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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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셰익스피어 짝사랑

다양한 캐릭터와 신선한 플롯은 상업영화의 아이콘

  •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daum.net

    입력2012-06-18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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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우드의 셰익스피어 짝사랑

    셰익스피어의 가려진 삶을 그린 영화 ‘위대한 비밀’.

    “셰익스피어 열기가 뜨겁다. 그가 할리우드에 갔다. 웹상에도 떴다. 그는 테마 파크도, 10대 팬도 손에 넣었다. 그가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셰익스피어를 놓칠 수 있겠는가?”(‘뉴스위크’ 기자 데이비드 게이츠)

    흔히 할리우드가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으뜸 이유는 영화 제작자 중 아무도 셰익스피어에게 저작권료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셰익스피어 극에는 광기와 익살, 삶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들뜬 로맨스, 죽음을 바친 사랑, 잔혹한 모사의 희생자, 폭력과 공포 등이 골고루 들어 있다. 모두가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소재고, 모두가 인간 본성을 이루는 심리적 원형 아닌가.

    캐릭터와 극적 긴장감 고조

    사실 생전에 셰익스피어는 대학문 근처에도 못 간 촌뜨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가 살아서 돌아다녔던 1600년대에는 영어사전도 라틴어로 쓴 시절이니까. 셰익스피어는 당대에 널리 알려진 소설이나 희곡을 여러 편 각색했고, 때로는 남의 작품에서 특정 구절을 그대로 베끼기도 했다. 또 새뮤얼 존슨 같은 일부 학자는 셰익스피어 극의 인물은 도덕성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없고, 궤변(quibble)이 지나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연극의 3대 원칙인 인물, 장소, 시간 간의 일치성이 결여된 단점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셰익스피어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영화 맥락으로 들어오면 결함이 아니라 도리어 완벽한 동기를 갖는 캐릭터의 개성과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이야기 구성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일치성의 부재는 다양성으로 변모해 배우 처지에서는 셰익스피어 극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는 것이 곧 자신이 진짜 배우임을 드러내 보이는 일종의 증서가 된다. 한 예로 햄릿은 군인, 학자, 정치가, 광인, 검객, 비평가, 관대한 왕자, 교활한 복수꾼, 초연한 귀족 등으로 계속 얼굴을 바꾸지만 관객은 이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이는 이전의 중세극에서 보던 뻣뻣하면서도 조화롭고 통합된 주인공과 궤를 달리하는 분열증적이고 모순된, 지극히 인간적이고 입체감 있는 르네상스적 캐릭터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극의 주인공들은 종교, 도덕, 의무 같은 중세적 속박,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들끓는 유혹과 욕망의 충돌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이러한 점에서 셰익스피어는 인간 본성을 간파한 뛰어난 심리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부모가 맹렬히 반대하면 남녀의 사랑이 더 거세진다는 ‘심리적 반발’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또한 ‘오셀로’에서처럼 부부간의 ‘의심과 질투가 샴쌍둥이의 한 쌍’이라는 것도, ‘맥베스’ 속 레이디 맥베스의 손을 씻는 강박적 행동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한 ‘상징적인 취소 행동’이라는 점도 묘파했다.

    할리우드의 셰익스피어 짝사랑
    특히 맥베스와 그 부인에게서 보이는 교차적인 성격 묘사는 셰익스피어 인물 탐구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마녀의 예언과 부인의 부추김으로 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소심한 맥베스는 냉혹하게 위험인물을 처단하는 냉혈한의 면모를 보인다. 그 반면 야심에 가득 찼던 레이디 맥베스는 지난날의 죄책감에 시달려 결국 몽유병 환자가 돼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맥베스와 부인은 서로에게 거울상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맥베스에게 잠자기를 권유하던 왕비는 자신이 불면증 환자가 된다. 그들은 잠재된 양심과 죄책감, 욕망과 도덕 같은 양면성을 서로에게 되비춘다. 이러한 양면성과 인간적 번민, 고뇌는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을 단순히 선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것을 넘어서 끊임없이 자신과 동일시하고 동정심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새뮤얼 존슨조차 “다른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개별적인 인간이라면,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종(種)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재해석 가능한 매혹적 인물

    또한 셰익스피어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대담성과 상상력은 늘 극적 반전으로 이어지는 플롯의 신선함을 선사한다. 남성은 여성임이 밝혀지고, 죽은 자는 살아 있으며, 예언은 빗나간다. 맥베스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너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 에 용기백배하지만, 자신을 공격하는 맥더프가 여자가 아닌 어머니의 찢어진 태내에서 꺼내진 자라는 말을 듣고 절망에 사로잡힌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몸의 일부분을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재판관으로 병장한 포샤가 안토니오의 피 한 방울이라도 없어지면 약속한 살을 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유령과 대화하는 햄릿이나 맥베스의 뛰어난 상상력은 현대에 와서 ‘식스 핏 언더’‘덱스터’‘위기의 주부들’ 같은 미국 드라마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유령이 드라마의 화자가 되거나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주인공에게 조언과 질책을 해주는 것으로까지 대물림됐다.

    셰익스피어 극의 인물은 매우 현실적이라 우리처럼 느껴지지만 시대에 따라 재해석될 정도로 충분히 모호하고 매혹적이기도 하다. 1966년 프랑코 제피렐리가 만든 영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변화하는 여권 신장에 발맞춰 이전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남성에게 예속하지 않는 당당한 여주인공을 선보였다. 또한 영화 ‘트로미오와 줄리엣’은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춘기 레즈비언 줄리엣을 창조해냈다. ‘햄릿’은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에 의해 돈키호테의 대척점에 선, 세상에서 가장 몽상적이면서도 우유부단한 인물의 전형으로 인식됐지만, 이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 불행한 아들로, 피해망상증이 있는 골치 아픈 소년으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회의주의자로, 심지어 조증 환자로도 그려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0년대 이후에는 셰익스피어 극의 주인공뿐 아니라, 셰익스피어 자체가 하나의 주인공으로까지 확대되는 현상이 벌어져 셰익스피어의 상업화가 들불처럼 할리우드를 수놓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다시 셰익스피어 붐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캐네스 브래너 같은 감독은 키아누 리브스나 덴절 워싱턴, 빌리 크리스털, 키네스 팰트로 같은 할리우드 스타를 과감히 캐스팅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대담한 연출로 감각적인 신세대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셰익스피어 영화를 창조했다.

    특히 존 매든 감독의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할리우드의 유구한 전통 위에서 이제까지 보여줬던 셰익스피어에 대한 모든 흥행전략을 모아 놓은 영화였다. 이 영화는 현대 로맨틱 코미디의 감수성을 셰익스피어 시대로 환원했다. 셰익스피어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하지만,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점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엘리자베스 시대를 꿰면서 모자이크처럼 ‘셰익스피어 코드’를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고리대금업자가 극장주 필립 헨슬로에게 돈을 갚지 않으면 코를 베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베니스의 상인’을 연상케 하고, 웨섹스 백작이 결혼을 담보로 바이올라의 아버지와 흥정하는 장면에는 선머슴아 캐서린과 결혼하는 대신 지참금을 요구하는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들어 있다. 이뿐인가. 로잘린이라는 셰익스피어의 첫사랑은 로미오의 첫사랑이며, 남장 여인의 아이디어는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나 ‘십이야’의 바이올라를 떠올리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단편들과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유머 감각은 매우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봉합돼 마치 녹는 실로 봉합한 수술 자국을 보는 느낌이다. 여기에 줄리엣과 셰익스피어 개인의 사랑이 맞물리는 액자식 구성은 셰익스피어의 진실이 허구와 모자이크됐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할리우드의 셰익스피어 짝사랑
    시간 공간 바꿔 다시 부활

    영화 ‘위대한 비밀’의 경우 셰익스피어의 비밀에 가려진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앤서니 홀든이 “뛰어난 셰익스피어의 전기는 애당초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처럼, ‘위대한 비밀’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본인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저작 혹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내세운 집단 저작이 아닌가 하는, 일종의 셰익스피어 음모론을 정치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셰익스피어라는 위대한 천재가 대학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는 촌구석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배우 출신이라는 사실은 끊임없이 사람들 내면의 열등감과 속물 근성을 건드렸고, 결국 셰익스피어 역시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제 셰익스피어는 우리 시대의 거울이자 자본이며 열등감의 원천이자 서구 문화의 자부심으로 그 영토를 확장 중이다.

    그러니 변형할 것이냐 원전 그대로 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찍이 줄리엣 가라사대, 로미오 그 이름을 바꾸라 하지 않았는가. 셰익스피어 관련 영화는 그 이름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바꾸어 다시 부활하고 있다. 마치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인 벤 존슨이 셰익스피어에게 했던 헌사를 오늘날에도 계속 자기 복제하며 증식하듯이.

    “그대는 무덤 없는 기념비며, 그대의 책이 살아 있는 한 그대도 계속해서 살아 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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