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라는 시점에서 우리가 왜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특히 죽음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죽음을 넓고 깊게 아는 일은 바로 오늘의 삶을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인간의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이 현상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면 누구든 예외 없이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을 수 없다. 매일 바쁘게 살면서 무거운 수레바퀴를 굴리다 보면 우리는 삶과 죽음의 본질적 의미는 망각한 채 오로지 욕망의 기계로 일상성을 장식하는 자신을 보며 경악하기도 한다.
현대인 욕망 충족의 늪에 허우적
일상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호기심, 지껄임, 반복, 지배욕, 이기심, 망각 등은 일상성을 구성하는 요소다. 식구 가운데 누군가가 아기를 낳으면 우리는 “갓난아기가 어쩌면 이렇게 잘생기고 튼튼하지? 벌써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거야!”라고 큰 호기심을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에 관한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고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숨 가쁘게 질주한다.
죽음의 일상성 역시 삶의 일상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친지나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병원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접할 기회를 가진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순간부터 화장터와 납골당이나 묘지를 거치며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상념이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죽음이 뭐지? 오복(五福)을 누리다 죽으면 그런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거지. 그런데 어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가. 그저 작은 행복이라도 잡으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다 터럭만큼도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질병이나 사고로 고생만 하다 죽어가는 것이 많은 사람의 삶 아닌가.”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2~3일만 지나도 우리는 망각의 늪에 빠져 다시금 욕망을 충족하려고 무의미한 일상성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현대인은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예외 없이 실천적 유물론자로서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확신한다. 주변을 잠깐 둘러봐도 일류 대학 나오고 많이 배워 고위관리직에 있거나, 정치권력을 소유하거나, 명예나 재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욕망 충족에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사회 지배층에 있는 엘리트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욕망 충족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말한 삶의 일상성은 물론이고 죽음의 일상성 역시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생물학, 의학, 신경생리학, 의생명공학, 생화학 등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흔히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그러한 삶과 죽음이 바로 삶과 죽음의 일상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아프면 죽음의 그림자가 두려워 그 그림자를 쫓아내고 건강을 되찾으려고 병원을 들락거린다.
의학을 비롯한 첨단 자연과학이 여러 질병을 치료하고 퇴치함으로써 인간 수명을 상당 기간 연장해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긴 해도 실증적 자연과학은 인간 본성과 아울러 문화적 특징을 충분히 해명하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을 인격 주체로 성숙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할 때 우리는 성숙한 인격 주체를 창조할 수 있는 삶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실증적 자연과학은 사실을 실험하고 관찰하고 검증함으로써 그 사실을 기록하며 발전시켜 나간다. 예컨대 의학은 실증적 과학으로서 인간의 질병을 진단하고 관찰해 치료하고 건강을 되찾게 한다. 그렇지만 병든 아이나 청년에게 인격 주체로서 행동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의학의 소임이 아니다.
일찍이 마르쿠제 같은 철학자는 현대인을 가리켜 일차원적 인간이라 했고, 또 현대사회를 가리켜 일차원적 사회라 했다. 이는 인간과 사회가 풍요로운 삶의 내용을 상실하고 오로지 고속도로 같은 한 가지 차원만을 질주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구 곳곳에 항상 전쟁 위험이 도사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간은 한결같이 이기심과 지배욕의 노예가 돼 있다는 것이 바로 일차원적 인간과 사회의 특징이다. 마르쿠제는 우리 인간의 심층의식에 자리 잡은 에로스(사랑)의 힘으로 일차원적 인간과 사회를 해체하고 창조적 생명력이 꿈틀대는 다원적 인간과 사회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가장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삶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등은 사실적 과학으로서 사실을 실험, 관찰, 검증 대상으로 보고 사실의 변화 과정을 기술(記述)한다. 그러나 철학, 문학, 역사학, 신학, 교육학 같은 인문학은 대상을 설명함으로써 먼저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해명하고, 다음으로 인문학을 하는 인간이 인격 주체가 돼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체험하며 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성숙하게 한다.
예컨대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의학적으로 기술한다면 그들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일상인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뇌사(腦死)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단순한 의학적 내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다. 죽음의 의미를 역사고고학적으로 살피면 죽음은 잠시 동안의 수면이나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 등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물질적 신체와 불멸하는 영혼의 분리로 이해되기도 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죽음이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인간이 문화 창조자인 동시에 문화 피조물인 한에서 가능하다.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단순한 실증적 죽음을 넘어서 가장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삶이다.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허무가 아니라 생명의 믿음을 그리고 생동하는 정의를 제시함으로써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를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선조의 죽음을, 그리고 나와 우리의 죽음을, 또 후손의 죽음을 어떻게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고 체험하고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 성숙한 삶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기계가 설치고 캄캄한 죽음이 깔려 있더라도 죽음을 어떻게 체험할 것인지에 따라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끝까지 체험할 때 죽음이 찬란한 삶의 광명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하면서 삶의 보람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인간의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이 현상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면 누구든 예외 없이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을 수 없다. 매일 바쁘게 살면서 무거운 수레바퀴를 굴리다 보면 우리는 삶과 죽음의 본질적 의미는 망각한 채 오로지 욕망의 기계로 일상성을 장식하는 자신을 보며 경악하기도 한다.
현대인 욕망 충족의 늪에 허우적
일상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호기심, 지껄임, 반복, 지배욕, 이기심, 망각 등은 일상성을 구성하는 요소다. 식구 가운데 누군가가 아기를 낳으면 우리는 “갓난아기가 어쩌면 이렇게 잘생기고 튼튼하지? 벌써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거야!”라고 큰 호기심을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에 관한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고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숨 가쁘게 질주한다.
죽음의 일상성 역시 삶의 일상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친지나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병원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접할 기회를 가진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순간부터 화장터와 납골당이나 묘지를 거치며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상념이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죽음이 뭐지? 오복(五福)을 누리다 죽으면 그런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거지. 그런데 어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가. 그저 작은 행복이라도 잡으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다 터럭만큼도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질병이나 사고로 고생만 하다 죽어가는 것이 많은 사람의 삶 아닌가.”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2~3일만 지나도 우리는 망각의 늪에 빠져 다시금 욕망을 충족하려고 무의미한 일상성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현대인은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예외 없이 실천적 유물론자로서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확신한다. 주변을 잠깐 둘러봐도 일류 대학 나오고 많이 배워 고위관리직에 있거나, 정치권력을 소유하거나, 명예나 재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욕망 충족에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사회 지배층에 있는 엘리트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욕망 충족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말한 삶의 일상성은 물론이고 죽음의 일상성 역시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생물학, 의학, 신경생리학, 의생명공학, 생화학 등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흔히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그러한 삶과 죽음이 바로 삶과 죽음의 일상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아프면 죽음의 그림자가 두려워 그 그림자를 쫓아내고 건강을 되찾으려고 병원을 들락거린다.
의학을 비롯한 첨단 자연과학이 여러 질병을 치료하고 퇴치함으로써 인간 수명을 상당 기간 연장해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긴 해도 실증적 자연과학은 인간 본성과 아울러 문화적 특징을 충분히 해명하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을 인격 주체로 성숙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할 때 우리는 성숙한 인격 주체를 창조할 수 있는 삶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실증적 자연과학은 사실을 실험하고 관찰하고 검증함으로써 그 사실을 기록하며 발전시켜 나간다. 예컨대 의학은 실증적 과학으로서 인간의 질병을 진단하고 관찰해 치료하고 건강을 되찾게 한다. 그렇지만 병든 아이나 청년에게 인격 주체로서 행동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의학의 소임이 아니다.
일찍이 마르쿠제 같은 철학자는 현대인을 가리켜 일차원적 인간이라 했고, 또 현대사회를 가리켜 일차원적 사회라 했다. 이는 인간과 사회가 풍요로운 삶의 내용을 상실하고 오로지 고속도로 같은 한 가지 차원만을 질주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구 곳곳에 항상 전쟁 위험이 도사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간은 한결같이 이기심과 지배욕의 노예가 돼 있다는 것이 바로 일차원적 인간과 사회의 특징이다. 마르쿠제는 우리 인간의 심층의식에 자리 잡은 에로스(사랑)의 힘으로 일차원적 인간과 사회를 해체하고 창조적 생명력이 꿈틀대는 다원적 인간과 사회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가장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삶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등은 사실적 과학으로서 사실을 실험, 관찰, 검증 대상으로 보고 사실의 변화 과정을 기술(記述)한다. 그러나 철학, 문학, 역사학, 신학, 교육학 같은 인문학은 대상을 설명함으로써 먼저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해명하고, 다음으로 인문학을 하는 인간이 인격 주체가 돼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체험하며 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성숙하게 한다.
예컨대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의학적으로 기술한다면 그들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일상인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뇌사(腦死)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단순한 의학적 내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다. 죽음의 의미를 역사고고학적으로 살피면 죽음은 잠시 동안의 수면이나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 등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물질적 신체와 불멸하는 영혼의 분리로 이해되기도 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죽음이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인간이 문화 창조자인 동시에 문화 피조물인 한에서 가능하다.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단순한 실증적 죽음을 넘어서 가장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삶이다.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허무가 아니라 생명의 믿음을 그리고 생동하는 정의를 제시함으로써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를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선조의 죽음을, 그리고 나와 우리의 죽음을, 또 후손의 죽음을 어떻게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고 체험하고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 성숙한 삶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기계가 설치고 캄캄한 죽음이 깔려 있더라도 죽음을 어떻게 체험할 것인지에 따라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끝까지 체험할 때 죽음이 찬란한 삶의 광명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하면서 삶의 보람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