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겨울
1월의 아침
텅 빈 고가와 기찻길이 쉬고 있다
휴일의 차가운 보도 입을 다문 상가
야구 모자를 쓰고 간판과 횡단보도를 번갈아 본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쨍한 녹색불이 켜진다
빛은 아파트 베란다에 내려 그림자를 만들고
창은 잠시 반짝인다
출구 팔백 미터 제한속도 육십 킬로미터
아홉시 사십오분
회색빛 하늘과 먼지의 냄새
잎 달린 가지가 없다 강이 계속 반짝인다
고압선이 얽힌 전신주 옆 넘어진 자전거
즐거운 내리막길에서 슬픈 내리막길로
어제 내렸던 눈이 모두 증발하고 불이 꺼졌다
어두운 극장 안 비상구 표시가 푸르게 빛난다
― 이승원 ‘강속구 심장’(문예중앙, 2011)에서
단짝친구의 고장난 자전거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어느 날 아이는 언덕에 오르기로 한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려고. 이를 악물고 “1월의 아침”을 거슬러 오른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보려고 어깨를 들썩이거나 폴짝폴짝 뛰기도 하면서. 초반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은 나머지, 아이는 이내 헐떡거리기 시작한다. 꼭대기까지 오르기엔 언덕이 너무 높고 가팔랐던 것이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아이는 주위를 쓱 한번 둘러본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거리”의 주인공이 된다. 사방에서 “빛”이 쏟아진다. 아이는 화들짝 놀란다.
얼마 후 아이는 언덕 꼭대기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는 집이 한 채 있다. 그 집에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산다. 친구는 분명 아이의 방문을 반겨줄 것이다. 아이는 녹슨 대문에 슬며시 손을 갖다 댄다. 그러나 대문을 밀어젖히려는 순간, 아이는 집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악다구니를 듣고 만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다. 이윽고 한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잠시 후 곁에 있던 남자가 꺼이꺼이 따라 운다. 아이는 그저 “입을 다문”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다.
아이는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발길을 돌린다. 대문 옆에 자전거 한 대가 있다.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전거에 올라탄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 집에 가서 엄마가 쑨 팥죽을 먹고 싶다. 아이는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출구”는 아득했지만 다행히 “제한속도” 같은 것은 없었다. 아이는 언덕 아래쪽으로 사정없이 미끄러진다. “회색빛 하늘” 아래서 “먼지의 냄새”를 벗 삼아 죽죽 잘도 미끄러진다. 바퀴는 아이 자신도 놀랄 만큼 빠르게 굴러간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아이는 문득 울고 싶어진다. 브레이크가 고장나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내리막길”이 삽시간에 “슬픈 내리막길로” 변한다.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다. 단지 무서울 뿐이다. 눈앞이 캄캄할 뿐이다. 눈앞이 캄캄해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섣불리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다. 이윽고 바퀴는 “전신주 옆”으로 힘없이 고꾸라진다. 아이의 온몸이 눈과 흙으로 뒤범벅된다. 거리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아이의 몸은 더 아프다. 부끄러움의 자리에 통증이 들어선 것이다. 아이 눈에 눈물이 핑 돈다. “회색빛 하늘”이 샛노래진다.
다른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언덕을 내려와 학교로 향하는 길이었다. 언덕 아래서 아이는 쓰러진 자전거를 보았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자전거였다. 황토색 스펀지가 살짝 삐져나온 안장과 앙상한 바퀴살을 보니 틀림없었다. 아이는 집 앞에 있어야 할 자전거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고장난 자전거를 탄 사람이 누굴까 잠깐 생각했다. 물론 그게 자신의 단짝친구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갑자기 “거리에 쨍한 녹색불이 켜”졌다. 아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가방끈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전거는 아이의 등 뒤에서 기억 저편으로, 봄을 향해 서서히 “증발”하기 시작했다. 쓸쓸한 1월의 아침이었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1월의 아침
텅 빈 고가와 기찻길이 쉬고 있다
휴일의 차가운 보도 입을 다문 상가
야구 모자를 쓰고 간판과 횡단보도를 번갈아 본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쨍한 녹색불이 켜진다
빛은 아파트 베란다에 내려 그림자를 만들고
창은 잠시 반짝인다
출구 팔백 미터 제한속도 육십 킬로미터
아홉시 사십오분
회색빛 하늘과 먼지의 냄새
잎 달린 가지가 없다 강이 계속 반짝인다
고압선이 얽힌 전신주 옆 넘어진 자전거
즐거운 내리막길에서 슬픈 내리막길로
어제 내렸던 눈이 모두 증발하고 불이 꺼졌다
어두운 극장 안 비상구 표시가 푸르게 빛난다
― 이승원 ‘강속구 심장’(문예중앙, 2011)에서
단짝친구의 고장난 자전거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어느 날 아이는 언덕에 오르기로 한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려고. 이를 악물고 “1월의 아침”을 거슬러 오른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보려고 어깨를 들썩이거나 폴짝폴짝 뛰기도 하면서. 초반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은 나머지, 아이는 이내 헐떡거리기 시작한다. 꼭대기까지 오르기엔 언덕이 너무 높고 가팔랐던 것이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아이는 주위를 쓱 한번 둘러본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거리”의 주인공이 된다. 사방에서 “빛”이 쏟아진다. 아이는 화들짝 놀란다.
얼마 후 아이는 언덕 꼭대기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는 집이 한 채 있다. 그 집에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산다. 친구는 분명 아이의 방문을 반겨줄 것이다. 아이는 녹슨 대문에 슬며시 손을 갖다 댄다. 그러나 대문을 밀어젖히려는 순간, 아이는 집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악다구니를 듣고 만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다. 이윽고 한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잠시 후 곁에 있던 남자가 꺼이꺼이 따라 운다. 아이는 그저 “입을 다문”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다.
아이는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발길을 돌린다. 대문 옆에 자전거 한 대가 있다.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전거에 올라탄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 집에 가서 엄마가 쑨 팥죽을 먹고 싶다. 아이는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출구”는 아득했지만 다행히 “제한속도” 같은 것은 없었다. 아이는 언덕 아래쪽으로 사정없이 미끄러진다. “회색빛 하늘” 아래서 “먼지의 냄새”를 벗 삼아 죽죽 잘도 미끄러진다. 바퀴는 아이 자신도 놀랄 만큼 빠르게 굴러간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아이는 문득 울고 싶어진다. 브레이크가 고장나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내리막길”이 삽시간에 “슬픈 내리막길로” 변한다.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다. 단지 무서울 뿐이다. 눈앞이 캄캄할 뿐이다. 눈앞이 캄캄해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섣불리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다. 이윽고 바퀴는 “전신주 옆”으로 힘없이 고꾸라진다. 아이의 온몸이 눈과 흙으로 뒤범벅된다. 거리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아이의 몸은 더 아프다. 부끄러움의 자리에 통증이 들어선 것이다. 아이 눈에 눈물이 핑 돈다. “회색빛 하늘”이 샛노래진다.
다른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언덕을 내려와 학교로 향하는 길이었다. 언덕 아래서 아이는 쓰러진 자전거를 보았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자전거였다. 황토색 스펀지가 살짝 삐져나온 안장과 앙상한 바퀴살을 보니 틀림없었다. 아이는 집 앞에 있어야 할 자전거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고장난 자전거를 탄 사람이 누굴까 잠깐 생각했다. 물론 그게 자신의 단짝친구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갑자기 “거리에 쨍한 녹색불이 켜”졌다. 아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가방끈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전거는 아이의 등 뒤에서 기억 저편으로, 봄을 향해 서서히 “증발”하기 시작했다. 쓸쓸한 1월의 아침이었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