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에이브럼슨 지음/ 정경옥 옮김/ 블루엘리펀트/ 420쪽/ 1만3000원
돌이켜보면 그의 지난 30여 년 인생은 실수투성이였고 무의미했다. 특히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 걱정돼 모두 놓아버린 채 떠나기가 쉽지 않다.
그의 남편 데이비드와는 한밤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우연히 만났다. 로스쿨에서 야간수업을 마친 뒤 차를 몰고 집에 가던 데이비드는 갑자기 도로 옆 숲에서 튀어나온 큰 사슴 한 마리를 친다. 때마침 수의과대병원에서 24시간 근무하고 반쯤 졸며 운전하던 헬레나는 반대편 차선을 달리고 있었다. 데이비드를 본 그는 차를 세운 뒤 서둘러 가방을 열어 페노바르비탈이 담긴 진분홍색 물약 병과 큰 주사기를 꺼냈다.
“심각한 내장 출혈이에요. 내장은 이미 피범벅이라고요. 난 수의사예요. 날 믿어요. 이 아이는 운명을 다했어요.”
이 책은 생명, 사랑과 관련해 잔잔하지만 큰 감동을 안겨주는 소설이다. 제목 ‘언세드’는 ‘하지 못한 말’이라는 뜻으로, 남편에게조차 숨길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이자 화자인 헬레나의 과거 사건을 암시한다. 숱한 동물의 탄생과 아픔, 그리고 ‘죽음’을 지켜본 수의사가 자신이 직접 본 모습들을 표현한 이야기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헬레나가 이승에 미련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대학 졸업반 시절 보조연구원으로 일할 때 만난 보노보(난쟁이 침팬지) 혹은 피그미침팬지 ‘찰리’와의 만남 때문이다. 보노보종은 다른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면역계가 인간과 흡사하기 때문에 면역학 연구에 자주 쓰인다. 헬레나가 찰리와 상당한 친밀감을 쌓자 르네 바탁 박사는 본심을 드러낸다. 바탁은 헬레나를 시켜 찰리에게 비타민을 섞은 액체를 주사하게 한다. 그런데 그 액체는 사실 단백질과 프리온, C형 간염인자가 포함된 혈액이었다. 시름시름 앓던 찰리는 결국 눈을 감는다. 인간을 위한 외과적 영장류 실험으로 희생된 동물의 실상은 헬레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책에는 아픔을 가진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결혼에 실패한 조슈아, 지적장애인 클리포드와 그의 어머니 샐리, 교통사고 후유증을 극복하려 애쓰는 지미 등은 동물에게서 위안과 용기를 얻는다.
홀로 남은 데이비드도 아내를 잃은 슬픔과 아내가 사랑하던 동물들 탓에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특히 생전에 헬레나는 네 살 아이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는 침팬지 ‘신디’의 지능 발달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어느 날 신디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실험 대상이 될 운명에 처한다. 그러자 헬레나의 동료였던 제이시가 데이비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데이비드는 신디를 통해 헬레나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만난다.
많은 사람이 반려동물과 눈을 맞추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인간은 반려동물을 통해 감정 교류, 생명존중, 존엄성, 사랑에 대해 배운다. 책을 펴는 순간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