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에서 자신을 ‘컬렉터’라고 대놓고 말하는 몇 안 되는 미술품 전문 수집가인 안병광(55) 유니온약품그룹 회장은 기자의 막연한 미술품 수집 호기심에 경고를 보낸다. 자신의 재력에 따라 비싼 수업료든 싼 수업료든 대가를 치른 만큼 그림에 대한 안목도 키울 수 있다는 게 안 회장의 지론.
위작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숙명
“사람들은 많이 보면 눈이 트이고, 많이 들으면 귀가 열린다고 하죠. 그러나 제가 경험한 바로는 예술품은 많이 보다 보면 귀가 열리고, 많이 듣다 보면 눈이 트인다는 거예요. 미술품은 수많은 정보를 숨긴 채 능청스럽게 조명을 받으며 화랑 벽에 걸려 있어요. ‘너희가 나를 본들 무엇을 알겠느냐’는 듯 짐짓 권위적인 태도로 말이죠. 미술품을 침묵으로 마주했을 때는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지만 귀를 열고 보세요. 작가의 말이나 작품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 작품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집약적인 정보를 얻게 됩니다. 미술품 혹은 작가의 과거 이력과 미래 전망이 고스란히 나만의 생각, 나만의 그림 보는 법으로 정리되죠.”
그래서 안 회장은 미술품 수집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남의 말에 귀를 열고 나의 마음에 눈을 떠라”고 충고한다. 25년간 미술품 컬렉터 길을 걸어오면서 체득한 종합적인 결론이다.
물론 그 자신 역시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면서 여기까지 왔다. 현재 안 회장은 그 유명한 이중섭의 ‘황소’ 그림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 작가의 대표작 100여 점을 소장해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미술 컬렉터이다. 그림을 전문으로 수집하는 컬렉터가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밝히는 것도 흔치 않은데, 그는 최근 자신의 그림 인생을 정리해 책(‘마침내 미술관’)으로도 출간했다.
안 회장은 저서에서 미술품을 수집하다 보면 위작(僞作)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미술품 수집 전문가가 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전공 필수’ 과목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안 회장 역시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2005년 이중섭 타계 50주년 행사비를 마련하려고 유족이 ‘물고기와 아이들’을 비롯해 작품 8점을 서울옥션에 내놓은 적이 있다. 이중섭을 특별히 좋아해 이미 상당수를 소장하고 있던 안 회장은 당시 3점을 구매했는데, 이것이 모두 가짜로 밝혀진 것이다.
“유족이 직접 내놓은 작품을 구매했다가 위작으로 판명 났으니, 그때는 세상에 누굴 믿고 미술품을 사야 하나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어요. 그러나 모든 작품에 의심의 시선을 보내야 하는 것은 오히려 미술 애호가로서 자신을 더 괴롭히는 일이기도 해요.
일단 미술품 시장에는 늘 진짜와 가짜가 공존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술품이 늘 위작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진품이 가진 매력 때문이죠. 그러니 빛(진품)에 어둠(위작)이 따라오는 것을 탓하기보다 스스로 어둠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안목을 갖추는 게 수집가로선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서울미술관 개관 기념 포스터.
또 고가 작품일 경우도 위작이 나돈다. 작품이 비싸다는 것은 그 작품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그러니 누군가는 가짜 그림을 만들어 음성적으로 거래하겠다는 불온한 생각을 품게 되는 것. 위작을 구매한 사람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 시장에 작품을 내놓은 다음에야 그 작품이 가짜임을 알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모두가 위작이라고 판단한 작품이 훗날 진품으로 판가름 나기도 하는 것. 화가는 언제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세상에 발표하지 않은 작품도 많다. 시장에서 거래한 작품만 진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림 풍이 다르거나 소재가 다르다고 해서 섣불리 위작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안병광 회장이 35억6000만 원에 낙찰 받은 이중섭 작품의 ‘황소’ (왼쪽). 서울미술관 개관 기념 전시회에 출품된 한묵의 ‘모자상’.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출발해 현재 연매출 3000억 원에 육박하는 의약품 전문 유통업체 유니온약품그룹을 일으킨 안 회장과 그림의 인연 역시 약과 떼려야 뗄 수 없다.
“1983년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서울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을 찾았다가 갑작스레 소나기를 만났어요. 병원 옆 액자가게 처마에서 잠시 비를 피하는데 이중섭의 ‘황소’ 그림이 눈에 들어왔어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독특한 소 그림이라 저절로 빨려 들어갔죠. ‘소를 저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면서요. 그래서 수중에 있던 7000원을 탈탈 털어 샀는데, 가게 주인이 이건 오리지널이 아니라 복제 프린트라는 거예요. 저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림을 내놓으면서 ‘언젠가는 진짜 황소 그림을 선물하겠다’고 다짐했죠.”
그의 다짐은 28년 만에 현실이 됐다.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안 회장은 35억6000만 원에 이중섭의 진짜 ‘황소’ 그림을 낙찰 받아 아내에게 선물했다. 이 ‘황소’ 그림은 안 회장이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기슭에 세운 서울미술관(관장 이주헌) 개관 기념전(8월 29일~11월 21일)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한다.
그는 자신을 그림 세계로 이끌어준 영업사원 시절의 선배가 생각난다고 밝힌다. 그 선배는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영업실적이 좋으면 좋을수록 심성이 메말라갈 수 있는 영업사원의 일상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그림 수집을 취미로 권했다는 것.
“마음을 뒤흔드는 그림 한 점을 온전히 가지려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었다고 하면 지금도 이해 못 할 사람이 많을 거예요. 저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가지려 쏟아 부은 기회비용이 그 어떤 투자나 금전적 이득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소장하는 것은 미래 가치에 투자하는 일이자 인생의 아름다움에 투자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안 회장은 또 그림은 사람과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빛나게 해주는 동력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저는 삶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주로 미술품에서 얻었어요. 미술품을 가까이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이 미술가의 삶과 정신이었죠. 그들의 드라마틱한 삶 자체는 그들이 빚어낸 영원불멸의 예술작품과 일치합니다. 평생을 두고 예술을 고민하면서도, 가족과 끼니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무력감에 시달리면서도 생의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살아간 그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진정성과 예술에 대한 경외심은 제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죠.”
서울미술관과 함께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하는 석파정. 안 회장 소유의 이 건물은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안 회장은 하루하루 바쁜 일상에 쫓겨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자기계발서 한 권이 아닌 미술품 한 점이 아닐까 하고 되묻는다. 인생에 스승이 될 만한 작품을 얻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미술품과 더불어 감히 부록이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선물이 원 플러스 원(1+1)처럼 따라오는데, 그것이 바로 작품값보다 비싼 이름값을 가진 미술가라는 것. 그래서 미술품 수집가가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미술품이 아니라 미술가이며, 그 미술품과 미술가에게서 진정으로 값진 인생의 지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 회장은 그래서 미술품 수집가 하면 으레 예술을 돈으로 따지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시선을 바꿀 때도 됐다고 말한다. 특히 수년 전부터 미술품이 유용한 재테크 수단이 되고, 최근에는 치부(致富) 수단으로 중국 미술품이 한국에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 상황이 안 회장에게는 영 편치 않아 보였다.
“일부 경매를 좌우하는 큰손들 때문에 미술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례도 없지 않아요. 그러한 상업적 행태를 두고 미술에 대한 순수한 호의를 논하기가 다소 민망스럽기도 하죠. 그러나 단언하건대 컬렉터가 개인의 만족과 경제적 이익만을 챙기려고 작품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과감히 그 타이틀을 버렸을 거예요.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 국가나 민족이 크게 부흥해 위세를 떨칠 때 안으로는 학문과 예술을 크게 장려했음을 알 수 있어요. 특히 문화예술에 대한 상류층의 후원이 큰 동력이 된 사례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죠. 제가 사재를 들여 많은 지인이 만류한 미술관을 지은 것도 문화예술에 대한 저 나름의 신념이면서 봉사라는 책임감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안 회장은 한 명의 미술품 수집가가 무명 작가를 세계에 알리기도 하고, 작품 가치를 훌쩍 드높이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창조성을 발굴하고 작품을 적극 주문하는 일도 수집가의 구실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안 회장의 그림 수집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서울미술관 전경(왼쪽)과 내부 전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