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9일 서해 한미연합훈련에 참가한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에서 승조원들이 함재기의 이착륙을 돕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 훈련 재개에 관한 한국 측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한국 측 사정으로 훈련을 중지하게 될 경우 이에 따른 손실은 한국 정부가 변상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1993년 3월 초로 예정된 훈련이 두 달 전에 취소되는 경우 285만 달러, 한 달 전에 취소되면 556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내용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냉전 종식과 함께 미군이 사상 최대 규모의 예산 삭감 압박을 받던 시점으로, 한국이 남북관계를 의식해 훈련을 취소할 경우에 대비한 미국 측의 사전조치였다.
안보당국 초미의 관심사
#2 “미국은 과중한 페르시이만 주둔군 유지비용과 국방예산 삭감 등으로 훈련 규모 축소에 전에 없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훈련 참가병력 18만 명의 30%선인 5만 여 명을 줄이는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누가 봐도 최근의 발언처럼 보이는 이 말은 ‘동아일보’ 1990년 9월 21일자 기사가 전한 정부 당국자의 언급이다. 불어닥친 긴축재정 바람으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던 당시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데자뷔를 떠올리게 할 만큼 2012년 초 분위기와 흡사하다. 20년 남짓의 시간이 만들어낸 역사의 반복인 셈. 미군의 예산 감축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예상되는 변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미연합훈련이라는 사실 역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분명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하는 시기인데, 지나치게 한가해서 이상할 정도다.”
2월 말로 예정된 한미연합사령부의 ‘키리졸브(Key Resolve) 연습’을 앞두고 이에 관여하는 합동참모본부 관계자가 1월 중순 남긴 얘기다. 한반도 유사시를 상정해 미군 증원전력의 신속한 투입과 한국군의 지원 절차를 숙달하려고 실시하는 이 훈련은 1976년 시작한 팀스피리트 훈련의 후신이다. 1994년 북한과의 핵 협상 와중에 RSOI라는 이름으로 바꿨다가 2008년 한미 양국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합의하면서 ‘중요한 결의’라는 뜻을 지닌 현재 명칭으로 변했다.
매년 봄 실시하던 이 훈련이 안보당국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원인은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100일 탈상’이라는 전례를 감안하면 3월 말까지가 북한의 애도 기간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민감한 시기에 훈련을 진행할 경우 평양을 자극할 공산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된 까닭이었다. 김정은 체제가 안정됐다고 속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북한 군부가 이를 빌미 삼아 군사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견해도 나왔다. 1월 초까지도 주요 당국자들이 훈련 일정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길 꺼렸던 이유다.
1월 5일 미 국방부 기자실에서 새 국방전략을 발표하고 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리언 패네타 국방장관(왼쪽),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오른쪽).
이러한 이유로 통상 훈련 3~4개월 전에는 구체적인 일정과 내용, 규모 등이 결정되던 키리졸브 연습은 1월 들어서도 개최 자체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로 남았다. 앞서 합참 관계자의 말처럼 준비에 한창이어야 할 군당국 주변의 분위기가 예년과는 사뭇 달랐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워싱턴 “새로운 공식 필요”
그러나 이후 청와대 주변에서 ‘원칙’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월 5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남북문제에서 조바심을 낸다든가 서둘러서 원칙을 흩뜨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북 원칙론의 핵심’으로 통하는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 기획관으로 승진한 것이 1월 15일. 결국 한미 양국은 예년과 같은 수준에서 키리졸브 연습을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1월 27일 한미연합사령부는 2월 27일부터 3월 9일까지 진행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해외로부터 전개되는 800여 명을 포함해 미군 2100명과 한국군 20만 명이 참여해 예년 수준으로 치른다는 설명도 뒤따라 나왔다.
한편 이 훈련의 세부과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변수가 떠올랐다고 정부 당국자들은 전한다. 바로 훈련비용 부담 문제다. 1월 5일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새 국방전략 지침과 1월 24일 오바마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로 공식화한 국방예산 감축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주한미군에는 영향이 없다”는 그간 미국 측의 공식 설명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워싱턴 당국자들의 기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새로운 공식(formula)이 필요하다”는 얘기인 것으로 전해진다. 연합훈련의 경우 미군 측 병력이나 장비의 투입 및 수송에 들어가는 비용은 미국이, 한국 측 병력의 비용은 한국이 부담하는 것이 그간의 관례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급격히 달라진 만큼 다른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한국 측 요구에 따라 훈련과제가 늘어나고 투입 장비의 규모가 상향 조정될 경우 그 비용까지 미국이 부담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논리인 셈이다.
물론 반대로 당초 합의에 따라 준비되던 훈련이 한쪽의 요구에 따라 갑자기 취소될 경우 그간 투입된 비용의 처리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미국 측 인사들이 이를 뒷받침하려고 거론하는 사례가 바로 서두에서 소개한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 합의 당시의 비용처리 원칙 문제다. 남북한 관계 변화에 따라 훈련 일정이나 내용에 갑자기 변동사항이 생길 경우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항공기와 함정의 유류비 등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 설정해둬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 측 군 당국자들이 전하는 미국 측 속내는 어떻든 앞으로 한미연합훈련과 관련해 한국 측의 비용 부담 비율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주간동아’가 접촉한 워싱턴 인사들의 언급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실제로 ‘한국 측 요청에 따라 이뤄지는 훈련의 비용은 한국이 부담해야 옳지 않느냐’는 미군 당국의 분위기는 2010년 11월 열렸던 서해 연합훈련 과정에서 이미 확인된 적 있다.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참여한 사상 최대 규모의 이 훈련은 원래 천안함 사태 직후에 기획된 것이었지만, 수차례 연기와 강행방침을 오가는 와중에 미국 국방부가 우리 측에 준비비용 문제를 거론하며 불만을 제기했던 것. 일각에서는 그 과정에서 빚어진 백악관과 미국 국방부, 태평양사령부 사이의 불협화음이 로버트 게이츠 당시 국방장관 사임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마저 나왔다.
2009년 3월 18일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키리졸브 연습과 관련해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조선중앙TV에 출현해 남북군사통신 차단을 선언하고 있다.
“시계는 계속 돌아가고 있다”
키리졸브 연습을 앞두고 최근 북측의 언급 수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도 서울과 워싱턴 당국자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난해 11월 24일 ‘조선중앙통신’은 “우리의 신성한 영해, 영공, 영토에 단 한 발의 총포탄이라도 떨어진다면 연평도의 그 불바다가 청와대의 불바다로, 청와대의 불바다가 역적 패당의 본거지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불바다로 타 번지게 될 것”이라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보도’를 발표한 바 있다. 지난해 키리졸브 연습을 앞두고는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명의로 “상상할 수 없는 전략과 전술로 온갖 대결책동을 산산이 짓부숴버리는 ‘서울 불바다전’ 같은 무자비한 대응을 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는 2월말 키리졸브 연습을 계기로 평양의 행보가 훨씬 공격적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전망을 내놓는다. 김 위원장 사망 이후 내부 단속에 치중했던 김정은 체제가 김 위원장 생일(2월 16일)을 계기로 애도 분위기를 마무리하고 권력운용을 본격화하면서 강도 높은 긴장 조성을 통해 몸값 높이기에 나설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이란 핵개발 문제와 대선 일정에 온 신경이 집중된 미국 백악관의 시선을 붙잡으려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 3월 시점을 활용하려 할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올해 키리졸브 연습은 공교롭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외부와 내부의 안보변수가 한꺼번에 구체화하는 시험무대나 다름없다. 익명을 요청한 한 안보연구기관 전문가는 “경제위기에 따른 미국의 국방전략 변화와 북한의 후계체제 구축이 동시에 힘을 발휘하는, 어느 때보다 뜨거운 2월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째깍거리고 있다.