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으로 남북 현안에 대해 수시로 해당 책임자급 협상을 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6·25 남침에 대해 사과한 뒤 김정일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끝이다. 이어서 이명박이 한 발표도 비슷했다.
“양국 정상은 기존 합의사항을 준수하고 한반도 평화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끝났다. 아무 내용도 없는 발표였지만 김정일의 6·25 사과성명은 다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았다. 두 정상이 100가지 합의사항을 줄줄 읽는 것보다 100배는 더 감동적이었다. 김정일이 탄 고려항공의 낡고 촌스러운 비행기가 서울 하늘로 솟아오르는 장면이 TV로 방송됐다. 여론조사 기관이 이때의 대한민국 국민 심정을 그대로 읽는다면 99.9%가 김정일에 대해 ‘우호적’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김정일의 왜소한 전용기를 두고 ‘고상하다’ ‘웅장하다’고 표현하는 데도 주저 없이 한 표를 던질 것이었다.
# “아부지, 통장에서 돈 다 찾으셨어요?”
하고 홍대 근처 지하 슈퍼에서 정육점을 하는 윤재덕이 묻자 윤봉수가 대답했다.
“으응, 찾았다.”
밤 10시 반, 윤재덕은 가게 문을 닫고 영등포 당산동의 아파트로 돌아온 참이다.
“아니, 아부지. 그 돈을 어디에 쓰시려고. 그리고 영규 엄마한테 시키시지 직접 은행까지 가시다니요.”
이미 와이프 정순자한테서 전화 온 이야기를 들은 터라 윤재덕이 말을 잇는다.
“노인이 은행에서 혼자 돈 찾아 나오시면 위험하거든요. 그래서….”
“괜찮다.”
90세지만 윤봉수는 아직 정정하다. 기억력도 좋아 식구 생일은 물론 어머니 제삿날도 다 외우고 있다. 정순자가 눈짓했으므로 윤재덕은 입을 다물고는 씻고 나왔다. 집 안에는 노인까지 셋뿐이다. 두 아들 중 결혼한 큰아들 식구는 전라도 광주에서 자동차 수리소를 한다. 둘째아들은 미혼이지만 군함을 타는 해군 중사다. 소파에 앉은 윤재덕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정순자한테 물었다.
“또 전화 온 데 없어?”
“두 통 왔지만 내가 끊었어.”
정순자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노인 괴롭히면 고소한다고 했더니 금방 끊더구먼.”
인터뷰하자는 언론사들이다. 윤봉수는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아들 윤재덕이 그 대신 김정일과의 면담 내용을 밝혔을 뿐이다. 윤봉수의 사정을 들은 김정일이 최선을 다해 가족을 찾아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 방에서 나온 윤봉수가 윤재덕의 앞쪽 소파에 앉았다. 윤봉수는 오늘 낮에 은행에 가서 30여 년간 모아놓은 돈 3700만 원을 찾아왔다.
“내가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
윤봉수가 말하자 윤재덕이 머리부터 끄덕였다. 윤재덕 나이 65세, 여동생이 한 명 있었지만 어려서 죽고 어머니도 8년 전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의지하듯이 윤재덕도 아버지를 의지하고 살아왔다. 윤봉수가 말을 이었다.
“네 고모 찾으면 나를 부른다고 위원장이 말했다. 네 고모가 살아 있으면 86세다.”
윤재덕이 숨을 삼켰고 정순자는 바짝 긴장했다. 부른다는 말은 윤재덕한테도 안 했던 것이다. 고모 나이는 백번도 더 들었다. 윤봉수가 흐린 눈을 치켜뜨고 윤재덕을 보았다.
“네가 내 보험, 상조보험까정 다 찾아다오. 나는 그것까정 갖고 네 고모한테 갈란다.”
“아부지.”
“그곳에 네 조부모가 계셔. 총살당한 네 할아버지를 내가 묻어둔 곳도 가봐야겠다.”
“아부지, 그럼 저는요?”
눈을 치켜뜬 윤재덕이 윤봉수를 노려보았다.
“저는 어떻게 허구요?”
“너는 필상이, 필호가 있잖으냐? 너는 그만하면 되었다. 날 좀 보내다오.”
그러더니 윤봉수가 길게 숨을 뱉는다.
“네 고모, 살아 있을지 모를 친척들을 보고 죽는 게 내 소원이라고 했잖으냐?”
윤봉수의 시선이 정순자에게로 옮겨졌다.
“너희는 효자다. 그만하면 됐다.”
# 머리를 든 서상국이 이애주를 보았다. 얼굴에 쓴웃음이 배어나 있다.
“내가 믿지 않는다는 건 아냐. 하지만 말이야.”
둘은 지금 회사 근처 중식당 ‘남경’에서 점심을 먹는 중이다. 서상국이 말을 잇는다.
“이명박이를 만났다면 어떤 소스를 통해서라도 소문이 흘러나왔을 거야.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그 사냥개 같은 기자들이 놓치겠어?”
이애주는 잠자코 짜장면을 씹었으므로 서상국은 한숨을 뱉었다.
“이명박이를 가장한 놈들일지도 몰라. 요즘은 분장술이 하도 발달해서 말이야.”
“아유, 그만 하세요. 사장님.”
씹던 것을 삼킨 이애주가 머리를 내저었다.
“제가 괜히 말을 꺼냈어요. 그냥 잊어버리세요.”
“뜬금없이 이명박이하고 독대했다니까 내가 놀라서 그래.”
이맛살을 찌푸린 서상국이 짬뽕 그릇에 다시 젓가락을 넣는다.
“딴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 마.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이애주는 시선을 돌려 잠깐 옆쪽 벽을 보았다. 정색한 표정이다. 그러더니 문득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곧 대통령이 신풍운동에 대한 발표를 할 거예요. 노인들을 위한.”
그러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서상국을 보았다.
“그럼 그것이 제가 대통령을 만났다는 증거가 되겠네요.”
언제부터인가 이애주는 ‘이명박이’를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 그런데 발표한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이회창 국무총리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오전 10시, 이회창이 TV 화면에 나왔다. 국무총리 특별담화 형식이다. 앞서 예고했지만 내용은 밝히지 않아서 TV 앞에 국민이 꽤 모였다. 요즘은 TV 뉴스 시청률이 평균 30% 이상이다. ‘빅 뉴스’가 터지기 때문이 아니라 ‘굿 뉴스’ 때문이라는 방국 서진대학 교수의 말이 정곡을 찌른 표현이다. ‘항상’ 출판사에서는 직원들이 다 출장을 가 서상국 혼자 TV를 보고 있다. 이회창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통령 지시를 받고 신풍운동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을 발표합니다.”
이회창이 똑바로 서상국을 응시하며 말을 잇는다.
“행정안전부는 2009년 6월 1일부터 국가공무원을 포함한 개인기업 종사자들의 법적 정년을 70세로 상향 조정할 것입니다. 또한 70세에 법적으로 퇴직한다고 해도 건강에 지장이 없는 한 본인이 원한다면 75세까지 해당 직장에서 원로사원, 원로공무원 보수를 받고 근무하도록 조처할 것입니다. 이에 따른 세부 조항을 보완한 후 입법부에 넘겨 법제화하기로 당정(黨政)이 합의했습니다.”
“아니, 그러면 진짜 만난 모양이네.”
이회창이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서상국이 헛소리처럼 말했다. 그러나 치켜뜬 두 눈을 화면에서 떼지 않는다.
“이것이여, 이애주가 말혔던 노인들을 위한 신풍운동이 바로 이것이구먼.”
# 이른바 ‘정년 연장’ 발표다. ‘50세 정년’으로 사회가 급속히 ‘조루’화하면서 40대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쌓이는 것이 현실이다. ‘50세 정년’은 경제 불황과 취업률 감소에서 발생한 직업인구의 빠른 순환이 원인일 것이었다. 젊은 두뇌가 필요해서라기보다 정년을 앞당겨 내보내야 대기층인 젊은이들을 취업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은 종교세 세수 증가와 내부 정리로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법적 정년을 70세로 상향 조정했다. 건강에 이상만 없다면 ‘원로사원’으로 75세까지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년 후 닥쳐올 불안한 미래 탓에 방황하던 40대부터 50대까지 환호하는 것은 당연했다. 재정당국과 일부 기업은 울상을 지었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이만큼 지지받은 정책은 없을 것이다. 재빠른 여론조사 기관들이 발표 날에 조사한 결과, 7개 기관에서 평균 지지율이 87%가 나왔다.
“아버지, TV 보셨죠?”
이회창의 발표가 끝났을 때 이애주가 전주에 있는 아버지 이영철에게 전화했다. 이영철은 전주 서학동 보국아파트 경비원이다.
“어, 봤다.”
이영철의 목소리도 흥분으로 떨렸다.
“니 말이 맞구나.”
이애주는 이영철한테도 대통령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대통령이 노인들을 위한 신풍운동을 곧 발표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더니 반응이 싸늘했다. 아니, 오히려 이애주한테 ‘이명배기’ 만났다는 이야기를 남한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네가 전주에서 그런 말 하고 다니면 왕따당한다고도 했다. 이명배기가 인기는 높지만 아직 떠들고 다닐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애주가 말을 잇는다.
“아버지, 들으셨죠? 70세 미만의 퇴직자는 원직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거 말이에요.”
“응, 들었어.”
“거기 그만두실 거지요?”
“응, 내일 사표 내련다.”
“아버지.”
해놓고 이애주는 목이 메었고 이영철도 가만히 있었다. 이영철은 54세. 작년에 다니던 대기업 계열사에서 부장으로 명퇴한 후 월급 85만 원짜리 경비역에 취직했다. 이애주 밑에 대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돈 들어갈 자식이 둘이나 있는 터라 집에서 놀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영철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애주야, 인자 아버지 살맛난다.”
# “아니, 국가재정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버럭 소리쳤던 이용섭 민주당 의원이 곧 입을 다물었다. 김진표 의원실 안이다. 방 안에는 강봉균, 김효석까지 넷이 모여 앉았는데 모두 경제통이다. 그들은 지금 ‘70세 정년’에 대해 토론 중이다.
“나 원, 이것 참.”
반응이 없자 답답한 이용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자리가 300만 개는 더 늘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재정을 펑펑 쏟아부어야 한단 말입니다.”
다 아는 소리다. 모두 다 경제에 일가견이 있는 터라 이번 ‘70세 정년’에 대한 반대토론을 하라면 24시간 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자료를 안 보고도 그렇다. 그때 강봉균이 입을 열었다.
“냅둬야지 어쩌겠소?”
모두의 시선을 받은 강봉균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나서면 야당이 국가재정 걱정헌다고 국민이 비웃기부터 헐 거요. 그것이 여론이거든.”
모두 입을 다물었고 강봉균이 말을 이었다.
“논리와 증거를 대고 조목조목 반대할수록 지지율은 추풍낙엽이 될 거요. 가만있는 게 낫습니다.”
추풍낙엽 정도가 아니다. 현장에 익숙한 지역구 출신들이어서 민심에 민감한 그들이다. 반대했다가는 노인들한테 몰매를 맞을 수도 있다.
# 청와대 비서실장 조순형이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이명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 실장, 무슨 일 있습니까?”
“예?”
정색한 조순형이 다가가 묻자 이명박이 다시 묻는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조순형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군요. 기뻐서 그렇습니다.”
“기쁘다니요?”
테이블 옆에 선 조순형이 말을 잇는다.
“지금 정부 각 부처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대통령님.”
“….”
“퇴직금, 연금을 받고 나간 퇴직자들이 연금을 어떻게 반환하느냐고 문의를 해오는 통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고 합니다.”
아직 방법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금이나 퇴직금을 반환하지 못했다고 재취업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70세 정년’ 원칙에 어긋난다. 국무총리 이회창이 발표를 한 지 일주일, 지금 정부당국과 여당 실무자들은 머리를 싸매고 연구 중이다. 2009년 6월 1일 시행을 위해 5월 15일까지는 법을 공포해야 하는 것이다. 모두 죽겠다고 아우성치지만 행복한 비명이다. 그때 조순형이 말을 이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대통령님.”
이명박의 시선을 받은 조순형이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조순형이 그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민주당에서 ‘70세 정년’ 입법화 작업을 돕겠다고 강봉균 의원 등 10여 명이 지원을 해왔습니다.”
놀란 이명박이 눈만 치켜떴고 조순형의 목소리가 열기를 띠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니만치 좋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대통령님.”
“그렇지요.”
이명박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 양반들 머리가 좋지요.”
“이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대통령님.”
둘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당장에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제각기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기 때문일 것이다.
# “내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
전두환이 정색하고 말했다.
“나하고 이대통령하고 마인드가 같았던 거라.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장세동이 대답했지만 말에 억양이 없다. 단조로운 목소리인 것이다. 그러자 전두환이 눈썹을 모았다.
“왜?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각하.”
장세동은 둘이 있을 때는 각하라고 부른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그때 전두환이 지그시 장세동을 보았다. 둘은 세상이 다 아는 복심(腹心) 관계다. 그것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의리의 표본으로 삼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일 것이다.
“왜? 무슨 일 있나?”
“예, 각하.”
심호흡을 한 장세동이 전두환을 똑바로 보았다.
“저한테 군 복귀를 희망하는 청원이 벌써 수십 건 들어왔습니다, 각하.”
“….”
“‘70세 정년’ 법에 군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복귀한 장성급은 50여 명밖에 안 됩니다.”
“….”
“영관급 중 계급정년에 밀렸거나 예편될 장군 가운데 희망자는 복귀시켜야 ‘70세 정년’ 취지에도 맞습니다.”
“그렇다.”
마침내 전두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대통령께 건의하겠다.”
# “개판이군.”
뱉듯이 말한 김영삼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나에게도 공과(功過)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민주주의 뿌리를 확고하게 심은 사람은 바로 나다.”
옆쪽에 선 김현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산 본가에 내려온 김영삼은 김현철과 함께 방금 ‘70세 정년’에 직업군인도 포함된다는 뉴스를 들은 것이다. 김영삼이 말을 잇는다.
“내가 다 정비해놓은 민주체제, 군 파벌 해체, 정치 불간섭 체제가 이명박이 시대에 와서 확 무너졌다.”
김현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원로에 비해 아버지가 소외당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제각기 용도를 부여받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다른 원로들을 보면 김현철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 아버지가 무엇이 부족한가? 내 아버지만한 정치인이 있는가? 아버지와 비교하면 다른 전직은 연예인, 빠돌이 대장, 독재자, 뒷거래 명수일 뿐이다. 그때 방으로 비서 윤규환이 들어섰으므로 둘의 시선이 옮겨졌다. 윤규환이 손에 쥔 무선전화기를 김영삼에게 내밀며 말했다.
“각하, 세우리당 김무성 총무입니다.”
“응? 김무성이가?”
눈을 크게 뜬 김영삼이 전화기를 받아 쥐었다. 긴장한 김현철의 시선을 받은 채 김영삼이 송화구에 대고 말한다.
“응, 김 총무. 무신 일이고?”
“예, 대통령님. 안녕하셨습니까?”
김무성의 굵은 목소리가 떨어져 있는 김현철에게도 들렸다. 김영삼이 대답한다.
“아, 나야 괜찮제. 거긴 이제 노인들한테 점수 따려고 난리더라. 하긴 노인표가 많아졌제.”
“예, 바쁩니다. 대통령님.”
“그래, 무신 일이고?”
“이번 경남에서 보궐선거 두 곳이 있는데 김현철 씨를 저희 당에서 공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통령님.”
“….”
“유능한 인재를 중용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는 대통령님의 뜻을 이어 행동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모두 동의했습니다.”
“말은 잘한다.”
했지만 김영삼의 말끝이 떨렸다. 헛기침을 한 김영삼이 말을 잇는다.
“너거들, 날 무시하믄 안 된다. 잘 생각해보래이. 내 뒤가 제일 깨끗하다는기 역사가 판단해줄 끼다.”
“명심하겠습니다.”
“여기 현철이 있으니까 이야기하고 바로 자네한테 올려보내 다.”
“예, 대통령님.”
“전화 끊는다.”
그래 놓고 전화기를 윤규환에게 건네준 김영삼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다 들었쟈?”
머리를 든 김영삼이 묻자 김현철이 대답했다.
“예, 아버님.”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김영삼이 혼잣소리를 했다.
“이명배기 냄새가 난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쉰다.
6·25 남침에 대해 사과한 뒤 김정일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끝이다. 이어서 이명박이 한 발표도 비슷했다.
“양국 정상은 기존 합의사항을 준수하고 한반도 평화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끝났다. 아무 내용도 없는 발표였지만 김정일의 6·25 사과성명은 다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았다. 두 정상이 100가지 합의사항을 줄줄 읽는 것보다 100배는 더 감동적이었다. 김정일이 탄 고려항공의 낡고 촌스러운 비행기가 서울 하늘로 솟아오르는 장면이 TV로 방송됐다. 여론조사 기관이 이때의 대한민국 국민 심정을 그대로 읽는다면 99.9%가 김정일에 대해 ‘우호적’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김정일의 왜소한 전용기를 두고 ‘고상하다’ ‘웅장하다’고 표현하는 데도 주저 없이 한 표를 던질 것이었다.
# “아부지, 통장에서 돈 다 찾으셨어요?”
하고 홍대 근처 지하 슈퍼에서 정육점을 하는 윤재덕이 묻자 윤봉수가 대답했다.
“으응, 찾았다.”
밤 10시 반, 윤재덕은 가게 문을 닫고 영등포 당산동의 아파트로 돌아온 참이다.
“아니, 아부지. 그 돈을 어디에 쓰시려고. 그리고 영규 엄마한테 시키시지 직접 은행까지 가시다니요.”
이미 와이프 정순자한테서 전화 온 이야기를 들은 터라 윤재덕이 말을 잇는다.
“노인이 은행에서 혼자 돈 찾아 나오시면 위험하거든요. 그래서….”
“괜찮다.”
90세지만 윤봉수는 아직 정정하다. 기억력도 좋아 식구 생일은 물론 어머니 제삿날도 다 외우고 있다. 정순자가 눈짓했으므로 윤재덕은 입을 다물고는 씻고 나왔다. 집 안에는 노인까지 셋뿐이다. 두 아들 중 결혼한 큰아들 식구는 전라도 광주에서 자동차 수리소를 한다. 둘째아들은 미혼이지만 군함을 타는 해군 중사다. 소파에 앉은 윤재덕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정순자한테 물었다.
“또 전화 온 데 없어?”
“두 통 왔지만 내가 끊었어.”
정순자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노인 괴롭히면 고소한다고 했더니 금방 끊더구먼.”
인터뷰하자는 언론사들이다. 윤봉수는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아들 윤재덕이 그 대신 김정일과의 면담 내용을 밝혔을 뿐이다. 윤봉수의 사정을 들은 김정일이 최선을 다해 가족을 찾아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 방에서 나온 윤봉수가 윤재덕의 앞쪽 소파에 앉았다. 윤봉수는 오늘 낮에 은행에 가서 30여 년간 모아놓은 돈 3700만 원을 찾아왔다.
“내가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
윤봉수가 말하자 윤재덕이 머리부터 끄덕였다. 윤재덕 나이 65세, 여동생이 한 명 있었지만 어려서 죽고 어머니도 8년 전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의지하듯이 윤재덕도 아버지를 의지하고 살아왔다. 윤봉수가 말을 이었다.
“네 고모 찾으면 나를 부른다고 위원장이 말했다. 네 고모가 살아 있으면 86세다.”
윤재덕이 숨을 삼켰고 정순자는 바짝 긴장했다. 부른다는 말은 윤재덕한테도 안 했던 것이다. 고모 나이는 백번도 더 들었다. 윤봉수가 흐린 눈을 치켜뜨고 윤재덕을 보았다.
“네가 내 보험, 상조보험까정 다 찾아다오. 나는 그것까정 갖고 네 고모한테 갈란다.”
“아부지.”
“그곳에 네 조부모가 계셔. 총살당한 네 할아버지를 내가 묻어둔 곳도 가봐야겠다.”
“아부지, 그럼 저는요?”
눈을 치켜뜬 윤재덕이 윤봉수를 노려보았다.
“저는 어떻게 허구요?”
“너는 필상이, 필호가 있잖으냐? 너는 그만하면 되었다. 날 좀 보내다오.”
그러더니 윤봉수가 길게 숨을 뱉는다.
“네 고모, 살아 있을지 모를 친척들을 보고 죽는 게 내 소원이라고 했잖으냐?”
윤봉수의 시선이 정순자에게로 옮겨졌다.
“너희는 효자다. 그만하면 됐다.”
# 머리를 든 서상국이 이애주를 보았다. 얼굴에 쓴웃음이 배어나 있다.
“내가 믿지 않는다는 건 아냐. 하지만 말이야.”
둘은 지금 회사 근처 중식당 ‘남경’에서 점심을 먹는 중이다. 서상국이 말을 잇는다.
“이명박이를 만났다면 어떤 소스를 통해서라도 소문이 흘러나왔을 거야.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그 사냥개 같은 기자들이 놓치겠어?”
이애주는 잠자코 짜장면을 씹었으므로 서상국은 한숨을 뱉었다.
“이명박이를 가장한 놈들일지도 몰라. 요즘은 분장술이 하도 발달해서 말이야.”
“아유, 그만 하세요. 사장님.”
씹던 것을 삼킨 이애주가 머리를 내저었다.
“제가 괜히 말을 꺼냈어요. 그냥 잊어버리세요.”
“뜬금없이 이명박이하고 독대했다니까 내가 놀라서 그래.”
이맛살을 찌푸린 서상국이 짬뽕 그릇에 다시 젓가락을 넣는다.
“딴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 마.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이애주는 시선을 돌려 잠깐 옆쪽 벽을 보았다. 정색한 표정이다. 그러더니 문득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곧 대통령이 신풍운동에 대한 발표를 할 거예요. 노인들을 위한.”
그러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서상국을 보았다.
“그럼 그것이 제가 대통령을 만났다는 증거가 되겠네요.”
언제부터인가 이애주는 ‘이명박이’를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 그런데 발표한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이회창 국무총리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오전 10시, 이회창이 TV 화면에 나왔다. 국무총리 특별담화 형식이다. 앞서 예고했지만 내용은 밝히지 않아서 TV 앞에 국민이 꽤 모였다. 요즘은 TV 뉴스 시청률이 평균 30% 이상이다. ‘빅 뉴스’가 터지기 때문이 아니라 ‘굿 뉴스’ 때문이라는 방국 서진대학 교수의 말이 정곡을 찌른 표현이다. ‘항상’ 출판사에서는 직원들이 다 출장을 가 서상국 혼자 TV를 보고 있다. 이회창이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통령 지시를 받고 신풍운동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을 발표합니다.”
이회창이 똑바로 서상국을 응시하며 말을 잇는다.
“행정안전부는 2009년 6월 1일부터 국가공무원을 포함한 개인기업 종사자들의 법적 정년을 70세로 상향 조정할 것입니다. 또한 70세에 법적으로 퇴직한다고 해도 건강에 지장이 없는 한 본인이 원한다면 75세까지 해당 직장에서 원로사원, 원로공무원 보수를 받고 근무하도록 조처할 것입니다. 이에 따른 세부 조항을 보완한 후 입법부에 넘겨 법제화하기로 당정(黨政)이 합의했습니다.”
“아니, 그러면 진짜 만난 모양이네.”
이회창이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서상국이 헛소리처럼 말했다. 그러나 치켜뜬 두 눈을 화면에서 떼지 않는다.
“이것이여, 이애주가 말혔던 노인들을 위한 신풍운동이 바로 이것이구먼.”
# 이른바 ‘정년 연장’ 발표다. ‘50세 정년’으로 사회가 급속히 ‘조루’화하면서 40대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쌓이는 것이 현실이다. ‘50세 정년’은 경제 불황과 취업률 감소에서 발생한 직업인구의 빠른 순환이 원인일 것이었다. 젊은 두뇌가 필요해서라기보다 정년을 앞당겨 내보내야 대기층인 젊은이들을 취업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은 종교세 세수 증가와 내부 정리로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법적 정년을 70세로 상향 조정했다. 건강에 이상만 없다면 ‘원로사원’으로 75세까지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년 후 닥쳐올 불안한 미래 탓에 방황하던 40대부터 50대까지 환호하는 것은 당연했다. 재정당국과 일부 기업은 울상을 지었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이만큼 지지받은 정책은 없을 것이다. 재빠른 여론조사 기관들이 발표 날에 조사한 결과, 7개 기관에서 평균 지지율이 87%가 나왔다.
“아버지, TV 보셨죠?”
이회창의 발표가 끝났을 때 이애주가 전주에 있는 아버지 이영철에게 전화했다. 이영철은 전주 서학동 보국아파트 경비원이다.
“어, 봤다.”
이영철의 목소리도 흥분으로 떨렸다.
“니 말이 맞구나.”
이애주는 이영철한테도 대통령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대통령이 노인들을 위한 신풍운동을 곧 발표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더니 반응이 싸늘했다. 아니, 오히려 이애주한테 ‘이명배기’ 만났다는 이야기를 남한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네가 전주에서 그런 말 하고 다니면 왕따당한다고도 했다. 이명배기가 인기는 높지만 아직 떠들고 다닐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애주가 말을 잇는다.
“아버지, 들으셨죠? 70세 미만의 퇴직자는 원직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거 말이에요.”
“응, 들었어.”
“거기 그만두실 거지요?”
“응, 내일 사표 내련다.”
“아버지.”
해놓고 이애주는 목이 메었고 이영철도 가만히 있었다. 이영철은 54세. 작년에 다니던 대기업 계열사에서 부장으로 명퇴한 후 월급 85만 원짜리 경비역에 취직했다. 이애주 밑에 대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돈 들어갈 자식이 둘이나 있는 터라 집에서 놀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영철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애주야, 인자 아버지 살맛난다.”
# “아니, 국가재정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버럭 소리쳤던 이용섭 민주당 의원이 곧 입을 다물었다. 김진표 의원실 안이다. 방 안에는 강봉균, 김효석까지 넷이 모여 앉았는데 모두 경제통이다. 그들은 지금 ‘70세 정년’에 대해 토론 중이다.
“나 원, 이것 참.”
반응이 없자 답답한 이용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자리가 300만 개는 더 늘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재정을 펑펑 쏟아부어야 한단 말입니다.”
다 아는 소리다. 모두 다 경제에 일가견이 있는 터라 이번 ‘70세 정년’에 대한 반대토론을 하라면 24시간 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자료를 안 보고도 그렇다. 그때 강봉균이 입을 열었다.
“냅둬야지 어쩌겠소?”
모두의 시선을 받은 강봉균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나서면 야당이 국가재정 걱정헌다고 국민이 비웃기부터 헐 거요. 그것이 여론이거든.”
모두 입을 다물었고 강봉균이 말을 이었다.
“논리와 증거를 대고 조목조목 반대할수록 지지율은 추풍낙엽이 될 거요. 가만있는 게 낫습니다.”
추풍낙엽 정도가 아니다. 현장에 익숙한 지역구 출신들이어서 민심에 민감한 그들이다. 반대했다가는 노인들한테 몰매를 맞을 수도 있다.
# 청와대 비서실장 조순형이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이명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 실장, 무슨 일 있습니까?”
“예?”
정색한 조순형이 다가가 묻자 이명박이 다시 묻는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조순형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군요. 기뻐서 그렇습니다.”
“기쁘다니요?”
테이블 옆에 선 조순형이 말을 잇는다.
“지금 정부 각 부처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대통령님.”
“….”
“퇴직금, 연금을 받고 나간 퇴직자들이 연금을 어떻게 반환하느냐고 문의를 해오는 통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고 합니다.”
아직 방법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금이나 퇴직금을 반환하지 못했다고 재취업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70세 정년’ 원칙에 어긋난다. 국무총리 이회창이 발표를 한 지 일주일, 지금 정부당국과 여당 실무자들은 머리를 싸매고 연구 중이다. 2009년 6월 1일 시행을 위해 5월 15일까지는 법을 공포해야 하는 것이다. 모두 죽겠다고 아우성치지만 행복한 비명이다. 그때 조순형이 말을 이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대통령님.”
이명박의 시선을 받은 조순형이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조순형이 그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민주당에서 ‘70세 정년’ 입법화 작업을 돕겠다고 강봉균 의원 등 10여 명이 지원을 해왔습니다.”
놀란 이명박이 눈만 치켜떴고 조순형의 목소리가 열기를 띠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니만치 좋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대통령님.”
“그렇지요.”
이명박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 양반들 머리가 좋지요.”
“이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대통령님.”
둘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당장에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제각기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기 때문일 것이다.
# “내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
전두환이 정색하고 말했다.
“나하고 이대통령하고 마인드가 같았던 거라.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장세동이 대답했지만 말에 억양이 없다. 단조로운 목소리인 것이다. 그러자 전두환이 눈썹을 모았다.
“왜?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각하.”
장세동은 둘이 있을 때는 각하라고 부른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그때 전두환이 지그시 장세동을 보았다. 둘은 세상이 다 아는 복심(腹心) 관계다. 그것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의리의 표본으로 삼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일 것이다.
“왜? 무슨 일 있나?”
“예, 각하.”
심호흡을 한 장세동이 전두환을 똑바로 보았다.
“저한테 군 복귀를 희망하는 청원이 벌써 수십 건 들어왔습니다, 각하.”
“….”
“‘70세 정년’ 법에 군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복귀한 장성급은 50여 명밖에 안 됩니다.”
“….”
“영관급 중 계급정년에 밀렸거나 예편될 장군 가운데 희망자는 복귀시켜야 ‘70세 정년’ 취지에도 맞습니다.”
“그렇다.”
마침내 전두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대통령께 건의하겠다.”
# “개판이군.”
뱉듯이 말한 김영삼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나에게도 공과(功過)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민주주의 뿌리를 확고하게 심은 사람은 바로 나다.”
옆쪽에 선 김현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산 본가에 내려온 김영삼은 김현철과 함께 방금 ‘70세 정년’에 직업군인도 포함된다는 뉴스를 들은 것이다. 김영삼이 말을 잇는다.
“내가 다 정비해놓은 민주체제, 군 파벌 해체, 정치 불간섭 체제가 이명박이 시대에 와서 확 무너졌다.”
김현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원로에 비해 아버지가 소외당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제각기 용도를 부여받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다른 원로들을 보면 김현철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 아버지가 무엇이 부족한가? 내 아버지만한 정치인이 있는가? 아버지와 비교하면 다른 전직은 연예인, 빠돌이 대장, 독재자, 뒷거래 명수일 뿐이다. 그때 방으로 비서 윤규환이 들어섰으므로 둘의 시선이 옮겨졌다. 윤규환이 손에 쥔 무선전화기를 김영삼에게 내밀며 말했다.
“각하, 세우리당 김무성 총무입니다.”
“응? 김무성이가?”
눈을 크게 뜬 김영삼이 전화기를 받아 쥐었다. 긴장한 김현철의 시선을 받은 채 김영삼이 송화구에 대고 말한다.
“응, 김 총무. 무신 일이고?”
“예, 대통령님. 안녕하셨습니까?”
김무성의 굵은 목소리가 떨어져 있는 김현철에게도 들렸다. 김영삼이 대답한다.
“아, 나야 괜찮제. 거긴 이제 노인들한테 점수 따려고 난리더라. 하긴 노인표가 많아졌제.”
“예, 바쁩니다. 대통령님.”
“그래, 무신 일이고?”
“이번 경남에서 보궐선거 두 곳이 있는데 김현철 씨를 저희 당에서 공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통령님.”
“….”
“유능한 인재를 중용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는 대통령님의 뜻을 이어 행동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모두 동의했습니다.”
“말은 잘한다.”
했지만 김영삼의 말끝이 떨렸다. 헛기침을 한 김영삼이 말을 잇는다.
“너거들, 날 무시하믄 안 된다. 잘 생각해보래이. 내 뒤가 제일 깨끗하다는기 역사가 판단해줄 끼다.”
“명심하겠습니다.”
“여기 현철이 있으니까 이야기하고 바로 자네한테 올려보내 다.”
“예, 대통령님.”
“전화 끊는다.”
그래 놓고 전화기를 윤규환에게 건네준 김영삼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다 들었쟈?”
머리를 든 김영삼이 묻자 김현철이 대답했다.
“예, 아버님.”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김영삼이 혼잣소리를 했다.
“이명배기 냄새가 난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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