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샷 지점에서 힘차게 드라이버를 쳤다. 이크, ‘쪼루’가 났다. 굿샷이 아닌 굴샷이다. 굴러가는 샷이란 뜻이다. 다른 말로는 뱀샷. ‘에이 쓰파’ 소리가 나오려는데 동반자가 기분 좋게 한마디 던진다. “단오, 그런 걸 콘돔샷이라 하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응, 위험하지도 않고 만족스럽지도 않다는 뜻이야.” 와하하, 단박에 기분이 풀렸다.
그 덕분에 두 번째 샷은 정상적으로 날아갔다. 기분이 한결 나아져 다음 티샷 장소에서 대기하다 질문을 던졌다. “선배, 18홀 내내 상대 기분을 풀어줄 만한 말을 해준다면 죽이는 골프가 되겠는데요. 그런 걸 한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부를까요?”
“도인끼리 운동하니 도 골프라고 부르기도 하지. 도 골프의 핵심은 상대방 기를 살려주는 말과 행동이네. 특히 상대가 실수할 때 용기를 내라는 격려의 말로 시작하지. 물론 내 실수는 오로지 내 탓임을 상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기초야. 날씨를 탓하지 않고 페어웨이 상태를 욕하지도 말고, 그저 주어진 상황에 나를 적응시키며 동반자와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게 다야. 이것만 있으면 인생이나 골프나 어려운 게 뭐 있겠어.”
이렇게 한바탕 도 골프를 강의한 선배는 김병관 전 육군 대장이다. 단오는 한창 도 수련할 때 나를 부르던 호다. 도 골프는 2005년 그와 함께 원주비행장에서 운동할 때 우리 두 사람이 처음 제창한 것이다. 이런 양반이 38일간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국방부 장관 후보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는 이 시대 싸움꾼이자 도인 하나를 잃은 기분이다.
세간 잣대로 보면 웃기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를 변명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홀로 싸우는 그 모양새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그를 위해 한마디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인간은 상대를 모르면 미워하고 알면 사랑한다는 진리가 독자에게도 각인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와 라운딩을 할 때 나눈 말을 어록으로 정리해봤다.
드라이버 샷이 오비가 났다. 간단하게 용기를 북돋우는 말은 “오우, 뷰티풀!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샷이네. 한 번 더해봐.”
세컨드 샷에서 뒤땅을 쳤다. “조오타! 뒤땅도 내 땅이다. 이 지구에서 내가 디딜 땅만 있으면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나. 펼쳐진 땅을 찾아가는 모험은 꿈도 못 꾸지.”
어프로치 실수로 공이 그린을 넘어갔다. “햐, 장타네! 힘이 남아도니 마나님이 좋아하겠어.”
어프로치가 너무 짧다. “좋아, 그렇게 끊어가면 실수가 없어.”
퍼터가 비켜갔다. “음, 평소 밝히지 않는 도덕성이 드러나는구먼.”
해저드에 공이 빠졌다. “이 동네 토지신과 용왕님이 제물을 요구하는구나. 제물을 받았으니 다음 샷은 무조건 잘돼.”
김병관 전 대장은 경남 김해 촌놈 출신이다. 생도 시절 처음 그를 만났다. 첫 수업 시간, 웬 시커멓게 생기고 참 못생겼다 싶은 선배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모두 낄낄거리며 경제학 수업을 들었다. 지금은 아주 잘생기고 무인다운 풍모를 보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시커먼 얼굴이 영낙없는 촌놈인데 머리는 참 좋은 양반.
중대장 시절, 대대장이던 그와 두 번째 조우했다. 나는 임진강을 지키는 보병 장교이고 그는 경기 일산의 포병 대대장이라 부대가 인접했다. 그는 ‘손자병법’을 실전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설명해주곤 했는데, 전쟁사를 전공한 나로서는 참 고마웠다. 하여간 공부를 잘하면 병법을 현실에 저렇게 잘 적용할 수 있구나 하고 부러워했다.
육군대학 다닐 때 전략교수이던 그와 다시 만났다. 후배 장교에게 주로 가르치는 내용은 인간과 전쟁의 철학이었다.
현장을 무시하는 병법가는 이론에만 치우쳐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하다. 모든 전투는 살아 있는 생물이다. 원리를 끝없이 파헤치면 직관이 발달한다. 전투는 순간의 직관력이 승패를 좌우한다. 늘 사색하고 상황을 가정하라. 기습이란 없다. 내가 대처하는 방법을 평소 생각지도 않고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라. 목표는 화력으로 제압하라. 이겨 놓고 싸우려면 목표가 가장 중요하다. 부하들에게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하지 않으려면 지휘관은 전투 신이 돼야 한다. 신이 되는 지름길은 늘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고 생각하면서 전투하라. 당황하는 장수는 지게 돼 있다.
네 번째 만남은 도인으로서였다. 내가 수련에 몰두할 즈음 어느 날 새벽 육군본부 수련장에서그를 만났다. 아침 명상과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그는 이 시대를 선도할 꿈을 가진 열렬한 수련자였다.
사람이란 지구상의 연극배우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배우가 돼야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 삶의 소임에 얼마나 녹아 들어갔느냐에 따라 사후 천국과 지옥문이 갈리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도담(道談)을 나누고 명상에 심취해 군인으로서의 철학을 다졌다.
하여간 그 시대, 하나회가 사라지고 3류, 4류가 득세하던 군 수뇌부에 저런 양반이 있다는 것은 국가의 행운이라고 후배들은 좋아했다. 군인 구실에 충실하려고 열심히 운동하고 명상하며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걱정하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나는 도반(道伴)으로서 좋아했다.
“모든 것의 주인은 나” 강조
그를 장관 후보자에서 밀어낸 갖가지 의혹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를 위해 할 얘기가 많지만 세간 평가에 맡길 따름이다. 언젠가 균형 잡힌 평가를 받으리라 믿는다.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그는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일반인의 관점이나 도덕만으로는 잴 수 없는. 세간 잣대로 보면 그는 웃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도인으로서의 그는 성실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끌고 나가는 사람이다.
그랬기에 그는 도 골프를 주장했다. 병법을 알고 인간을 알았기에 골프 또한 도로서 행하라고 지인에게 늘상 강조했다. 그가 육군대학 교수부장 시절 학생 장교들에게 가르친 도 골프의 철학을 요약해보자.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천지자연과 나를 동화해야만 하는 점이 그렇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점도 그렇다. 평범한 인생을 살든 군인으로서 생활하든 기본은 동일하다. 즉, 모든 것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점이다. 주인 된 도리란 무엇인가. 내가 설계한 대로 인생을 살며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골프를 잘하고 못하는 것도 나한테 달렸다. 내가 주인이고 선생이고 학생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건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골프채는 내가 선택한다. 퍼팅을 드라이버로 하건, 세컨드 샷을 퍼터로 하건 내 마음이다. 전쟁 시 평양을 공격할 때 비행기로 때리건, 보병으로 때리건 선택은 장수가 한다. 위대한 장수는 선택의 묘를 아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시성(適時性)을 모르는 선택을 한다. 왜 승패를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하는가.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신을 함몰시킬 필요는 없다. 단지 삶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더 큰 공부 조건이라 간주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라.
내가 도인으로서의 그를 조명하는 것은 무조건 감싸려는 의도가 아니다. 단순한 도덕성 잣대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나는 그가 더 큰 지혜인으로 대중 앞에 나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이 글이 그를 위한 변명으로 읽히지 않기를. 한 인간과 그 삶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이라고 해두자.
그 덕분에 두 번째 샷은 정상적으로 날아갔다. 기분이 한결 나아져 다음 티샷 장소에서 대기하다 질문을 던졌다. “선배, 18홀 내내 상대 기분을 풀어줄 만한 말을 해준다면 죽이는 골프가 되겠는데요. 그런 걸 한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부를까요?”
“도인끼리 운동하니 도 골프라고 부르기도 하지. 도 골프의 핵심은 상대방 기를 살려주는 말과 행동이네. 특히 상대가 실수할 때 용기를 내라는 격려의 말로 시작하지. 물론 내 실수는 오로지 내 탓임을 상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기초야. 날씨를 탓하지 않고 페어웨이 상태를 욕하지도 말고, 그저 주어진 상황에 나를 적응시키며 동반자와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게 다야. 이것만 있으면 인생이나 골프나 어려운 게 뭐 있겠어.”
이렇게 한바탕 도 골프를 강의한 선배는 김병관 전 육군 대장이다. 단오는 한창 도 수련할 때 나를 부르던 호다. 도 골프는 2005년 그와 함께 원주비행장에서 운동할 때 우리 두 사람이 처음 제창한 것이다. 이런 양반이 38일간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국방부 장관 후보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는 이 시대 싸움꾼이자 도인 하나를 잃은 기분이다.
세간 잣대로 보면 웃기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를 변명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홀로 싸우는 그 모양새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그를 위해 한마디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인간은 상대를 모르면 미워하고 알면 사랑한다는 진리가 독자에게도 각인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와 라운딩을 할 때 나눈 말을 어록으로 정리해봤다.
드라이버 샷이 오비가 났다. 간단하게 용기를 북돋우는 말은 “오우, 뷰티풀!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샷이네. 한 번 더해봐.”
세컨드 샷에서 뒤땅을 쳤다. “조오타! 뒤땅도 내 땅이다. 이 지구에서 내가 디딜 땅만 있으면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나. 펼쳐진 땅을 찾아가는 모험은 꿈도 못 꾸지.”
어프로치 실수로 공이 그린을 넘어갔다. “햐, 장타네! 힘이 남아도니 마나님이 좋아하겠어.”
어프로치가 너무 짧다. “좋아, 그렇게 끊어가면 실수가 없어.”
퍼터가 비켜갔다. “음, 평소 밝히지 않는 도덕성이 드러나는구먼.”
해저드에 공이 빠졌다. “이 동네 토지신과 용왕님이 제물을 요구하는구나. 제물을 받았으니 다음 샷은 무조건 잘돼.”
김병관 전 대장은 경남 김해 촌놈 출신이다. 생도 시절 처음 그를 만났다. 첫 수업 시간, 웬 시커멓게 생기고 참 못생겼다 싶은 선배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모두 낄낄거리며 경제학 수업을 들었다. 지금은 아주 잘생기고 무인다운 풍모를 보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시커먼 얼굴이 영낙없는 촌놈인데 머리는 참 좋은 양반.
중대장 시절, 대대장이던 그와 두 번째 조우했다. 나는 임진강을 지키는 보병 장교이고 그는 경기 일산의 포병 대대장이라 부대가 인접했다. 그는 ‘손자병법’을 실전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설명해주곤 했는데, 전쟁사를 전공한 나로서는 참 고마웠다. 하여간 공부를 잘하면 병법을 현실에 저렇게 잘 적용할 수 있구나 하고 부러워했다.
육군대학 다닐 때 전략교수이던 그와 다시 만났다. 후배 장교에게 주로 가르치는 내용은 인간과 전쟁의 철학이었다.
현장을 무시하는 병법가는 이론에만 치우쳐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하다. 모든 전투는 살아 있는 생물이다. 원리를 끝없이 파헤치면 직관이 발달한다. 전투는 순간의 직관력이 승패를 좌우한다. 늘 사색하고 상황을 가정하라. 기습이란 없다. 내가 대처하는 방법을 평소 생각지도 않고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라. 목표는 화력으로 제압하라. 이겨 놓고 싸우려면 목표가 가장 중요하다. 부하들에게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하지 않으려면 지휘관은 전투 신이 돼야 한다. 신이 되는 지름길은 늘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고 생각하면서 전투하라. 당황하는 장수는 지게 돼 있다.
네 번째 만남은 도인으로서였다. 내가 수련에 몰두할 즈음 어느 날 새벽 육군본부 수련장에서그를 만났다. 아침 명상과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그는 이 시대를 선도할 꿈을 가진 열렬한 수련자였다.
사람이란 지구상의 연극배우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배우가 돼야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 삶의 소임에 얼마나 녹아 들어갔느냐에 따라 사후 천국과 지옥문이 갈리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도담(道談)을 나누고 명상에 심취해 군인으로서의 철학을 다졌다.
하여간 그 시대, 하나회가 사라지고 3류, 4류가 득세하던 군 수뇌부에 저런 양반이 있다는 것은 국가의 행운이라고 후배들은 좋아했다. 군인 구실에 충실하려고 열심히 운동하고 명상하며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걱정하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나는 도반(道伴)으로서 좋아했다.
“모든 것의 주인은 나” 강조
일러스트레이션·오동진
그랬기에 그는 도 골프를 주장했다. 병법을 알고 인간을 알았기에 골프 또한 도로서 행하라고 지인에게 늘상 강조했다. 그가 육군대학 교수부장 시절 학생 장교들에게 가르친 도 골프의 철학을 요약해보자.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천지자연과 나를 동화해야만 하는 점이 그렇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점도 그렇다. 평범한 인생을 살든 군인으로서 생활하든 기본은 동일하다. 즉, 모든 것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점이다. 주인 된 도리란 무엇인가. 내가 설계한 대로 인생을 살며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골프를 잘하고 못하는 것도 나한테 달렸다. 내가 주인이고 선생이고 학생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건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골프채는 내가 선택한다. 퍼팅을 드라이버로 하건, 세컨드 샷을 퍼터로 하건 내 마음이다. 전쟁 시 평양을 공격할 때 비행기로 때리건, 보병으로 때리건 선택은 장수가 한다. 위대한 장수는 선택의 묘를 아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시성(適時性)을 모르는 선택을 한다. 왜 승패를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하는가.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신을 함몰시킬 필요는 없다. 단지 삶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더 큰 공부 조건이라 간주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라.
내가 도인으로서의 그를 조명하는 것은 무조건 감싸려는 의도가 아니다. 단순한 도덕성 잣대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나는 그가 더 큰 지혜인으로 대중 앞에 나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이 글이 그를 위한 변명으로 읽히지 않기를. 한 인간과 그 삶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이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