험을 다수 가진 최선우(27·가명) 씨는 “혼자 공모전을 하는 편이지만 내가 팀을 구성해 공모전으로 취업하게 해준 학생들도 있다. 공모전에 대한 팁을 알려주고 상금을 나누곤 했다”고 증언했다. 제출할 때까지 누가 얼마큼 몫을 했는지 확인하지 않는 공모전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 틈을 사교육이 비집고 들어갔다.
알고 보면 빛 좋은 개살구
온갖 피해에도 대학생이 공모전에 매달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공모전이 취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모전 사이트 ‘씽굿’과 취업경력 관리 사이트 스카우트가 2040 대학생 및 직장인 77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불안한 미래에 가장 걱정되는 요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첫 번째로 취업과 승진(32.6%)을 꼽았다. 청년실업 30만 시대, 대학생 관심사는 취업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 4학년 박재만(28) 씨는 “취업하려고 공모전에 뛰어들었다. 공모전에 입상하면 취업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산 전적 6전 6승, 총상금 2500만 원을 받아 인터넷상에서 ‘공모전 왕’이라 불리던 이상훈(29·가명) 씨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은 공모전 입상 종목과는 전혀 관계없는 직장에 다니는 이씨는 “공모전 수상은 빛 좋은 개살구다. 결국 나는 우승한 공모전과 전혀 딴판인 분야에서 일한다. 공모전 같은 대외활동에 치중한 나머지 학교 공부 등 내실을 다지지 못했다”고 공모전 허상을 지적하면서 “꼼수, 사기성 공모전은 스펙 사회의 어두운 그늘이자 우리 사회가 반드시 고쳐야 할 시급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어두운 그늘을 감안하더라도 대학생이 공모전 유혹을 완전히 떨치기는 어렵다. 그래서 취업에 도움이 되는 건강한 공모전의 기준을 다시 한 번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대한민국 20대, 공모전에 미쳐라!’ 저자이자 공모전 전문가인 이동조 씨는 “수상자를 발표하지 않은 기업 또는 상금을 안 주거나 아이디어를 함부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난 기업은 무조건 피하는 게 좋다. 대학생은 가급적 신뢰할 수 있는 주최사, 국가 공기업, 지방자치단체, 규모가 있는 기업, 횟수가 2~3회 넘어간 공모전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요강, 저작권 관련 부분 등을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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