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커녕 명절 설움…도장 찍어!”

평소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 함께 모여 조상을 기리고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명절. 하지만 되레 가정불화를 부추기고 부부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명절만 지나면 급증하는 이혼 때문에 ‘명절 이혼’이란 신조어까지 생겼을 정도다. 이혼·가사전문 특화 법무법인인 ‘법무법인 윈’의 이인철 대표변호사는 “설, 추석 같은 명절이 지나면 이혼 상담이 평소의 1.5~2배 느는데, 그중 이혼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며 명절 후 급증하는 이혼에 대해 설명했다.

실제로 대구가정법원은 설 직후 이혼 접수가 늘어난다는 통계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해 설(1월 23일) 이후인 2~3월 이혼 접수 건수는 설 이전 708건(1월)에서 801건(2월), 870건(3월)으로 각각 13.1%와 22.8% 증가했다. 서울가정법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지난해 1월 748건이던 이혼 접수는 2월 891건, 3월 857건으로 늘어났다.

왜 많은 부부가 명절 이혼을 선택할까. 이 변호사는 “평소엔 성격 차이, 배우자 외도, 경제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이혼을 고민하지만 명절 후 이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바로 가족 간 갈등”이라며 “한동안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 명절에 만나면서 갈등이 커지거나 평소 쌓였던 불만이 폭발해 이혼이라는 결론으로 귀착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 내가 이 집 며느리지 하녀냐

그러다 보니 평소엔 위자료 액수, 재산분할, 자녀양육권 등이 이혼소송 쟁점이지만 명절 이혼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명절 직후 이혼소송을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귀책사유’, 즉 이혼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밝히려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부 갈등이나 시누이, 동서와의 갈등 탓에 이혼을 결심한 아내라면 시댁 식구 혹은 남편 잘못으로 이혼에 이르게 됐음을 소송을 통해 분명히 하고자 한다. 반대로 남편 측에선 시집 식구와 잘 지내지 못하는 아내 때문에 이혼하게 됐다는 점을 밝히고 싶어 한다.

시댁 식구와의 갈등 원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며느리에게 가중되는 과도한 가사노동이다. 명절이 되면 장보기, 음식 장만하기, 상 차리기, 상 치우기, 집 청소 등 가사노동량이 늘어난다. 그런데 이런 가사노동이 전부 며느리 차지가 되면 당사자 처지에선 당연히 소외감과 반발심이 일면서 불만이 생긴다. 여기에 시집 식구들이 ‘일손 부족’을 이유로 며느리의 친정 방문을 막으면 불만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서울 대림동에 거주하는 손모 씨는 3년 전 시댁에서 돌아오는 귀경길에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두 달 후 12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2남3녀 중 장남인 남편은 부모 말이라면 거역하지 못하는 효자에 동생들을 끔찍이 아끼는 맏이였지만, 그로 인한 화는 전부 맏며느리 손씨 몫이었다.

손씨는 “명절만 되면 친정 나들이 온 시누이들이 애들을 맡겨두고 놀러 나가고, 시이모들도 시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려고 자식들을 데리고 찾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그 수발은 모두 내 몫이었다”며 “혼자 되신 친정어머니도 찾아뵙지 못하고 시댁에서 하녀처럼 일하는 내 앞에서 ‘넌 친정에 안 가도 된다’고 막말 하는 시댁 식구와 남편을 보면서 울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은 인생을 시댁 식구 하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무서웠고, 시댁 식구와 한편이 돼 일을 시키고 남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남편도 더는 의지가 되지 않아 이혼을 결심했다”고 이혼 사유를 고백했다.

이혼·가사 분야가 전문인 이인철 변호사.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나 사위를 무시하면서 생기는 갈등도 명절 이혼의 주된 원인이다. 최근 늘어나는 사위와 장모의 장서(丈壻) 갈등은 대부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이 변호사는 “며느리나 사위에 대한 무시는 대부분 결혼 전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주택 마련 문제나 혼수 문제 등으로 결혼 전 갈등을 겪었다면 그 갈등은 결혼 후에도 풀리지 않고 더욱 심해진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집이나 사업체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부모 쪽에서 자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이 며느리나 사위를 무시하는 발언이나 행동으로 나타난다.”

명절 이혼의 주된 사유가 가족 간 갈등인 만큼 이혼 과정에서도 가족 입김이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여자형제 손에 이끌려 이혼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남편이나, 친정 부모를 따라온 아내 모습은 변호사 사무실에선 흔한 풍경이다. 이런 경우 “왜 우리 아이가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나”라는 하소연이 빈번히 따라붙는다. 이 말에는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진 성 구실과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채 예전의 성 구실만을 고수하려는 가족문화 간 괴리감이 들어 있다.

# 남편 정신 똑바로 차려

자라는 동안 가정 내 성차별을 겪어보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 못지않게’ 대접받으며 살아온 요즘 며느리와 전통적인 며느리상(像)을 당연시하며 ‘며느리 도리’를 강요하는 시집 식구가 만나면 십중팔구 갈등이 빚어진다. 실제로 ‘시월드’ 등 결혼생활 관련 신조어를 유행시킨 국내 최대 ‘며느리 게시판’인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의 미즈넷을 보면 “‘아들-며느리 도리’만 도리가 아니고 ‘딸-사위 도리’도 도리”(닉네임 루루블루)라며 아들 딸 구분 없이 똑같이 ‘도리’가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이나, “일하는 것보다 힘든 건 일하는 사람 취급받는 것”(닉네임 cara00)이라며 며느리에게 일방적으로 명절 노동을 강요하는 건 문제라는 주장이 큰 공감을 얻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고충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자기 생각만 내세워 며느리에게 노동을 강요하거나, 며느리로서의 도리는 다하지 않고 시댁 식구를 ‘구시대적 인간’으로 매도하는 등의 일방통행적 소통은 가족 간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경우 갈등을 증폭시키는 결정적 구실을 하는 사람이 바로 남편일 수도 있다고 이 변호사는 지적한다.

“중재를 해야 할 남편이 오히려 자기 식구 편에 서서 함께 비방하거나, 아내 고충을 무시하고 외면하면 소외감이 더욱 커지면서 남편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명절의 진정한 의미는 평소 각자 사정으로 떨어져 있던 가족과 친척이 한데 모여 그간의 그리움을 확인하고 정을 다지는 데 있다. 따라서 결혼이라는 끈으로 가족 일원이 된 며느리나 사위가 가족의 정을 나누는 명절에 소외감과 모멸감으로 상처 받고 가족 틀을 벗어나고자 결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이 변호사는 “명절 이혼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 부부간 대화와 배우자에 대한 이해”라고 충고했다. 쌍방이 이혼을 원한다면 별 도리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의 조언은 매우 유효해 보인다. 이젠 부부가 서로의 처지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