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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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불면 홍어와 나주곰탕 생각

전남 나주의 맛

  • 박정배 푸드 칼럼니스트 whitesudal@naver.com

    입력2013-10-28 09: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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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바람 불면 홍어와 나주곰탕 생각

    나주곰탕

    교통과 냉장시설의 발달, 재배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제철음식에 대한 인식이 점차 희박해지지만 여전히 제철에 산지에서 먹어야 하는 음식은 도처에 있다. 찬바람이 불어야 홍어는 잘 잡히고 맛도 쫀득하다. 따스한 국물과 지글거리는 돼지고기 한 점도 그리워진다. 전남 나주에 가면 이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선조 임금이 “나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나주는 호남 쌀이 모여 한양으로 올라오는 조선 곳간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나주 영산포구는 일본으로 가는 물산이 끊이질 않았다. 1915년 이례적으로 내륙 강변인 영산포구에 등대를 세웠을 정도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 물산 중심지 영산포구는 1978년 영산호 물막이 공사로 배가 끊기면서 등대 불빛이 꺼지고 영화도 잃었다. 하지만 영산포의 옛 영화는 홍어를 통해 되살아났다. 국내 삭힌 홍어의 70% 정도를 만들고 유통하는 영산포는 활력이 넘친다. 등대 바로 뒤부터 이어지는 ‘홍어 거리’의 30여 개 가게에서 삭힌 홍어를 만들고 판다. 거리에는 홍어 냄새가 진동한다.

    고려시대부터 흑산도는 홍어 주산지였다. 왜구 때문에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하면서 흑산도 영산에서 나주로 온 사람들은 새로운 마을에 영산이란 이름을 붙이고 모여 살았다. 조선 건국 후 왜구가 소탕되자 영산 사람들은 흑산도로 돌아가기도 하고, 일부는 영산에 남았다. 흑산도에서 많이 잡히던 홍어가 흑산도와 영산포 사람들을 통해 전라도 일대에 유행했다.

    흑산도에서 영산포까지 오는 보름 정도의 긴 뱃길에 홍어는 삭는다. 푹 삭은 홍어가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다.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이 1814년 쓴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먹는다”고 적혔다. 1801년 동생 정약용은 강진으로,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다. 한양을 출발한 형제는 나주 율정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뒤 헤어져 영영 보지 못한다.



    율정 주막은 현재 동신대 근처 831번 국도변에 있다. 옛 율정 주막 근처에는 ‘송현불고기’집이 있다. 슬레이트 지붕을 인 낡고 작은 한옥이지만, 손님이 줄을 서는 집이다.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마늘, 생강, 양파, 설탕, 배를 넣어 재운 뒤 숙성시킨 돼지고기를 연탄불에 구워준다. 간장과 참기름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돼지불고기는 달콤한 맛과 탄력 있는 식감으로 사람을 불러 모은다.

    ‘송현불고기’와 더불어 나주를 대표하는 돼지불고기 집 ‘사랑채’는 ‘송현불고기’와는 사뭇 다른 외관을 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263호로 지정된 우아한 한옥 남파고택의 한켠에 자리한, 소박한 한정식을 파는 공간이 사랑채다. 값이 저렴해도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들어 내놓는 이 집의 대표 메뉴는 연탄으로 구운 간장돼지불고기다. 어느 쇠고기 요리와 비교해도 품격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나주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역시 곰탕이다. 나주곰탕 명가들은 나주 매일시장 주변에 10여 곳이 옹기종기 모였다.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나주곰탕 삼총사인 ‘하얀집’ ‘남평집’ ‘노안곰탕집’은 같은 듯 다른 맛을 낸다. 이곳은 6·25전쟁 직후부터 곰탕을 팔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 집 모두 수준이 높다. 어느 집에 들러도 전국 최고 수준의 곰탕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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