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인의 밥상에서 빠지는 법이 없는 명태.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먹어온 생선 중 하나인 이 녀석은 그 이름만도 수십 가지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릴 것 하나 없고, 요리법도 무척 다양하다. 이런 ‘국민 생선’ 명태가 우리 문헌에 처음 이름을 올린 건 언제일까.
음식계에서 정설로 여긴 기록은 1652년(조선 효종 3년) 10월 8일 ‘승정원일기’에 등장한 명태 관련 내용. “진상한 대구 알젓에 명태 알이 섞여 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보다 앞선 기록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뒤집힌다. 현재까지 명태와 관련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함경도 회령에서 근무했던 무관(武官) 박계숙, 박취문 부자의 일기인 ‘부북일기(赴北日記)’에 나온다. 1645년(인조 23년) 4월 20일 “판관이 생대구 2마리, 생명태 5마리, 신삼어 5마리를 보내주었다”는 구절이다.
#2 생긴 꼴은 좀 뭣해도 결코 얕볼 수 없는 미각 체험을 선사하는 어물(魚物)이 문어다. 전라도에 홍어가 있다면, 경상도엔 문어가 있다. 그런데 이 문어라는 단어의 어원은 대체 무엇일까.
동해에서 두루 잡히는 문어는 유교문화가 강했던 내륙지방인 경북 안동과 영주로 건너와 잔치 및 제사 음식의 귀족으로 대접받았다. 선비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글의 생선’이라는 뜻을 가진 근사한 이름 문어(文魚)가 됐다고들 한다.
하지만 문어의 원래 이름은 ·#48096;어. 생긴 모양이 사람의 민머리(대머리) 같다고 해서 붙은 이 이름이 세월이 지나면서 문어로 변한 것이다. 민머리, 헐벗은 산을 의미하는 민둥산은 모두 머리털 따위가 빠지는 걸 뜻하는 ‘ ·#48092;다’의 어두인 ‘·#48092;~’에서 유래했다. 이 때문에 그동안 많은 사람이 ‘문어가 사람의 머리와 닮았다’는 옛 문헌 내용을 오해해 문어가 사람처럼 머리를 잘 쓰는 생선이라고 해석해온 건 잘못이다.
기록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기록을 통해 완성된다던가.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여행작가인 박정배(50·사진) 씨에겐 ‘기록을 통한 역사의 재발견’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우리 먹거리에 관해선 더욱 그렇다. 앞서 언급한 명태와 문어의 재발견도 박씨의 그런 알찬 노력의 산물이다.
박씨의 음식 칼럼은 단순하지 않다.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연구를 통해 음식 인문학과 음식 여행기를 결합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면서 음식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위치를 굳혀가고 있다.
1월 동시 출간한 ‘음식강산(飮食江山)’ 1, 2권(한길사)은 만 2년에 걸친 그의 흥미진진한 음식 탐구 결과물이다. ‘바다의 귀한 손님들이 찾아온다’(1권)와 ‘국수는 행복의 음식이다’(2권)라는 부제에서 보듯 거친 바다에 삶을 의탁해 살아가는 어민들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어류와 해산물, 누구나 즐기는 국민 메뉴이자 축복의 음식인 국수를 소재로 다뤘다. 하나같이 예부터 우리 민족이 먹어온 문헌 기록이 남아 있고, 오래전부터 우리 밥상을 책임져왔으며, 오늘날에도 누구나 두루 좋아하는 대중성을 지닌 음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잘못 알려진 음식 상식 바로잡기
“우리나라는 아직도 음식에 관한 책들의 내용이 학자, 요리전문가, 음식(혹은 맛집) 칼럼니스트마다 제각각입니다. 한 가지 음식이나 식재료에 얽힌 이야기조차 저마다 따로따로죠. 한마디로, 왜곡되고 과장된 식당들의 역사와 잘못된 음식 상식이 넘쳐납니다. 저는 그와 달리 옛 문헌과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우리 음식의 기원과 뿌리를 촘촘히 재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 차원을 넘어 해당 지역민이 절실하게 의지해온 생계수단이기도 하거든요. 음식 하나하나에도 그들 삶의 애환과 인생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음을 알리고 싶었어요.”
2년 동안 발품을 팔아 전국 방방곡곡 음식문화 현장을 누비며 직접 맛보고, 두 눈으로 실체를 확인하며, 서울 국회도서관에 파묻혀 공부하면서 그는 음식에 한 땀 한 땀 누빈 ‘인문학 옷’을 때깔 좋게 입힐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현장조사는 물론, 국내 문헌과 중국·일본 자료까지 훑어가며 우리 음식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는 작업에만 매진했다. 그의 말마따나 ‘식행(食行)’의 연속이랄까.
그 덕에 새롭게 발굴한 사실도 여럿이다. 냉면과 관련해, 1936년 평양상공회의소가 발간한 ‘평양상공명록’을 뒤져 ‘평양조선인면옥조합(平壤朝鮮人麵屋組合)’이란 단체가 존재했고, 그 창립연도가 1911년(메이지 44년)임을 알아낸 것도 성과다. 남한은 물론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면서 아직도 창업자의 직계자손이 대구에서 직접 운영하는 ‘부산안면옥’의 역사에 대한 고증도 했다. 더불어 명란젓이 일본 규슈 명물인 ‘멘타이코(明太子)’가 된 과정도 일본 자료를 샅샅이 뒤져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했다.
박씨는 섬소년이었다. 육쪽마늘 산지로 유명한 경남 남해군 이동면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했지만, 남해산 식재료는 늘 집 창고에 차고 넘쳤다. 초등학생 시절, 마늘과 빼때기(날고구마를 납작하게 썰어 말린 것), 죽방멸치와 쥐치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왠지 비린 것이 당겼다. 서울에서 접한 기름진 육고기 또한 입에 잘 맞았다. 입맛은 거듭 발달했고, 식욕은 한층 왕성해졌다.
딱히 장래희망이랄 것도 없었다. 먹고 노는 게 마냥 좋았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천성과는 워낙 거리가 멀었다. 그런 박씨가 우리 음식의 사회·문화사 길잡이를 자처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뜻밖에도 대학 졸업 후 그의 첫 직업은 다큐멘터리 PD. ‘다큐 서울’에서 일본 NHK ‘ASIA NOW’ 프로그램의 한국 담당 PD로 일하면서 푸드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SBS 개국프로그램 PD를 맡기도 했다. 이후엔 직원이 600여 명이나 되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대리사원으로 입사해 대표 자리에까지 성큼 올랐다.
하지만 음식과의 연(緣)은 질기디 질겼다. 경영인이라는 직위가 주는 부담감과 갑갑함이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그에겐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결국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직장을 그만두는 ‘비움의 미학’을 실천했다. 그 대신 자신의 삶 한가운데에 ‘음식’과 ‘여행’을 채웠다.
3년 후 펴낸 첫 저서 ‘3000원으로 외식하기’(시공사)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어느새 음식 칼럼니스트로 변신했다. KTX 매거진에 ‘박정배가 찾은 최고의 맛집’을, 음식잡지 ‘쿠켄’에 ‘박정배의 맛 따라 멋 따라 대한민국 음식지도’를 연재하면서 이름도 알렸다. 여행작가와 일본여행 가이드 일도 겸해 ‘500엔으로 즐기는 맛있는 도쿄’ ‘대한민국 낭만기차여행’ ‘저스트 고 낭만의 일본 기차여행’ 등을 펴냈고, 일본열도를 100번도 넘게 다녀온 경험을 밑천삼아 ‘사케입문’이란 책도 썼다.
이렇듯 박씨에게 음식과 여행은 인생의 구심점이다. 다만 요즘은 전자가 90%라면, 후자는 10%쯤 된다. 그는 내처 ‘음식강산’ 3, 4, 5권을 집필 중이다. 돼지고기, 쇠고기 등 육고기를 재료로 한 음식을 다룬 3권은 올가을에, 비빔밥과 김치 등 한국음식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음식을 소재로 할 4권, 그리고 산자수명한 강산이 빚어내는 술과 음료의 세계를 소개할 5권은 내년 중 출간 예정이다. ‘음식강산’은 모두 5권으로 완성된다.
국내 막걸리 95%가 사케 방식으로 제조
“3권엔 특히 설렁탕에 관한 여러 가설을 새로 밝히고, 현재 이문설렁탕과 옛날 이문설렁탕의 차이점, 이문설렁탕 가문에 관한 발굴 내용도 싣습니다. 5권에선 막걸리가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통합되고 소멸되며 일본화됐는지, 그리고 현재 국내 막걸리의 95% 이상이 일본 사케 만들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점도 정리할 겁니다.”
박씨는 아직 미혼.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단다. 앞으로 펴내고 싶은 책은 ‘음식사전’이다. 각종 음식 이름의 어원을 정확히 밝히면서 그 음식을 둘러싼 풍성한 인문학적 지식을 전파하는 데 사전만큼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은 배고픔을 달래주는 삶의 기본조건이다. 오늘날 우리에겐 보릿고개 시절의 절박함 따윈 없다. 하지만 여전히 좋은 먹거리를 바로 알고, 믿을 만한 먹거리를 제대로 찾아 먹는 일은 건강을 위해서도 중차대한 문제다.
그에게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파닥파닥한, 갓 잡아올린 등푸른생선의 몸놀림 같은 잽싼 대답이 돌아왔다.
“삶이자 역사죠. 우리 음식문화는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를 향해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의 복합체입니다. 실체를 온전히 아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대강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저는 전국을 돕니다.”
‘인문식객(人文食客).’ 미각의 모험과 유랑을 즐기는 그에게 누군가 붙여준 별명, 참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음식계에서 정설로 여긴 기록은 1652년(조선 효종 3년) 10월 8일 ‘승정원일기’에 등장한 명태 관련 내용. “진상한 대구 알젓에 명태 알이 섞여 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보다 앞선 기록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뒤집힌다. 현재까지 명태와 관련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함경도 회령에서 근무했던 무관(武官) 박계숙, 박취문 부자의 일기인 ‘부북일기(赴北日記)’에 나온다. 1645년(인조 23년) 4월 20일 “판관이 생대구 2마리, 생명태 5마리, 신삼어 5마리를 보내주었다”는 구절이다.
#2 생긴 꼴은 좀 뭣해도 결코 얕볼 수 없는 미각 체험을 선사하는 어물(魚物)이 문어다. 전라도에 홍어가 있다면, 경상도엔 문어가 있다. 그런데 이 문어라는 단어의 어원은 대체 무엇일까.
동해에서 두루 잡히는 문어는 유교문화가 강했던 내륙지방인 경북 안동과 영주로 건너와 잔치 및 제사 음식의 귀족으로 대접받았다. 선비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글의 생선’이라는 뜻을 가진 근사한 이름 문어(文魚)가 됐다고들 한다.
하지만 문어의 원래 이름은 ·#48096;어. 생긴 모양이 사람의 민머리(대머리) 같다고 해서 붙은 이 이름이 세월이 지나면서 문어로 변한 것이다. 민머리, 헐벗은 산을 의미하는 민둥산은 모두 머리털 따위가 빠지는 걸 뜻하는 ‘ ·#48092;다’의 어두인 ‘·#48092;~’에서 유래했다. 이 때문에 그동안 많은 사람이 ‘문어가 사람의 머리와 닮았다’는 옛 문헌 내용을 오해해 문어가 사람처럼 머리를 잘 쓰는 생선이라고 해석해온 건 잘못이다.
기록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기록을 통해 완성된다던가.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여행작가인 박정배(50·사진) 씨에겐 ‘기록을 통한 역사의 재발견’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우리 먹거리에 관해선 더욱 그렇다. 앞서 언급한 명태와 문어의 재발견도 박씨의 그런 알찬 노력의 산물이다.
박씨의 음식 칼럼은 단순하지 않다.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연구를 통해 음식 인문학과 음식 여행기를 결합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면서 음식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위치를 굳혀가고 있다.
1월 동시 출간한 ‘음식강산(飮食江山)’ 1, 2권(한길사)은 만 2년에 걸친 그의 흥미진진한 음식 탐구 결과물이다. ‘바다의 귀한 손님들이 찾아온다’(1권)와 ‘국수는 행복의 음식이다’(2권)라는 부제에서 보듯 거친 바다에 삶을 의탁해 살아가는 어민들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어류와 해산물, 누구나 즐기는 국민 메뉴이자 축복의 음식인 국수를 소재로 다뤘다. 하나같이 예부터 우리 민족이 먹어온 문헌 기록이 남아 있고, 오래전부터 우리 밥상을 책임져왔으며, 오늘날에도 누구나 두루 좋아하는 대중성을 지닌 음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명태와 문어, 명란(왼쪽부터).
“우리나라는 아직도 음식에 관한 책들의 내용이 학자, 요리전문가, 음식(혹은 맛집) 칼럼니스트마다 제각각입니다. 한 가지 음식이나 식재료에 얽힌 이야기조차 저마다 따로따로죠. 한마디로, 왜곡되고 과장된 식당들의 역사와 잘못된 음식 상식이 넘쳐납니다. 저는 그와 달리 옛 문헌과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우리 음식의 기원과 뿌리를 촘촘히 재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 차원을 넘어 해당 지역민이 절실하게 의지해온 생계수단이기도 하거든요. 음식 하나하나에도 그들 삶의 애환과 인생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음을 알리고 싶었어요.”
2년 동안 발품을 팔아 전국 방방곡곡 음식문화 현장을 누비며 직접 맛보고, 두 눈으로 실체를 확인하며, 서울 국회도서관에 파묻혀 공부하면서 그는 음식에 한 땀 한 땀 누빈 ‘인문학 옷’을 때깔 좋게 입힐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현장조사는 물론, 국내 문헌과 중국·일본 자료까지 훑어가며 우리 음식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는 작업에만 매진했다. 그의 말마따나 ‘식행(食行)’의 연속이랄까.
그 덕에 새롭게 발굴한 사실도 여럿이다. 냉면과 관련해, 1936년 평양상공회의소가 발간한 ‘평양상공명록’을 뒤져 ‘평양조선인면옥조합(平壤朝鮮人麵屋組合)’이란 단체가 존재했고, 그 창립연도가 1911년(메이지 44년)임을 알아낸 것도 성과다. 남한은 물론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면서 아직도 창업자의 직계자손이 대구에서 직접 운영하는 ‘부산안면옥’의 역사에 대한 고증도 했다. 더불어 명란젓이 일본 규슈 명물인 ‘멘타이코(明太子)’가 된 과정도 일본 자료를 샅샅이 뒤져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했다.
박씨는 섬소년이었다. 육쪽마늘 산지로 유명한 경남 남해군 이동면에서 태어났다. 서너 살 무렵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했지만, 남해산 식재료는 늘 집 창고에 차고 넘쳤다. 초등학생 시절, 마늘과 빼때기(날고구마를 납작하게 썰어 말린 것), 죽방멸치와 쥐치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왠지 비린 것이 당겼다. 서울에서 접한 기름진 육고기 또한 입에 잘 맞았다. 입맛은 거듭 발달했고, 식욕은 한층 왕성해졌다.
딱히 장래희망이랄 것도 없었다. 먹고 노는 게 마냥 좋았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천성과는 워낙 거리가 멀었다. 그런 박씨가 우리 음식의 사회·문화사 길잡이를 자처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뜻밖에도 대학 졸업 후 그의 첫 직업은 다큐멘터리 PD. ‘다큐 서울’에서 일본 NHK ‘ASIA NOW’ 프로그램의 한국 담당 PD로 일하면서 푸드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SBS 개국프로그램 PD를 맡기도 했다. 이후엔 직원이 600여 명이나 되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대리사원으로 입사해 대표 자리에까지 성큼 올랐다.
하지만 음식과의 연(緣)은 질기디 질겼다. 경영인이라는 직위가 주는 부담감과 갑갑함이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그에겐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결국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직장을 그만두는 ‘비움의 미학’을 실천했다. 그 대신 자신의 삶 한가운데에 ‘음식’과 ‘여행’을 채웠다.
3년 후 펴낸 첫 저서 ‘3000원으로 외식하기’(시공사)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어느새 음식 칼럼니스트로 변신했다. KTX 매거진에 ‘박정배가 찾은 최고의 맛집’을, 음식잡지 ‘쿠켄’에 ‘박정배의 맛 따라 멋 따라 대한민국 음식지도’를 연재하면서 이름도 알렸다. 여행작가와 일본여행 가이드 일도 겸해 ‘500엔으로 즐기는 맛있는 도쿄’ ‘대한민국 낭만기차여행’ ‘저스트 고 낭만의 일본 기차여행’ 등을 펴냈고, 일본열도를 100번도 넘게 다녀온 경험을 밑천삼아 ‘사케입문’이란 책도 썼다.
이렇듯 박씨에게 음식과 여행은 인생의 구심점이다. 다만 요즘은 전자가 90%라면, 후자는 10%쯤 된다. 그는 내처 ‘음식강산’ 3, 4, 5권을 집필 중이다. 돼지고기, 쇠고기 등 육고기를 재료로 한 음식을 다룬 3권은 올가을에, 비빔밥과 김치 등 한국음식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음식을 소재로 할 4권, 그리고 산자수명한 강산이 빚어내는 술과 음료의 세계를 소개할 5권은 내년 중 출간 예정이다. ‘음식강산’은 모두 5권으로 완성된다.
국내 막걸리 95%가 사케 방식으로 제조
“3권엔 특히 설렁탕에 관한 여러 가설을 새로 밝히고, 현재 이문설렁탕과 옛날 이문설렁탕의 차이점, 이문설렁탕 가문에 관한 발굴 내용도 싣습니다. 5권에선 막걸리가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통합되고 소멸되며 일본화됐는지, 그리고 현재 국내 막걸리의 95% 이상이 일본 사케 만들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점도 정리할 겁니다.”
박씨는 아직 미혼.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단다. 앞으로 펴내고 싶은 책은 ‘음식사전’이다. 각종 음식 이름의 어원을 정확히 밝히면서 그 음식을 둘러싼 풍성한 인문학적 지식을 전파하는 데 사전만큼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은 배고픔을 달래주는 삶의 기본조건이다. 오늘날 우리에겐 보릿고개 시절의 절박함 따윈 없다. 하지만 여전히 좋은 먹거리를 바로 알고, 믿을 만한 먹거리를 제대로 찾아 먹는 일은 건강을 위해서도 중차대한 문제다.
그에게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파닥파닥한, 갓 잡아올린 등푸른생선의 몸놀림 같은 잽싼 대답이 돌아왔다.
“삶이자 역사죠. 우리 음식문화는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를 향해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의 복합체입니다. 실체를 온전히 아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대강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저는 전국을 돕니다.”
‘인문식객(人文食客).’ 미각의 모험과 유랑을 즐기는 그에게 누군가 붙여준 별명, 참 잘 어울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