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어두운 과거를 정면으로 다룬 역사드라마 ‘우리 어머니들, 우리 아버지들’의 한 장면.
드라마는 베를린에서 함께 자란 5명의 젊은이가 제2차 세계대전에 연루되면서 밟게 되는 운명을 보여준다. 1941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형 빌헬름은 자원하고, 동생 프리드헬름은 강제로 입대해 베를린에서 가까웠던 동부전선에 배치된다. 빌헬름을 사모하던 샬로테는 조국의 병사를 치료하는 간호사가 되겠다는 애국심으로 야전병원에 자원한다. 유대인 빅토르와 가수 지망생 그레타는 후방에 남는다. 이들은 전쟁이 길어야 6개월 안에 끝날 것이라 예측하고 성탄절에 다시 모이자며 헤어진다.
다섯 젊은이의 엇갈린 운명
하지만 소련은 강했고 동부전선의 추위는 혹독했다. 약속한 지원은 오지 않았다. 후방에서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베를린 시민들이 히틀러의 선전에 취해 있는 동안, 전방의 병사들은 하루하루 생과 사를 넘나들며 4년을 버텨야 했다. 결국 빌헬름은 병사를 전부 잃은 트라우마로 탈영병이 되고, 프리드헬름은 나약한 소년에서 냉혈한 투사로 영혼이 바뀌어가던 중 끝내 전사한다.
샬로테는 병원 일을 도와주던 유대인을 발견하고 지시대로 충실히 게슈타포에게 밀고한다. 잘못을 깨달았으나 돌이킬 수 없었다. 오직 자기 꿈에만 관심 있던 그레타는 나치돌격대 장교와 불륜관계를 맺고, 그의 힘으로 유명 대중가수가 돼 전쟁 중에도 화려한 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독일군은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친구들 말을 입 밖에 냈다가 반역죄로 사형된다. 아우슈비츠로 강제이송되던 중 탈출에 성공한 유대인 빅토르는 폴란드 빨치산 독립군에게 이용당하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운명에 목숨을 맡긴다. 드라마는 4년 후 살아남은 세 사람이 베를린의 폐허 더미 속에서 황폐한 시선으로 재회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시나리오 작업에만 6년이 걸린 이 드라마는 독일 TV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독일과 소련이 대규모 교전을 벌였던 동부전선의 실상을 실감 나게 재현했고,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해 독일군의 민간인 학살을 가감 없이 화면에 담았다. 특히 평범한 인물이 어떻게 나치즘에 동조하거나 이용당하고, 어떤 선택을 했으며,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그들의 트라우마와 저마다의 진실을 공감할 수 있게 표현해 인물들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유보했다는 점에서 기존 드라마와 크게 달랐다.
이렇게 접근한 부모의 초상화는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와 친구 아버지들이 동부전선에서 돌아온 이후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정말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헤르베르트 크루슈케·62·베를린 거주), “TV로 보는 것도 힘든데 우리 부모들은 그걸 다 현장에서 견뎌야 했다니요!”(사비네 브루만·48·베를린 거주)라는 소감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들 세대와 얼마나 다른가”라는 성찰, “나라도 그랬을지 모른다”라는 자기 고백, 그리고 시청자 소감이라는 형식의 토론들이 터져 나왔다.
전문가 사이에서 호평과 혹평이 엇갈린 가운데 언론에서는 칭찬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억압된 기억 문화를 바꿀 새롭고도 중요한 질문들이 던져졌다는 것이다.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묻지 못했던 “우리 가족은 나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정말 동료를 배신하고 이웃을 밀고하고 사람을 죽였느냐고 솔직히 물어보는 일이 왜 어려운가” 같은 질문들 말이다.
독일 공영방송들은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해 해마다 독일 현대사를 다룬 수준 높은 드라마들을 내보낸다. 과거사 청산 작업을 대중화하는 일에 TV만큼 효과적인 대중매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들, 우리 아버지들’의 총제작비 210억 원 가운데 150억 원을 댄 ZDF의 하이케 헴펠 드라마국장은 시청자들에게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 옆에 있는 부모, 조부모, 친척들과 대화를 시도하라”는 것, 즉 “시대의 증인인 그들이 90세가 넘은 지금, 그들이 사라지기 전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다가가서 묻고 듣고 얘기를 나누라”는 것이다.
나치 후손들 문의 쇄도
독일 역사드라마 ‘우리 어머니들, 우리 아버지들’은 독일과 소련이 대규모 교전을 벌였던 동부전선의 실상을 실감 나게 재현했고, 독일군의 민간인 학살을 가감 없이 화면에 담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공식적 처사였다. 나치범죄는 언제나 집단범죄로 규명됐고, 개인의 행동은 다 덮어뒀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테른’의 한 기자는 “집 안에서 나치에 관한 얘기를 하는 독일 가정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독일군으로 참전한 가족이 있으면 더더욱 금기였다”고 털어놨다. 드라마 구상에서 제작까지 10년이 걸렸다는 사실만 봐도, 자기 경험을 이야기할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드라마가 끼친 변화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및 전몰 국방군 정보센터에서도 감지된다. 자신의 조상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는 자손들의 문의가 드라마 종영 후 3배로 증가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이런 분위기를 환영한다. 나치 범죄에 동참했거나 방조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억압함으로써 평생 괴로워하거나 부지불식간 전쟁 트라우마를 자녀에게 물려줘 자녀까지 고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진실을 드러내고 대면하는 일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가해국인 독일이 피해국을 묘사할 자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주독 폴란드 대사가 방송국에 공개적으로 항의서한을 보냈다. “드라마 속 폴란드 독립군 빨치산이 몇 명만 제외하고 모두 반유대주의자로 묘사됐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실제 폴란드 사람들의 분노를 반영한 처사다. 폴란드 시사주간지 ‘폴리티카’는 표지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연방총리를 강제수용소 수감자로 묘사해 내보냈다. ZDF 측은 “모든 인물을 뻔한 캐릭터로 그리지 않으려 했고, 전문가들의 고증을 충분히 거쳤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한 폴란드 기자는 “폴란드 역사에서 독립군이 차지하는 명예와 국민의 특별한 감정을 배려하지 않고 사실 여부만 따진 오만과 무정함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드라마는 곧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진다. 얼마 전 미국 영화배급사 뮤직박스가 판권을 사갔기 때문이다. 먼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 대도시 영화관에서 ‘Generation War’라는 제목으로 상영한 후 TV 미니시리즈로도 방송할 계획이다. 호주,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에서도 상영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